시민자치정책센터,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중심의 해체와 ‘탈중앙’이라는 시대적 흐름이 바로 다양성을 의미하듯이 이 시대 ‘지역운동들’은 한마디로 다양성 그 자체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지역운동을 하는 분들의 이유는 정말로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운동은 교육운동과 더불어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지역운동은 바로 사람을 변화시켜 사회를 바꾸려는 운동인 것이다. 지역운동은 흔히 예산감시나 비리감시 같은 지방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 유권자운동, 조례제정이나 입법청원 등 제도개선, 지역의 권력을 민주적으로 바꾸기 위한 지방정치의 참여 등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로만 지역운동들의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각 지역에서 자치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목표들은 모노칼라가 아니다. 내가 속한 지역운동을 보더라도 이번 6ㆍ13지방선거에서 기초의원으로 시민후보를 출마시켜 당선시켰고, 그 결과 지자체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넘어 지역주민이 주인 되는 진정한 지역자치를 어떤 경로와 상으로 만들어갈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시민자치정책센터에서 펴낸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는 국내외 자치운동들의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면서도 풀뿌리자치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사회의 구성원인 사람을 바꾸는 운동, 사회를 바꾸는 운동으로 명확히 하고 있다. 그 동안 분절적으로 전개해 왔던 지역별 운동을 모으고 소개한 것은 지역 차원에만 머물러 있던 사고와 관심을 넓히는 데 기여하였다. 많은 지역운동들의 경우 총체적 고민이나 장기적 관점을 갖기보다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중심으로 도움도 요청하고 외부에 관심도 갖게 되곤 한다. 이 책에서 제시한 지역별 사례의 교훈은 이벤트식ㆍ일회성 사업보다는 하나의 사업을 통해 사람을 챙기고 이를 주민조직으로 발전시키는 장기적이고 계획적인 안목을 갖고 사업을 하면 많은 성과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간과하기 쉬운 원칙을 실천적 사례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아쉬운 것은 사람과 사회를 바꾸는 자치운동의 관점이 책 전반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총론적 의미에서 개념정립은 하였지만 실제 글을 풀어나가는 데서나 국내외의 사례제시에서도 좀더 초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다음으로, 시민운동단체의 지방선거 참여에 대한 문제에 대해 피해 가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이고 긍정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상황이나 객관적 요구를 중심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지역별 준비정도, 시민자치운동의 연장, 당선 이후 책임성에 대한 문제까지 제시하면서 실사구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시민자치운동ㆍ지방자치운동의 중심에서 선거를 바라보고 이후 지방정치를 바라본 것은 실제 지역에서 지방자치운동을 전개하고 있고 이번 선거에 시민후보를 내서 당선을 시킨 지역의 현실을 감안할 때 특히 많은 교훈을 주었다. 물론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비전과 방안이 제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통해 시민자치운동과 지방자치의 대안에 대한 고민을 긴 안목 속에서 접할 수 있다. 지방자치를 통해서 지향하는 사회는 무엇인가? 우문이지만 아쉽게도 현답은 없었다. 추상적이고 막연한 명제인 “지방자치의 주인은 주민이다” “주민을 주인으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사업의 사례나 방식의 문제보다는 경로와 과정에 대한 확고한 입장이 있어야 한다. 목적과 지향이 뚜렷하지 않은 곳에 사람이 결집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물며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거대한 일에 한번 해보자 식의 의욕만으로는 장기적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책에서는 이에 대한 자기주장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대신 여러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뚜렷한 대안이 없기에 참고사례를 다양하게 제시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몇 가지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방자치가 온갖 방해가 있어도 반드시 제자리를 잡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해준다. 자신들의 권력욕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일부 국회의원들의 지방자치법 개정안 제출, 지역에서 그 동안 수많은 특권을 누렸던 이른바 지방유지들, 군사독재식 권위주의적 사고에 물든 낡은 사고를 가진 공무원들, 요구만 하고 뒤에서 비난만 일삼는 많은 일반시민들, 사실 이것들은 지역에서 자치운동을 하면서 가슴을 어둡게 하는 모습들이다. 지역자치운동들은 과연 이러한 암울한 지형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구체적으로 갖고 활동하고 있는가? 이 책은 목표와 방향을 뚜렷이 하고 장기적 관점으로 사업하면 가능하다는 믿음을 주고 있다. 자치운동의 시작과 끝을 돌아보게 하고 나아가 올바른 지방자치의 믿음을 갖게 한다. 책을 덮으며 제목을 혼자 되뇌어보았다.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왠지 정답게 느껴지고 희망이 가슴에 그려진다. 지역에서 힘들고 어렵지만 한발 한발 실속 있게 성과를 챙기고(느리게), 전국의 많은 지역에서 이런 힘이 모아져 거대한 물결을 이루어(질주한다), 희망의 사회를 건설한다(풀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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