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005년 올해로 우리는 해방 60주년을 맞게 된다. 역사의 긴 흐름으로 볼 때 60년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기간은 한국의 역사에서 변화의 폭과 속도가 가장 컸던 격동의 시기임에 틀림없다. 우선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자마자 우리는 국제적 냉전의 심화 속에서 분단과 전쟁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한 격변 속에서 남북의 분단국가가 건설되었다. 이에 뒤이어 남한에서는 압축적 산업화가 이루어졌는데, 서구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던 그것이 한국에서는 불과 몇십 년 만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태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저항은 마침내 1987년 6월항쟁과 이를 통한 민주화이행을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해방 60년은 가장 고통스러운 환경에서도 국가건설과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 등 한국근대화의 주요과제들을 완성시킨 기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 60년의 이와 같은 근대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 갈등은 매우 컸다. 그것은 한국의 이데올로기적 흐름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지배세력과 이에 저항한 반대세력 간의 갈등을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국가권력을 장악한 지배세력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배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킨 반면, 저항세력은 이에 대항하여 자신의 저항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이데올로기 흐름은 국가중심의 지배이데올로기와 사회의 저항이데올로기가 서로 충돌한 양극적 특징을 보여준다.
한국이데올로기 흐름의 이같은 양극화에서 한 축을 차지했던 지배이데올로기는 적어도 권위주의시기 동안에는 보수주의적인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국가권력을 장악했지만 역사적 또는 절차적인 측면에서 그 정당성 부족에 직면한 지배세력이 자신의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해 기존의 정치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저항세력 역시 현상타파의 저항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같이 양극화된 한국의 이데올로기적 흐름을 분석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지배이데올로기와 저항이데올로기 각각은 그 내부에 다양한 하위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배세력과 저항세력이 자신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하위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배이데올로기의 주된 내용을 채웠던 한국보수주의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전개되었고, 그것은 어떤 특징과 문제점을 지녔는가? 이 글은 한국보수주의의 그런 점들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우선 전제적 논의로서 서구보수주의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서구보수주의와의 비교를 통해 한국보수주의의 특징을 보다 잘 살펴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한국보수주의의 형성과 전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한국보수주의가 나름의 연속성을 가지면서도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을 어떻게 변화시켜나갔는지를 보여주리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시점에서 그동안 전개된 한국보수주의에 대해 나름의 평가를 해보는 한편, 한국보수주의의 향후전망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보수주의에 대한 검토에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한국에 논리와 체계를 갖춘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 즉 정치철학으로서의 보수주의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한국에는 정치철학적 수준의 논리와 체계를 갖춘 보수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논자에 따라서는 한국에 보수세력은 있어도 보수주의는 없다고 언급되기도 한다. 만일 한국에 보수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집권세력과 기득권세력의 정치적 구호로서의 보수주의 또는 기존 정치질서를 옹호하기 위한 집권세력의 ‘상황적 보수주의’1) 여기에서 ‘상황적 보수주의’는 지배세력 또는 집권세력이 자신이 부과한 기존의 정치질서를 옹호하기 위해 그 내용이 무엇이든 현상유지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수용하는 몰가치적 의미의 보수주의를 의미한다(강정인, <보수와 진보>, R. 니스벳 & C. B. 맥퍼슨, 강정인·김상우 옮김, <에드먼드 버크와 보수주의>, 문학과지성사, 1997, 32~36쪽).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2) 같은 글, 32~38, 52쪽; 김병국 외, <한국의 보수주의>, 인간사랑, 1999. 46~47쪽.
그러나 논리가 취약하고 체계성이 없다 하여, 즉 정치철학적 내용을 갖추지 못했다 하여 한국에 보수주의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논리와 체계가 부족한 상태라 할지라도 그것이 보수세력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보수세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는 한, 우리는 그것은 보수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보수세력이 끼친 영향이 엄청나게 크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논리성과 체계성의 결여만을 근거로 한국에 보수주의가 없다고 말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문제는 논리성과 체계성의 결여로 한국보수주의의 내포와 외연을 명확하게 잡아내기 어렵다는 점인데, 이는 각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보수세력이 지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존질서 옹호의 보수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만들어냈고 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일정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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