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희 참여연대공동대표,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유치찬란한 작태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마오쩌둥의 격문을 뒤집은 한나 아렌트의 이 말이 진실이라면, 작금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의 소동들은 이 나라 지배 세력이 행사하는 저급한 폭력을 그대로 드러낸다. 권력이란 자기의 이름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을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위임받았을 때 생성된다. 반면 총구로 상징되는 폭력은 일정한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그 자체 정당성을 가지는 권력과는 달리 폭력은 목적 합리성만 따질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이중 삼중의 변명이 필요하다. 물론 대부분의 폭력은 보다 가중된 폭력으로 진행되는 악순환의 경로를 따른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이충상 상임위원(국민의힘 지명)과 김용원 상임위원(대통령 지명)이 자행하는 작태들을 두고 이런 거창한 이야기까지 꺼내는 것은 일견 과잉일 터이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위선을 불의로 위장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분노자”의 개인적 패악질 수준의 것이다. 국가인권위원장에게 법조계 선배 운운하며 “말버릇이 없다”는 말로 회의 진행을 무력화시키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보내는 보고서에 대해 일본권 성노예제 “타령”이라는 망발을 내뱉는 김용원 상임위원의 행태는 인지 능력상의 퇴행을 의심케 한다. 혹은 성소수자에게 “기저귀를 차고”라는 낙인을 찍고, 차별금지법에 대해 성정체성 부분을 기독교적 정신으로 반대한다는 반헌법적 주장을 해대거나 이태원참사가 “피해자들이 몰주의해서” 일어났다는 막말을 퍼붓는 이충상 상임위원 역시 항문기적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막장식 분탕질은 철저히 집단적이다. 개인의 퇴행을 넘어 조직의 최말단에 ‘깍뚝’ 서 있는, 그래서 인권위원이라는 이름으로 인권을 지워나가는 맨 앞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인권상황 보고서를 두고 “정부를 까는 것”이라 성화 부리는 짓이나, 소위원회의 의결 관행을 맘대로 바꾸어 한 사람의 반대만으로 안건 자체를 기각시켜버린다든지 몽니와 지연전략으로 전원위원회의 안건 심의를 방해하는 이상행동들은 어느 개인의 인지적, 정서적 지체의 문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최근 충남도의회나 서울시의회에서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거나 폐지하려는 상황과 연관된다. 혹은 방송심의위원회나 선거방송심의위원회가 정부 비판적 보도에 무차별적인 제재조치를 하고, 대통령실을 비롯한 정부 여당이 툭하면 명예훼손 등으로 입막음 소송을 제기하며 검찰과 법원이 밑도 끝도 없는 압수수색으로 언론인과 언론기관을 스토킹하며 괴롭히는 현상과도 직결된다. 나아가 그것은 노란봉투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하고 화물연대 파업을 물리력으로 봉쇄시켜버린 야만과 상통한다.
끊임없이 자유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국민이 아니라 정부와 자본에 전유시키면서 국민 위에 군림할 자유, 국민을 착취할 자유로 변용하는 현 체제의 하찮은 소모품이자 ‘깍뚜기’ 선봉대원으로 이 두 상임위원이 자리하는 것이다.
법질서정치 혹은 법률전(lawfare)
인권과 민주주의와 평화는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다. 그래서 입헌적 민주주의는 다수결에 입각한 민주제의 원칙에 인권과 평등을 보장하는 공화적 질서를 결합한다. 민주국가와 법치국가의 원리는 그것의 구체화 형식이다. 하지만 현 정부가 틈만 나면 외치는 법질서(Law and Order)는 이런 헌법 명령을 송두리째 외면한다. 헌법이 요구하는 법치주의는 법으로써 국가권력을 통제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확보함을 추구한다. 하지만 정부의 법질서 정치에는 이런 인권의 요청이 자리하지 않는다. 오로지 적대의 정치, 그것도 수많은 서민 대중을 정권의 적 혹은 체제의 적으로 내몰아치는 폭력의 정치만이 존재한다.
법률이 이런 폭력의 수단으로 전락한 법률전(法律戰)은 이제 통치의 상수가 되어 버렸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의 중앙정보부 등 비밀경찰이 수행하던 물리력을 이제 법률과 법률 관료들이 대행하여 구사한다. 검찰공화국 혹은 검찰 정치의 양상들이나 정치의 사법화 현상들은 이런 법률전의 한 양상에 불과하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들며 유죄로 확정되기 전까지는 그 어떠한 정치적 책임도 지지 않으려 드는 작금의 세상, 모든 사회문제를 법률안 발의만으로 종결짓는 국회의원들의 무책임한 행태들, 사법농단 사태는 물론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사건의 경우에조차 형사사법적 책임만이 국가적 의제로 구성되는 현실 등등 모든 것이 법률의 문제로만 환원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소멸하는 것은 토론과 숙의로 상징되는 민주적 정치과정이다. 혹은 법률이라는 통치의 수단을 확보하지 못하는 서민 대중들이 그 한편의 총알받이가 된다. 실제 21세기 법률전은 남미에서 좌파 정부를 전복하는 수단이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동안 어렵사리 이루어온 민주주의와 인권보장이라는 성취를 허물어뜨리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한때 신자유주의에 파묻힌 사람들이 “경제헌법”이라는 명분으로 헌법 제23조 제1항의 재산권 보장에 관한 규정만 남기고 나머지 기본권 관련 조항들은 모조리 삭제하자고 외쳤던 일이 있었다. 헌법상의 기본권을 시장적 자유로 대체하고, 사유재산과 교환가치를 중심으로 한 법률이 그 헌법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는 소위 예의 법률전이 “법률의 헌법화”로 변형된 모습이었다. 대중은 정치로부터 유리되고(소위 탈정치화) 우리의 자유와 권리는 이 법률전쟁 속에서 오로지 각자도생의 자유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끔 몰아갔던 것이다.
우리 모두의 정치를 위하여
랑시에르에 의하면 인권은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의 권리다. 그래서 인권의 장은 정치투쟁으로 가득하며 그 속에서는 그 권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아우성과 그들로부터 권리를 빼앗으려는 자들의 탐욕이 충돌한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자유”라는 말은 대중의 귀를 속이는 입발림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빼앗은 권리를 정치든 경제든 소수의 집단에 전유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담는다.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자유가, 복지라든가 돌봄이라든가 혹은 소득재분배, 국·공유화 등을 주장하는, “무지하고 거만”하며 “사유하지 않는” 대중들의 것일 수 없음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법과 질서를 말하면서 인권을 빼앗고, 자유를 내세워 인권을 지워나가는 이 비리한 행태는 이미 난장이 되어 버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가장 속된 모습으로 재생산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이 정치 의제로 구성되는 가장 유효한 장치 중의 하나다. 그것은 대중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인권을 재구성해 낼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싫어하는 인권과 민주주의와 평화의 담론들이 그 정치적 실질을 획득하는 공유지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 두 상임위원의 행태는 심상치 않다. 이들이 전개하는 반인권(위원회) 책동은 우리 사회가 봉착한 위기 증후군들의 대표 단수로서 실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공격하는 것은 국가인권위원회라는 제도화된 인권레짐만이 아니다. 성소수자, 재난피해자, 강제 동원 피해자 등과 같은 소수자만이 그들의 폭력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주된 타겟은 우리 모두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이다. 주지하듯 신자유주의는 대중이 정치의 주체로 자리하는 것을 거부한다. 국가통치의 과정은 대중이 아닌 기술자와 지식인, 기업가, 관리인 등의 몫으로 치환한다. 이런 신자유주의 전략의 가장 저급한 형태가 현 정부가 구사하는 법률전 내지는 법질서 정치이다. 우리를 권력 주체의 자리에서 통치의 대상으로 끌어내리고 우리의 삶을 전방위적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그 전위의 역할을 한다. 그동안 민주화의 성과를 부정하고 대중의 정치화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두 상임위원이든 대통령 또는 그의 정부든 관계없이 이런 패악의 정치를 위임한 바 없다. 우리 사회가 국가인권위원회의 현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며 우리의 힘(권력)으로 그들의 폭력을 내몰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막말과 망발 속에 숨은 통치와 자본의 폭력으로부터 우리 모두의 정치를 복원해 내어야 하는 것이다.
월간 <복지동향> 2024년 4월호(제3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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