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 영남대학교 휴먼서비스학과 교수
누구에겐 정의 구현 드라마 같았을 것이다. 출구조사가 발표되자 어느 쪽에서는 환호가, 어느 쪽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많은 이들은 밤을 새우며, 범야권 200석 달성으로 드라마의 완성을 보고자 했겠지만 그엔 이르지 못하였다. 그래도 집권 여당으로서는 역사상 최악의 총선 패배였다. 그만큼 윤석열 정부는 민주시민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 덕에 자녀의 입시 비리 대법원 재판을 앞두고 총선에 뛰어든 정치인은 그 최대 피해자로 분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사법적 정의와 별개로 정치적 정의는 구현되는 듯했고, 민주주의 기본부터 무시한 무도한 정권에는 국민의 냉혹한 심판이 내려졌다. 딱 거기까지였다.
총선이 끝나자 각종 특검 청구서들과 전 국민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 같은 전리품성 공약 챙기기만 횡행하고 있다. 물론 기초적인 사법 정의를 뒤흔든 채상병 사건이 결코 가볍다거나 고물가 시대 사람들의 생계나 자영업자의 어려움에 외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총선 결과의 모든 것인 양 정치를 뒤덮고, 일시적인 선심성 공약이 총선에 승리한 야당의 핵심 과업인 양 밀어붙이는 것은 분명 문제다. 만약 총선이 그동안 민심을 외면했던 정권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새롭게 형성되는 입법권력이 할 일이란 누구를 혼내주거나 전리품을 뿌리는 일이 전부가 아니라 민심에 부응하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정책 입법을 추진하는 일이 핵심이어야 한다.
누구에겐 정의 구현 드라마 같았을 총선, 진짜 고통받는 이들에겐?
그 민심이란 개발이나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는 명분으로 오용되고 있는 ‘민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대국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중노동시장 구조 아래 열심히 일해도 불안과 부당한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여전히 장기간 노동 속에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여전히 지독한 빈곤의 늪에 방치된, 고립과 고독사의 위기에 몰려있는, 코로나19 이후에도 여전히 아파도 쉴 수 없는, 아이를 기르는 행복보다 그 부담에 짓눌려 있는, 인간다운 삶을 지키고 싶어도 돌봐줄 사람이 없거나 그런 부담이 되기 싫어서 시설로 들어가야 하는, 의료 선진국이라지만 기본적인 만성질환 관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건강한 일상을 잃어가고 있는, 이 땅에서 일하며 살고 있지만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제와 차별을 겪고 있는 국민들의 마음이다.
하지만 우선 총선 공약에서부터 이러한 국민의 마음은 실종되어 있었다. 그래도 기초연금이니, 의료 보장성 확대니 굵직한 정책 공약들이 쟁점을 차지했던 이전의 선거보다 분명 퇴행적이었다. 이미 국회 국민연금 공론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정책 쟁점으로 떠올라있는 국민연금 등 노후소득보장 문제나 의대 증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사 집단의 갈등으로 더욱더 절실해진 의료체계 개혁 논의에 대해서 거대 양당은 오히려 제대로 된 공약을 내지 않았다. 선거라는 결정적 정치 국면에 진짜 쟁점에 대한 의도적 회피했다. 정치세력으로서의 존재 이유부터 스스로 부정하는 파렴치함이었다.
핵심 정책 쟁점은 무책임한 회피 일관, 대안세력도 없었던 선거
그렇다고 제삼지대를 주장하며 등장한 세력들이 이 역할을 대신하려 한 것도 아니었다. 조국혁신당에는 혁신이 없고, 개혁신당에는 개혁이 없고, 새로운 미래에는 미래가 없었다. 신생정당으로서 정책개발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자신들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정책 지향에 어떤 차별성을 가졌는지조차 내세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저 누구는 처벌의 과도함을 정치적 심판으로 되갚으려는, 누구는 특정인에게 장악된 정당을 나와서 정치적으로 살아남겠다는 자기 정치의 의도만 노골적이었을 뿐이다. 그나마 그동안 정책에 진심을 보였던 진보정당은 원외 정당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선거라고 할 수 있을까? 선거에 국민은 정치 치정 드라마의 판정단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라면 선거는 국민이 어떠한 정책을 어느 방향으로 전개하겠다는 정당들 사이에서 선택권을 행사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를 통해 비로소 주권자로서 국민의 정치적 결정권이 구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선택에 앞서서 이를 위한 선택지가 무엇인지 아무에게도 듣지 못했다. 그저 들은 거라곤 내가 아닌 누가 얼마나 나쁜가 하는 소리뿐이었다. 결국 자기 존재 이유조차 부정하는 뻔뻔한 정치권은 주권자의 국민을 드라마 판정단으로 전락시켰다. 그 결과를 두고 누구는 심판을 받았다고 하고, 누구는 승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결과는 장기간 노동과 불안정한 일자리에, 빈곤의 늪에, 차별과 배제에, 고립과 고독에, 양육과 돌봄 부담에, 악화되는 질병에 빠진 어떤 국민에게도 승리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퇴행이라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퇴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2010년 교육감 선거 무상급식 공약 이후 대선과 총선 등 주요 선거 때마다 정치적 진영의 구분 없이 복지에 대한 공약 경쟁이 이루어지면서 보편적 복지에 대한 정치적 합의가 형성되었다. 그 정점은 지난 21대 국회였다. 스스로 촛불혁명 정부를 자처했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나의 삶을 책임지는 포용국가를 내세웠던 가운데 정부 여당이 180석의 대승을 거두어 정책개혁의 걸림돌은 사라졌었다. 하지만 오히려 유의미한 법·제도적 개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촛불혁명에 기꺼이 나서고, 그로 인해 세워진 집권 여당에 힘을 실어주었던 결과는 그대로, 혹은 더욱더 팍팍해진 삶이었다. 정책에 대한 신뢰와 효능감은 추락했다. 결국 대선은 미래 선거, 총선은 심판 선거라는 민주화 이후 패턴을 깨뜨리고 그 이어진 대선은 심판 선거가 되었다. 심판 선거로 뽑힌 행정 권력은 미래는커녕 현재까지 망가뜨리고 있었고, 또다시 국민은 심판 선거를 치러야 했다. 미래 경쟁이 사라지는 동안 그나마 있던 정책 경쟁마저도 심판 선거에 매몰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와 비판과대안을위한사회복지학회, 건강정책학회는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 함께 총선 전인 3월 말에 공약을 평가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현재의 참담함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영역별로 우리 사회의 과제가 무엇이고, 그에 비해 현재 정치권이 무엇이 부족한지를 따져볼 수 있었다. 당장 공약 평가만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22대 국회의 제대로 된 역할을 위한 사전작업이기도 하였다. 그 자리에서 작금의 정치적 퇴행과 전망에 대하여 발표한 윤홍식 교수(인하대학교)는 “우리는 정말로 여전히 삶을 사랑할까?”란 질문을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을 인용하며 던졌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희망의 근거가 있어서라기보다 우리가 아직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결연한 메시지였다. 그렇다. 희망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희망을 바란다면, 학계와 시민사회부터 자리를 지키자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솔직히 정치권을 탓하기 전에 이러한 퇴행에 학계나 시민사회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제안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자기 자리 지키기. 갈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정책에 목소리를 높였을수록 결국 정치권으로 들어가 버리는 관행화된 패턴은 결코 진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정책을 직접 들어가 실현하겠다는 명분들을 내세우지만 결국 들어가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수많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포위된 자신일 뿐이다. 전문가라며 들어가지만, 정치권에서는 초보자일 뿐이고 정치만으로도 바쁘니 자기 전문성은 갱신을 멈춘다. 물론 그러한 선택은 개개인의 몫이라 개인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로가 관행화되는 것은 분명 퇴행의 원인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정책은 진보적 방향성이나 아이디어 수준으로 이야기될 것이 아니다. 실제 대안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도화된 내용과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이는 혈기 왕성한 학자와 활동가만으로 이룰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 축적된 지식과 역량을 요구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갖출만한 경륜과 지위에 이르는 사람마다 정치로 유입되는 관행은 이를 가로막을 수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후배 학자나 활동가의 노력마저 왜곡된 시각에 노출시키고 만다. 정책 논의는 복잡다단한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을 돌파할 수 있는 고도화된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나마 정책 발전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은 정치권이나 정부에 한자리나 노리는 짓들로 폄하된다.
시민사회야 그 일정 경력 이후의 진로가 사회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고도 하더라도 학문의 독립성을 위해 정년 보장의 혜택까지 주어진 학자들의 이탈 관행은 윤리적으로도 완전히 자유롭다고 하기 어렵다. 정치가 극단적으로 양극화되는 이면에는 사회적 논의가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이루어질 수 있는 독립공간의 부재가 있다. 독립공간의 핵심 주체인 학계와 시민사회에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적은 탓도 크다. 기계적 중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얽매이지 않으면서 각자의 가치와 근거만으로 생산적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학계와 시민사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정치권에 들어가 자기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공간의 힘으로 정치권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월간<복지동향> 2024년 05월호(제3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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