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24 2024-10-01   8064

[기획4] 의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일차의료를 요구하자

김진환ㅣ서울대 보건환경연구소 교수

지금은 작고한 어느 대기업 회장은 ‘업(業)의 본질’을 매우 강조했다고 한다. 사회에 문제를 일으킨 기업을 이끌던 사람의 생각을 빌려다 말하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지만, 딱히 더 좋은 설명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쓰고 있다. 기업은 돈을 버는 곳이니 ‘일의 본질’이라고 하면 당연히 돈을 번다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었을 테다. 그렇다면 의료의 본질이 뭐냐고 물으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의료는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고 그 끝에는 사람을 살리는 일도 있으니, 의료의 본질이라고 하면 환자의 고통을 덜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의료의 본질이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일이라는 당연한 말을 길게 하는 이유는 현실이 복잡하게 꼬여 본질을 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된 <의료개혁 1차 실행방안>은 정말로 정부가 할 수 있는 건 있는 대로 꺼내 놓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용이 많다. 안타깝고 또 한편으로는 황당한 일은 실행방안이 예정대로 집행된다고 해도 당장 미디어를 뒤덮고 있는 응급실 뺑뺑이 문제나 소아청소년과 오픈런 같은 속칭 필수의료 공백에는 큰 영향을 미치기 어려울 것이란 사실이다. 의사들이 “정부 정책은 나쁘니 일단 철회하라”라며, 대안도 없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좀 이상한 일이다.

응급실과 소아청소년과는 뭐가 문제일까?

응급실과 소아청소년과에 먼저 문제가 생기는 건 그저 우연일까? 진상 환자와 보호자가 많이 몰리는 곳이라 그렇다는 의료노동자 입장의 설명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왜 거기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몰리게 되는지는 좀 더 따져보아야 할 문제다.

응급실과 소아청소년과가 인류가 지구에 등장하면서부터 있었던 건 물론 아니지만, 응급실과 소아청소년과의 역할을 하는 무언가는 언제나 있었다. 그게 서낭당에 드리는 치성이든, 할머니 약손이든, 네이버 지식인이든 간에 말이다. 찬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난 아이에게 검사하고 주사를 맞게 하는 대신, 따뜻한 물을 마시게 하고, 차가워진 배를 손으로 데워주는 방식이었을 뿐.

의료 기술이 발전하고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환자를 더 잘 보기 위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수많은 전문 과목이 생겨났다. 의료 전문직들은 전문성을 키워 환자를 더 잘 치료하기 위해 자신들의 일을 잘게 쪼개 쓰지만, 그 결과 안타깝게도 자신의 전공과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 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자기 일이 아니라며 민원인을 이리저리 보내는 공무원이 복잡해진 현대 관료제의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상징하듯, 의사도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없다”라며 환자를 이리저리 돌리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을 분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키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고, 정치적 성향, 아니면 직업에 따라 나눌 수도 있다. 그중 의료는 질환에 걸린 장기(臟器, organ)에 따라 환자를 나누는 방식을 주로 택한다. 신경과는 신경을 산부인과와 비뇨의학과는 각각 여성과 남성에게만 있는 장기를 본다. 하지만, 응급의학과와 소아청소년과는 좀 다르다. 응급의학과는 장기와 무관하게 응급한 환자를 보고, 소아청소년과 역시 장기와 무관하게 나이가 어린 소아와 청소년을 본다.

환자를 나누는 방식이 다르면 진료의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응급의학과에서는 환자가 얼마나 치료를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지를 구분하는 환자 분류(triage)가 중요해지고, 소아청소년과에서는 아이들의 발달과 성장까지 고려하며 질환을 치료하는 일종의 전인적 접근이 중요해진다. 다른 과 진료라면 어느 장기인지 얼마나 병이 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만, 응급의학과와 소아청소년과 환자는 질환과 중증도가 천차만별이다.

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큰 차이를 낳는다. 한국 의료는 질병이 가벼운 사람은 근처의 작은 병원이나 의원에서, 상대적으로 병이 무거운 사람은 상급종합병원 같은 큰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다. 의료 전문가들은 중증 질환을 치료할 때마다 적자가 난다는 주장을 오래 전부터 해왔고, 이에 정부는 질병이 중하고 치료하기 어려울수록 더 많은 의료수가를 지급하는 방향으로 건강보험을 조정해 왔다.

공장에서도 하나의 생산 라인에서는 하나의 물건만 생산해야 효율이 올라가듯 병원에서도 한 명의 의사가 비슷한 질환을 하나의 방법으로 치료해야 효율이 올라간다. 중증질환 환자를 치료했을 때 받는 돈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환자 수가 많은 중증 질환 환자를 치료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처우가 상대적으로 더 빠르게 좋아졌다. 특히나, 암은 환자가 어느 정도 기다린다고 해서 병이 크게 나빠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환자가 기다릴 수 있으니, 환자를 공장처럼 돌아가는 병원의 일정에 맞추어 오고 가게 하면 병원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서울 대형병원에 다니는 환자라면 한 번은 겪곤 하는 “이번 주에 MRI를 찍으려면 목요일 새벽 3시에 오셔야 하고, 평일 낮에 찍으려면 2달 후 목요일 오전에 와야 한다”라는 황당한 양자택일은 병원의 작동 방식을 잘 보여준다.

병원이 제조업 공장 같으니 공장의 문법과 잘 맞지 않는 진료를 하는 의사일수록 일은 괴롭고, 대우는 나쁠 수밖에 없다. 똑같이 중증 환자를 치료하더라도 비싼 약이나 기계를 가능한 한 많이 쓰는 방식으로 진료하기 어려운 의사들이 그렇다. 사회적으로는 가장 바람직하고 필요한 의료임에도 불구하고 저렴하고 효과 좋은 약과 기술을 잘 조합하는 전문성을 발휘해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는 병원에 별 수익을 가져다주기 어렵다. 응급 환자가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자리를 내도록 지키고 있어야 하는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전문성을 가진 의료진이 각종 사고와 재난에서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려면 밤낮없이 병원을 지켜야 하지만 병원을 돈 버는 공장으로 생각하면 이들은 적자만 만드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환자는 이마에 질환명을 써 붙이고 응급실로 걸어오지 않는다. 어딘가 아파서 온 환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판단하기 어렵다. 판단할 수 있더라도 다른 대안이 없는 환자들이 응급실에 밀려든다. 응급실에 있는 의사들은 이런 환자들과의 관계 맺음을 피할 수 없다. 그게 싫다면 환자를 받아줄 수 있냐는 전화가 걸려 왔을 때부터 ‘여력이 없다’며 거부하는 수밖에 없다. 도저히 여력이 되지 않는 환자들을 수용하는 일을 거부한다고 해서 일이 쉬워지지는 않는다. 응급의료의 작동 방식을 파악한 환자들이 우선 응급실로 밀고 들어가야 한다는 생활의 지혜를 나누고 있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그렇다면 의사로서는 이런 고통을 피하려면 응급실에서 일하지 않는 수밖에 없다.

소아청소년과에 있는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아기들은 성인과 달리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설명할 재간이 없다. 아이들은 울고 보채며 잔뜩 예민해진 가족들과 함께 병원에 온다. 낫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참을 수 없으니, 아이들은 치료에도 잘 협조하지 않는다. 아픈 아이가 걱정되는 부모가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하면 괴로움밖에 남지 않는다. 소아청소년과라는 곳이 원래 이런 곳이니 이런 아수라장을 피하는 방법은 소아청소년과 진료 자체에서 벗어나는 방법뿐이다.

병원과 의사의 사정이 아니라, 환자의 사정에 맞추는 의료로

세상이 이전보다 나빠진 부분 중 하나는 ‘처우 개선’을 말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전문성의 범위를 그은 다음, 그 안에서만 머무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의료대란 국면에서 응급실에 파견된 전문의 군의관마저도 어렵고 힘들지만 배워가며 더듬더듬 응급실 진료를 보는 대신, 응급진료에 필요한 ‘진료 역량’이 부족하다며 돌아가 버린 일은 전문가로 키워진 이들이 얼마나 좁은 전문성 안에만 서 있고 싶어 하는지 보여준다.

건강보험과 무관한 진료를 하는 병원 밖의 의사들은 사정이 더 좋고, 전문직들은 흔히 자기들끼리만 비교하는 좁은 세상 안에서 살아간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필요에 가깝고, 반응성이 높은 의료를 업으로 삼는 의사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나날이 높아져 간다. 다르게 말하면 돌봄으로서 의료를 포기하지 않은 의사일수록 상황이 괴로워져 가고 있다.1

정부가 필수의료라고 부르는 의료의 영역들이 무너지고 있는 건 의료라는 업의 본질로서 돌봄을 놓아버리는 의사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상대적으로 환자를 돌보는 의료의 처우가 나쁘다는 사실과 의사들은 다른 생활인들과는 달리 얼마든지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두 이유가 모두 작동한다. 그리고, 이 둘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 선택하기 어렵다.

돌봄은 벅차니 교육만 하게 해달라는 교사도, 내가 가장 잘 볼 줄 아는 질환군의 환자만 치료하겠다는 의사도 그렇게 이야기하게 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의료를 돈이 되는 상품으로 잘게 쪼갠 다음 그사이에 남겨진 환자를 돌보는 일은 우리가 할 업무가 아니라며 거절하는 의료는 명백히 문제다. 수학 선생님이니까 수업 시간을 지켜 자리에 앉아 있는 공부 습관을 가르칠 수 없고, 비뇨의학과 의사니까 당뇨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전문성 함양이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돌봄이 이렇게 사회적 관심사가 된 것은 당장 사람들이 늙어가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보건의료체계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의료를 전문화하고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필요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돌봄을 받는 사람이 온전하고 무탈하기 위해 돌봄을 하는 사람들의 삶이 천 갈래로 찢어져 삐걱거리게 되는 상황은 매우 흔하다. 서비스 각각에 대한 전문성과 자격을 따지는 의료만 받을 수 있는 환자들은 본인이나 보호자의 삶이 분열을 겪게 된다. 잘 구획되어 전문인력이 전담하는 서비스를 하나씩 이어 붙여 필요한 의료와 돌봄을 충족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돌봄이 뿌듯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매우 괴롭기도 하다는 걸 상상하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뭐가 문제인 줄도 모른 채 어물거리고 있는 남편과 아이를 챙겨서 먹이고, 입혀서 사람 모양새를 만들어 사회에 내보내야 하는 여성들의 흔한 괴로움이 대표적인 예다. 어느 지점에서는 타협하겠지만 레토르트 식품은 얼마나 먹을지, 직접 차려 줘야 할 지, 유기농 식품을 어떻게 구할지까지 돌봄의 질을 생각하면 노동에는 한도가 없다. 게다가 어디까지 해야 돌봄을 받는 사람들의 복리와 건강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지도 알기 어렵다. 그러니 돌보는 사람의 고뇌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주치의 제도라고 부르든, 일차의료라고 부르든 이름보다 중요한 게 있다. 돌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일차의료는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분절된 의료 안에서 대개 환자와 보호자에게, 그리고 도저히 책무를 피할 수 없는 일부 의사들이 떠안고 있는 돌봄을 다시 의료의 중심에 두자는 기획이다. 그러려면 의사들이 틀어박혀 있는 전문화, 세분화된 의료의 기존 구획을 해체하고, 의사를 ‘대부분의 건강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전문가’로 되돌려놓는 수밖에 없다. 의업의 본질을 포기하지 않아서 의사들 사이에서 바보 취급을 받는 소수의 의사가 아니라 모든 의사가 건강 돌봄(health care)을 제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일차의료를 요구하는 일은 곧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의료를 요구하는 일이다. 의사를 비롯한 의료 전문가도, 환자도, 보호자도, 정부도 현재 일하고 보상받는 그대로 둔 채 일차의료만 추가할 수는 없다. 그러니 정부가 결단을 내려 가치에 보상하는 혁신적인 수가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아니면 정부가 하고 있는 사업의 긴 명단에 주치의 사업을 추가한다고 해서 없었던 일차의료가 갑자기 생겨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일차의료는 여전히 고민하고 노력해야 하는 문제다. 현실의 의료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돌봄은 언제나 의료의 본질이었다. 의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의료로 일차의료를 요구하자. 그것이 곧 의료개혁이다.

| 미주 |

  1. 돌봄을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같은 말을 쓰지만 다른 내용을 뜻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여기에서는 Daly(2002)를 따라“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사람을 돌보는 행위로서, 환자, 노인, 어린이를 돌보는 행위와 행위를 강제하는 개인, 가족, 사회, 국가 간의 관계”로 돌봄을 쓴다. 그러니까, 한국의 의료는 환자와의 사회적 관계를 잘 형성해 환자의 필요에 반응하고, 환자 곁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전문직업성이 탁월한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 Daly, M. 2002, “Care as a good for social policy, Journal of Social Policy, 31(2), 251-270. ↩︎

월간 <복지동향> 2024년 10월호(제3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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