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25 2025-05-01   8206

[편집인의 글] 정의로운 사회제도를 준비할 때-사회대개혁 시리즈를 시작하며

김형용 | 동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이에 월간 복지동향은 두 번에 걸쳐 <사회대개혁 시리즈 1–망가진 대한민국의 대전환 과제>를 다루고자 한다. 사회는 개인들의 연합체다. 구성원들은 각자의 선(good)을 증진하기 위해 사회 속에서 상호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에서 각자의 이익은 일치될 수도 있지만, 불일치에 따른 갈등도 필연적이다. 따라서 사회계약을 통해 각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정한 기준과 절차를 마련하고, 법과 제도로서 구성원들에게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며, 각자가 평등한 자유 하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이상적 모습이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한국 사회는 사회계약의 파기가 너무나 쉽게 목격된다. 헌법이 정한 권리와 의무를 무시한 대통령이나, 공정한 기준이나 절차 따위는 관심도 없는 검찰이나, 품위나 대의는 일찌감치 상실하고 국민 갈라치기로 표만 얻으려는 정치인이나, 기득권의 이익 앞에서 평등한 자유를 왜곡하는 언론이나, 숙고나 숙의는 무시하고 반지성적 목소리로 자신의 이익을 노리는 가짜 엘리트가 판치는 공론장이다. 그 결과 국내외 환경은 염치없는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고용과 성장은 어렵기만 한데 개인의 복리를 증진할 다른 수단은 보이지 않고,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이 그리고 타자에 대한 연민이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인간이 나약한 존재로서 운명을 극복하고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였지만, 지금은 이 사회가 오히려 인간을 불평등, 강압, 그리고 폭력 속으로 그리고 어쩌면 멸종으로 내몰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사실, 이 질문은 두 가지다. 왜 모두가 한동안 합의했던 약속조차 지키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너무나도 정의롭지 않은 사회가 되었을까? 이 둘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롤스에 따르면 사회제도의 제1덕목은 정의다. 그는 아무리 정교하고 간결한 이론이라도 진리가 아니면 거부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잘 정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정의롭지 못하면 개혁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해관계의 일치와 상충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정의를 필요로 하는데, 정의롭지 않은 사회는 사회계약 자체의 안정성과 공정성을 준수할 이유를 찾기 어렵게 한다. 사회가 상호 이익을 위한 협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서는 사회적 역학 관계에 필요한 규제가 작동되지 않는다. 따라서 정의는 단순히 극대화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성장이나 안정 같은 사회의 다른 가치를 평가하기 전에 사회제도가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필요조건이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역기능적 상황 앞에서 단지 정치권력의 구조개혁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다시 우리는 이 극한의 자본주의 또는 정복주의 사회를 어떻게 전환할 것인지 비전을 논하지 않고, 즉 어떻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것인지 논하지 않고, 새로운 권력이나 지도자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처럼 바라본다.

본 호에서는 사회대개혁 시리즈 기획을 통해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향한 새로운 사회 대개혁의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 정의로운 복지국가는 과거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보다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정책 비전이다. 이에 정치 불신과 극단적 양극화가 심화되며 대의민주주의와 정당시스템이 기능을 상실하고 있는 상황에서 복지국가의 정치적 위기와 해법을, 저성장과 분배 악화에 직면한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공정한 복지국가의 경제 정책을, 그리고 인구-디지털-기후라는 삼중위기 시대에 복지국가의 재구조화를 다루고, 이와 함께 윤석열 탄핵으로 결집된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종합한 사회대개혁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 기획 글을 기고해 주신 정해구 교수는 한국 정치가 거대 양당의 적대적 관계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법화와 정치화가 심화되면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이러한 위기의 원인을 정치인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문제로 보고, 정당 체제의 재구축과 헌정 체제의 개혁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양당제에서 온건 다당제로의 전환을 위해 선거 제도를 개혁하고, 대통령의 과도한 권력을 제한하며, 지방 분권과 기본권 강화를 포함하는 헌정 체제의 재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기획 글은 복지국가의 경제적 위기와 해법에 대해 정세은 교수가 기고해 주셨다. 한국 경제는 저성장과 분배 악화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으며, 이는 ‘선성장-후분배’ 전략, 즉 낙수 효과에 대한 맹신과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불공정한 시장을 개혁하고, 불로소득을 해소하며, 동반 성장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이 필요한데, 이는 주택 시장 안정화, 재벌 개혁, 중소기업과의 상생, 노동 시장 개혁, 복지 확대, 그리고 공정한 금융 및 재정 정책을 포함한다.

세 번째로 최영준 교수의 기고 글은 한국 복지국가의 위기와 해법에 대해 매우 명료하고 통찰력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삼중위기라는 새로운 도전 하에 기존의 사회보호와 사회투자 이외 사회혁신이 필요하며, 이제 ‘연대적 복지국가’가 그 대안이라는 것이다. 연대적 복지국가는 보편주의에 기반하여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고,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며, 지역과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하는 새로운 복지 모델이다.

마지막으로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전은경 팀장의 기고 글은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구성한 ‘사회대개혁특별위원회’에서 논의한 사회정책에 대한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의 요구 사항들을 정리하였다. 여기서 향후 사회변화 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다시 비어 있는 공간과 시간이다. 비어 있는 공간과 시간이 주는 함의는 매우 크다. 저마다 되돌아보는 성찰을 통해 숙고한 판단을 하고, 이 판단이 새로운 계약에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과 권력 추종자들은 어쩔 수 없이 비어 있는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험악한 싸움부터 하겠지만, 시민들은 사회제도가 정의롭도록 설계하는 데 이 시간을 소중히 사용하길 바라본다.

안내 말씀 전합니다.
월간 복지동향 표지가 오랜만에 바뀌었습니다. 표지의 색과 문구를 강렬하되 단순화하여 복지동향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한 해별로 상징하는 메인 컬러를 지정하고, 매월 조금씩 다른 톤의 컬러를 사용할 예정입니다. 복지동향을 시기별로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독자 분들의 마음에 들었으면 합니다.

월간<복지동향> 2025년 05월호(제3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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