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25 2025-06-01   9464

[편집인의 글] 존엄한 삶을 위한 건강보장을 다시 생각할 때 : 정의롭고 평등한 보건의료를 위한 제도 개혁을 중심으로

김진환 | 서울대 보건환경연구소 연구교수

“한국에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라는 말은 겉보기에 풍족해 보이는 한국 건강보장의 현주소를 함축한다. 우리는 빠르게 건강보험을 도입했고, 높은 가입률과 낮은 본인부담률을 자랑해 왔다. 그러나 여전히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미등록 이주민, 건강보험 체납자, 비정규직과 무자격 노동자는 제도 바깥에 머물며, 생계와 치료 사이에서 매번 선택을 강요받는다. 동시에 돈이 있어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이들도 늘고 있다. 병원이 사라진 농어촌 고령자들, 분만 병원을 찾아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하는 임산부들, 고가 기술에서 소외된 환자들이 바로 이런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필수의료 붕괴’나 ‘지방의료 소멸’ 같은 말로 표현되는 위기 신호는 이미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지만, 정책결정 구조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의료계의 권한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기술 발전을 이유로 재정 지출은 늘어나지만, 이 과정에서 환자의 권리나 제도의 공공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의료 민영화에 대한 우려가 다시 떠오르는 지금,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제도는 ‘모두’를 위한 것인가? 의료를 상품이 아닌 권리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기준선을 새로 그어야 하는가?

지난 호에 이어 월간 복지동향은 정의로운 사회제도를 준비하는 <사회대개혁 시리즈>를 이어간다. 앞서 제기한 물음들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건강보장 제도에 주목했다. 보편적 건강보장을 달성했다고 평가받는 한국의 건강보장 제도가 과연과연를 다시 설정할 실마리를 모색해 보려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다섯 편의 기고를 통해, 제도 밖의 배제, 제도 내의 권력, 지역의 불균형, 기술과 재정의 관계, 그리고 민영화의 위협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건강보장 체계의 새로운 상상력을 탐색한다.

첫 번째 글에서 김명희 센터장은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 특히 미등록 이주민과 생계형 건강보험 체납자들의 현실을 들여다본다. 이들은 단순히 제도의 행정 경계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권리’라는 원칙 자체가 제도 안에 구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을 다시 포용하는 일은 단지 복지의 확장이 아니라, 제도의 정의로움을 회복하는 일이다.

두 번째 글에서 허순임 교수는 건강보험 거버넌스의 구조를 분석한다. 가입자 대표는 대표성과 조직력이 약하지만, 의료공급자는 응집력 있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정책결정 과정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전문성이 요구되는 위원회나 정책 집행 단계에서 의료계의 자율성이 과도하게 작동하면서 제도의 책무성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글은 ‘참여의 균형’과 ‘책임의 분배’라는 원칙이 건강보험 개혁의 핵심임을 강조한다.

세 번째 글에서 정백근 교수는 수도권 중심의 자본축적 구조와 중앙집권적 재정 시스템이 지역 간 의료불평등을 고착화한다고 진단한다. 특히 병원이 사라지고 있는 농어촌 고령화 지역의 현실은, 지방정부가 단독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다. 글에서는 의료재정의 분권과 주민 참여 기반의 자율적 운영을 통해, 취약지에서 의료의 공공성과 민주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네 번째 글에서 배은영 교수는 초고가 신약의 도입이 건강보험 재정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효과가 불분명한 고가 치료제가 빠르게 보험으로 편입되는 과정은 사회적 비용을 늘리고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이 글은 기술의 가치를 평가하고, 보장조건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사후 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김재헌 사무국장은 건강보험이 민영화의 흐름 속에서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지 묻는다. 낮은 보장률, 방치된 비급여, 민영보험의 팽창은 공공의료의 기반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를 되돌리기 위한 해법은 건강보험의 무상성과 보편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특히 노인의료의 무상화를 시작점으로 삼아 민간보험에 의존하지 않는 의료체계를 구성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다섯 편의 글은 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담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누구도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라는 건강보장의 대원칙을 다시 환기시킨다. 기후위기, 지역소멸, 돌봄 공백이라는 중층적 위기를 겪는 지금, 우리는 다시금 “보건의료는 상품인가, 권리인가”라는 물음을 마주하고 있다.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기술 낙관주의나 재정 효율성의 프레임을 넘어,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라는 상상력을 회복해야 한다. 정의로운 보건의료는 외국의 성공 사례를 모방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누구도 권리 밖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새로운 기본선을 함께 설정해 나가는 실천의 과정이다. 이번 기획이 이 여정의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월간 <복지동향> 2025년 6월호(제3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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