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 | 영남대학교 휴먼서비스학과 교수
권력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착각
“복지부 장관을 하시면 좋겠네요.”, “국회로 진출하는 게 어떠신가요?” 복지정책에 대한 강의를 다니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공감을 얻을 때 흔히 듣게 되는 말들이다. 그렇게 문제의식이 확고하고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제시할 수 있다면, 직접 바꿀 수 있도록 정치권이나 정부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호의 어린 조언이다. 물론 그만큼 공감하여 변화를 기대하는 말이겠지만, 권력을 직접 가져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통념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뜻있는 학자들과 사회활동가들이 그러한 생각으로 선거 때마다 캠프에 참여한다. 그 덕에 기관장이나 정부 요직을 맡기도 하고, 배지를 달고 국회에 입성하기도 했다. 그들의 시도가 아예 성과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그들 덕분에 세상의 근본적인 무언가가 바뀌었는가 묻는다면 후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기존의 시스템을 조금 더 ‘잘’ 굴러가게 하거나 ‘바람직하게’ 다듬은 일이야 있었겠지만, 그것이 사회의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내거나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고 볼 수 있는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단지 그들 개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의지의 문제로 탓할 수는 없다. 정치라는 공간은 고매한 학자나 올곧은 활동가의 진정성만으로 살아남기에는 분명 만만치 않은 곳이다. 당내의 치열한 계파 구도 속에서 결국 자기가 속한 집단의 정치적 생존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고, 변화를 향한 지향보다는 정치적 유불리를 먼저 따져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 부채와 타협의 업보만 쌓이고, 애초에 품었던 본래의 가치는 아득히 멀어지기 마련이다.
정부의 요직에 앉았다고 해서 정책의 변화를 마음대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행정부의 일원이 되는 순간, 기존의 제도와 정책 틀 속의 내부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무엇을 하고자 한들, 엄청난 정치적 동력이 실리는 예외적인 정치적 사안이 아니라면 일차적으로는 관료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실무를 수행하는 관료들의 방식과 관행을 일일이 뒤집을 수도 없고, 결국 어느 정도는 그들을 신뢰하고 맡길 수밖에 없다. 흔히 밖에서는 ‘관료들에게 포섭되었다’고 비판하지만, 그보다는 행정부의 일원이 되어버린 현실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밖에서는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었던 일도, 안에서는 모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니 행동 반경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변화를 만들기 위한, 치열한 아이디어의 전장
이 한계를 일찍이 깨닫고 전혀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어버린 집단이 있다. 복지국가가 태동하며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그 거대한 흐름을 뒤집고야 말았던 신자유주의자들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 장교였던 안토니 피셔(Antony Fisher)는 하이에크(Hayek)의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 1944)’을 읽고 큰 감화를 받는다. 복지국가와 같은 ‘큰 정부’가 결국 폭정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경고에 크게 공감한 피셔는 무작정 런던정경대(LSE)로 하이에크를 찾아갔다. 자신이 직접 정계로 진출해 이 사회를 바로잡겠다고 다짐하는 피셔에게 하이에크는 이렇게 조언한다. “정치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사회는 오직 ‘아이디어’에 의해서만 변화하며, 정치인은 그 아이디어를 따라갈 뿐이다.”
피셔는 하이에크의 이 말을 철저히 따랐다. 그는 정계 진출 대신 아이디어의 전진기지가 될 경제문제연구소(IEA)를 설립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베버리지 보고서를 낳은 복지국가의 산실 영국은 어느새 신자유주의 정치의 본거지로 탈바꿈해 버렸고, IEA는 영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싱크탱크로 역사에 남았다. 이들은 ‘자유시장’을 말하면 나치 취급을 받던 척박한 시절부터, 수십 년 동안 꾸준하고 집요하게 언론인들을 설득하고, 쉽고 간결한 소책자를 대학에 퍼트렸다. 정치를 통해 단기적인 권력과 영향력을 추구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고 오직 ‘새로운 상식’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이러한 끈질긴 전략이, 과거 복지국가 건립의 주축이었던 ‘페이비언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를 철저히 반면교사 삼은 결과라는 점이다. 하이에크는 ‘지식인과 사회주의(The intellectuals and Socialism, 1949)’에서 “사회주의자의 성공으로부터 진정한 자유주의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핵심 교훈은 이상주의자가 되었던 그들의 용기이다. 이것이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게 해주었고, 그래서 공공 여론에 영향을 만들었고, 그래서 요원해 보이던 것을 매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적었다.
IEA 설립의 또 다른 주축이었던 존 블룬델(John Blundell) 전 소장의 평가는 더 뼈아프다. 그는 페이비언 소사이어티가 노동당 창당에 결합하고, 1945년 노동당 집권 이후 수많은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정부와 정당 안으로 들어가 버림으로써, 정작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의 전장’을 텅 비워버렸다고 지적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권력과 결합하여 비워버린 바로 그 아이디어의 전장에서 무혈입성하듯 손쉬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위기의 시대, 낡은 패러다임에 갇힌 국가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무지막지했던 계엄을 시민의 힘으로 막아낸 ‘빛의 혁명’의 거대한 기대 속에서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벌써 1년이 넘었다. 하지만 빛의 광장에서 분출되었던 개혁의 아젠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국민주권정부’를 표방하지만, 정작 국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국민의 팍팍한 삶이 아니라 대기업들의 성장과 투자, 그리고 인공지능(AI)과 같은 산업적 이해관계뿐이다. 실용주의를 내세우고는 있으나 누구를 위한 실용인지 불분명하다.
이미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성장이 다차원적인 불평등의 전례 없는 확대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히 드러난 사실이다. 역대 최고 수준의 양극화 속에서, 미국의 이란 침공 등 대외적인 불안정성까지 겹쳐 국민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갈수록 심화되는 돌봄의 위기는 또 어떠한가. 2024년의 한 여론조사에서 ‘질병 등으로 가족이나 지인에게 폐를 끼칠까 두렵다’고 답한 사람이 90%에 가까웠고, 조력사에 대한 긍정 여론이 80%를 훌쩍 넘겼다. 어느새 대한민국은 대다수의 국민이 피할 수 없는 돌봄의 현실에 직면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는, 그 어떤 사회보다도 비극적인 나라가 되어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후위기는 이미 우리 국민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올여름 현실화된 폭염 중대경보는 건강한 성인조차 낮 시간 야외활동 시 생명이 위험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러나 폭염으로 인한 소득 중단을 보상해 줄 제도는 전무하여,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들은 생계와 생명 사이를 줄타기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냉방은커녕 고온에 무방비로 노출된 주거 취약계층을 위한 근본적 대책 역시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마주한 불평등, 돌봄, 기후의 존재론적 위기는 지난 역사 속에서 성장에만 매몰되어 온 뼈아픈 대가다. 그러나 놀랍게도 현재의 정부는 법적인 의무지출마저 10%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긴축을 강행하면서까지 AI 등 핵심 산업 투자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핵심적인 복지 지출은 줄이지 않는다고 강변하지만, 의무지출의 과반이 보건·복지·고용 예산임을 고려하면 국민 생활과 직결된 많은 정책들이 타격을 입는 것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명실공히 ‘개발 정부’의 귀환이다.
정부와 정치에 대한 기대보다, 새로운 아이디어의 전장을 열어야 할 때
성장의 대가로 존재론적 위기를 맞고 있는 시대에, 새로운 기대를 안고 출범한 것이 다시 성장을 외치는 개발 정부라니, 참으로 황당하고 암담한 현실이다. 정치권은 여전히 이러한 위기의 본질에 도무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크고 작은 권력자와의 친소관계나 따지며 자신들의 주도권이나 기득권을 위한 싸움에만 몰입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서 정부와 정치권만 탓하고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토록 고질적인 개발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끈질기게 아이디어를 확산시켜 왔는가? 우리는 민주화를 거쳤고, 보편적 복지국가의 담론을 지나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전반적인 삶이 변화하고 평안을 찾는 효능감을 사회적으로 경험하는 정도에 이르렀는가? 우리의 민주주의가 다시 위협받고 개발 정부로 회귀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사고가 새롭게 정립될 정도의 경험까지는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권력을 심판하는 데는 능했지만, 정작 그 심판 후에 어떻게 정책과 제도를 재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치밀하고 실질적인 아이디어를 구축하고 실현하는 일에는 실패했던 것이 아닐까?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이상 진보를 자처하면서 친소관계 싸움판에 진지하게 몰입하는 우둔함에서는 최소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음의 정치를 바라보며 권력에 참여하여 무언가를 바꿔보겠다는 순진한 꿈에서도 깨어나야 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끈질기게 자문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에게는 기후위기와 돌봄의 공백, 확대일로의 불평등을 해결할 새 시대의 패러다임이 준비되어 있는가? 그 새로운 아이디어를 대중의 상식으로 만들고, 구체적인 현실의 제도와 정책으로 번역해 낼 지적 토대와 전략이 있는가?
권력은 속이 빈 트로피에 불과하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그 안을 채우지 못한다면 정치는 언제나 익숙하고 낡은 방식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절박할수록 긴 호흡으로 지속해서 고민하고, 연구하고, 논의하면서 끈질기게 세상을 설득할 새로운 아이디어의 기지를 구축해야 할 때다. 위기의 시대를 돌파할 진정한 변화는, 정치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만들어내는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월간 <복지동향> 2026년 9월호(제3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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