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로 주춤했던 여가시간, 여가활동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정부의 주5일 근무제 도입 관련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한 재벌회장의 입에서 나온 “국민소득 2만불 시대”라는 희망찬(?) 전망은 경제발전에 따른 여가활동 증대의 가능성을 여는 듯하다. 그리고 굳이 법과 경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주위에 인라인스케이트·마라톤 등 생활스포츠를 즐기는 인구가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가장 직접적으로 여가시간 및 여가활동의 증대를 체감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여가시간과 여가활동에 대한 전망이 반드시 장밋빛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특히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주5일 근무제에 대한 논란과 함께 빈부격차의 확대, 소비문화의 확산과 공공성 축소 등의 문제제기는 “여가”문제를 노동과 놀이라는 근대적인 이분법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새로운 가치 생산과 패러다임의 전환 문제로 접근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여가와 관련한 두 가지 쟁점
현재 “여가”와 관련한 논의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쟁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자본의 세계화 혹은 경영합리화 등의 방안으로 추진되고 있는 현재의 주5일 근무제와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실제로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한 노동통제기제이며, 따라서 여가시간이나 여가활동의 증대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쟁점은, 여가”시간”의 증가가 여가”활동”의 증대로 이어지기에는 현재 한국 사회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공공문화기반시설(문화의 집,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등), 문화시설(극장, 공연장 등) 등 한국의 문화인프라는 그 절대 숫자의 부족과 함께 지역배분의 문제, 운영의 공공성 부족 등의 문제가 크며, 따라서 현 상황에서 여가”시간”의 단순 증가는 소비문화의 증가만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글에서는 이 중 두 번째 쟁점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먼저 여가권의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문화권의 개념을 살펴보고, 국민 문화향수 실태조사를 통해 이후 여가권, 문화권 확대를 위한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여가권과 문화권
“여가”라는 개념은, 앞서 언급한대로 노동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노동중심의 현재의 사회현실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설정은 여가가 “노동”의 하위개념이라는 인식이 그 배경에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여가권”이라는 설정에는 “권리”와 “복지”의 개념이 함께 포함되어 있고, 이를 쟁취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 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권리로서의 여가권은 삶의 질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며, 복지로서의 여가권은 여기에 공공성과 평등의 문제를 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여가권의 개념에도 여전히 노동/여가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녹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여가권의 보다 적극적이고 확장된 개념으로서 “문화권” 개념을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즉 공동체의 정체성과 인간의 삶의 양식을 구성하는 “문화”라는 개념을 통해, 잉여시간의 활용이 아닌 문화적 권리의 확보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문화권은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문화적으로 구성하고 참여할 권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사회의 새로운 가치 생산과 패러다임의 전환, 즉 사회적 삶을 정치·경제 중심에서 문화적 가치를 중심으로 전환하자는 적극적인 제안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화권의 개념설정은 노동/여가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고, 따라서 노동조건의 후퇴를 근거로 정부의 주5일 근무제 입법안에 반대하는 당위와 여가시간의 확대를 위한 주5일 근무제의 조속 시행이라는 당위가 충돌하지 않고 조화될 수 있게 해준다.
국민 문화향수실태의 현주소
“2002 국민문화지수 개발 연구 종합보고서”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의 월 평균 문화활동 시간은 58.74시간(월 평균 여가시간은 118.22시간), 월 평균 문화활동비 지출은 29,442원(월 평균 여가비 지출은 82,675원)으로 조사되었다. 이를 연령별, 소득별로 비교를 해보면, 연령이 높을수록 여가시간은 많았지만 문화활동 시간은 적었으며 소득이 높을수록 여가시간은 적었지만 문화활동 시간은 많아지는 특징을 보였다. 여가비 지출과 문화활동비 지출의 경우에는, 소득과 지출이 비례하여 증가하였다([표1], [표2] 참조).
[표1] 가구 월 평균 소득별 여가시간 / 여가비, 문화활동시간 / 문화활동비 비교
(단위 : 시간, 원)
여가시간 = 평일의 여가시간 + 토요일의 여가시간 + 일요일, 휴일의 여가시간
문화활동 시간 = 문화유산 관람시간 + 문학, 예술활동 시간 + 대중문화 향유시간 + 사회문화적 활동 시간
[표2] 연령별 여가시간 / 여가비, 문화활동시간 / 문화활동비 비교
(단위 : 시간, 원)
구체적인 영역별 문화향수실태는 아래의 [표3], [표4]와 같다. 전체적으로 개인의 소비(지출)에 근거한 대중문화영역에서의 영화 관람, 비디오 대여, 대중음악 음반구입 등만이 40% 정도의 이용률을 보였고, 나머지 영역의 이용률은 극히 낮은 편이다. 특히 박물관, 도서관 등 공공문화기반시설의 이용률이 낮은 것은 절대 숫자의 부족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단순히 “보여주는 것” 이외에 국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운영 프로그램의 부재에 더 큰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3] 문화유산 및 문학·예술영역 문화 향수 실태
(단위 : 1년, %, 회)
[표4] 대중문화영역 문화 향수 실태
(단위 : %, 회)
(단위 : %, 시간)
문화 향수 실태를 개인 속성별로 분석해보면, 문화 활동에의 참여가 개인 속성별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소득, 학력, 문화교육 참여 경험 등은 문화 활동 참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2 국민문화지수 개발 연구 종합보고서” 설문조사를 통해 나타난 개인 속성별 차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연령층의 높아질수록 대부분의 문화 활동에서의 참여도가 많이 낮아졌다.
둘째, 거의 모든 항목에서 상대적으로 고소득층의 문화 활동 참여가 활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100만원 이하 저소득층의 경우, 다른 소득층에 비해 많은 여가시간을 가지고 있으나 문화 활동의 참여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셋째, 고학력층의 문화 활동 참여가 활발했다. 상대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대중문화영역을 기준으로 한다면, 중졸 이하의 학력층과 고졸 이상의 학력층과의 차이가 컸다.
넷째, 문화교육 참여 경험이 문화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적, 사적 영역을 불문하고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경험한 사람들의 높은 문화 활동 참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향수 실태를 통해 본 여가권, 문화권 확대방안
실태조사에서 드러났듯이, “문화의 세기”, “문화입국”을 외치고 있지만 국민들의 문화 향수 실태는 지극히 열악한 것이 현실이다. 주5일 근무제의 도입과 여가시간의 증대라는 조건이 국민들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많은 정책적 지원을 통한 준비가 시급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공성 확대와 복지 향상이라는 기본 방향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가권, 문화권을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이자 복지 향상의 측면에서 인식한다면, 기본적으로 “문화 공공성 확대와 문화복지 향상”이라는 정책 방향의 수립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돈 없이도 문화 활동 할 수 있는’, ‘늙어서도 문화 활동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야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구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방향 수립은 정치, 경제, 문화영역을 넘나드는 고민 – “문화권”의 개념 설정 – 을 기반으로 하여, 구체적인 대안정책까지를 포함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지금은 추상적인 논의보다는 실천적인 대안 제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앞서 살펴본 문화 향수 실태조사를 통해 여가권, 문화권 확대를 위한 주요 정책 과제를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공 문화인프라의 확대가 필요하다. 공원, 광장, 문화기반시설(박물관, 도서관, 문화의 집 등) 등의 절대 숫자의 확대는 국민들의 문화 활동 참여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어느 집이건 “OO공원 옆”이라 설명할 수 있다는 영국의 예와 직접 비교는 무리겠지만, 여가시간이 나더라도 가까운 거리에 문화 활동을 향유할 공간이 있어야만 문화 활동도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하드웨어의 확충과 더불어 소프트웨어, 즉 운영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도 중요하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시설은 있느니만 못할 것이다. 문화 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에 지원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둘째, 정규 교육과정 및 공공 문화기반시설 등에서의 문화교육의 확대가 필요하다. 특히 대다수 국민들의 문화 활동 증진을 위해서는 정규 교육과정에서의 문화교육 실시가 매우 중요하다. 창의성과 자발성, 문화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문화교육의 실시는,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을 극복할 수 있는 공교육 개혁방안임과 동시에 졸업한 이후 사회에서도 문화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셋째, 소외계층 문화 활동 지원 또한 시급하게 확대되어야 한다. 당장에 경제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여성·청소년·저소득층·노령층 등 사회적 소외계층에 대한 공적 영역에서의 문화 활동 지원이 필요하다. 이는 분배주의에 근거한 시혜적 차원의 정책이라기보다는,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임을 인식하고 현실적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적 지원이다.
<참고문헌>
2002 국민문화지수 개발 연구 종합보고서, 문화관광부·한국문화정책개발원, 2002. 4.
주5일제 시행에 따른 시민운동단체와 공공문화기관의 대응실태 연구,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문화정책연구소, 2002. 12.
월간 <복지동향> 2003년 08월호(제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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