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서울의대 의료관리학교실
내가 들린 미장원은 아파트 상가 지하에 있는 자그마한 가게로 동네 아줌마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다. 그날도 주인 아줌마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그리고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 이렇게 3명이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들의 대화는 주인 아줌마가 내 머리를 자르는 중에도 끊이질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대화 내용에 내 귀가 쏠렸다.
대화 내용을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면서, 이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게 되었다. 40대 중후반의 중년 여성은 보험설계사였는데, 미장원 주인 아줌마와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듯 했다. 20대 후반의 젊은 여성은 미장원 주인 아줌마의 딸이었는데, 현재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보험설계사인 중년 여성은 주인 아줌마 딸에게 민간의료보험 가입을 권유하고 있었고, 주인 아줌마는 이를 거들고 있었다. 평일에는 딸이 직장에서 늦게 퇴근하기 때문에, 추석 연휴에 보험설계사를 만나도록 주인 아줌마가 약속을 잡아준 듯 보였다.
이들의 대화 주제를 알게 되면서, 내 귀는 더욱 쫑긋 세워졌다. 보험설계사인 중년 여성은 주인 아줌마의 딸에게 왜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지, 이 상품이 왜 좋은지를 조리있게 설명해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고객 중에서 암에 걸린 사람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 고객이 지금은 자신에게 너무나 고마워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암과 같은 중병에 걸리면, 치료비가 얼마나 나오는지, 그리고 그런 경우에 보험금이 얼마나 나오는지에 대해서도 숫자를 열거하면서 설명했다. 한참을 듣고 있자니, 나조차도 ‘야, 저런 보험이면, 하나 들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보험설계사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뒤이은 보험설계사의 말 “지금 아가씨처럼 젊어서 보험에 들면, 보험료가 10만원 정도인데, 저 아저씨처럼 나이가 들면, 보험료가 2-30만원이 넘는다. 나이 들기 전에 빨리 가입하는게 남는 장사다” 졸지에 나는 젊은 아가씨가 왜 하루라도 빨리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비교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제 40세를 갓 넘겼을 뿐인데, ‘나이든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젊은 아가씨는 보험을 가입하기로 마음을 굳힌 듯 했다. 주인 아줌마도 “내가 뭐랬냐? 진즉에 건강보험 하나 들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더니만…”이라고 딸을 핀잔했다. 보험설계사는 첫 달치 보험료는 자기가 서비스로 내 주겠다고 했지만, 딸은 “이렇게 좋은 보험 소개해 주셨는데,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오히려 고맙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답고 훈훈한 장면은 이내 깨졌다. 주인 아줌마가 가만있질 않았다. “서비스로 첫 달치 보험료 내 주겠다는데, 너 왜 그러냐? “고맙습니다”하고 받으면 되지”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의 마음은 착찹했다. 국민건강보험의 취약한 보장성 때문에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하는 걸 두고,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민간의료보험의 문제점은 이미 국민들도 웬만큼 알고 있다. 보험료가 만만치 않은데다, 정작 보험금을 타려고 하면, 이런 저런 빌미를 잡는다는 사실도 웬만한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노인, 장애인, 이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보험 가입이 잘 안 된다는 점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민간의료보험에 대한 국민의 의존도가 높아지는 이유는 바로 ‘건강보험만 믿고 있다가, 덜컥 중병에라도 걸리면, 집안이 거덜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민간의료보험은 병원비에 대한 일상적 불안감을 떨칠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대안인 셈이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국민건강보험료를 내는 것보다 더 많은 액수의 민간의료보험료를 내고 있다(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2010년 현재 월가구 소득에서 국민건강보험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3.4%인데 반해, 민간의료보험 가입 가구의 경우, 월가구 소득에서 민간의료보험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9.1%이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부러웠다. 굳이 보험설계사가 끼지 않더라도, 미장원 같은 동네 사랑방에서는 이미 ‘민간의료보험’이 일상적인 수다꺼리로 자리잡고 있다. 주위 사람 중의 누군가가 덜커덕 암에라도 걸리면 더욱 그렇다. 주위에 암 환자를 둔 사람들은 2가지의 행동을 한다. 첫째, 서둘러 건강검진을 예약한다. 둘째, 아직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보험에 가입한다. 이미 가입한 사람이라면, 약관을 다시 뒤져보면서, 보장항목과 보험금을 따져본다. 그러나 국민건강보험은 동네 사랑방에서 일상적인 수다꺼리의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다. 가끔 거론이 되는 경우에도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다. “보험료가 너무 비싸다”, “병원에 가 보면, 왜 그렇게 보험이 안 되는 게 많냐?”…
그러나 병원비 문제의 해법은 민간의료보험이 아니라 국민건강보험에 있다. 민간의료보험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은 국민의 병원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만, 국민건강보험과 같은 공적 의료보장제도에 의존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은 국민의 병원비 문제를 대부분 해결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들은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들에게 “무상의료를 실현하겠습니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서명을 받는다고 해서, 국민들이 무상의료의 지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전적으로 오판이다. 세상이 발칵 뒤집어져야 가능한 근본적 과제를 열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것은 일반 국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불 뒤집어쓰고 만세 부르는 꼴이다. 건전한 의식을 가진 시민이 상식적으로 수긍 가능한 병원비 문제의 해법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 아무리 장밋빛 말잔치를 벌여도, 모두 무용지물이다.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은 병원비 문제의 해법이 민간의료보험이 아니라 국민건강보험에 있으며, 우리가 발상을 전환하면 이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시민들의 수다꺼리로 만들려는 운동이다. 동네 미장원에서, 구멍가게에서, 어린이집 학부모 모임에서, 직장 점심시간에 이런 사실이 왁자지껄 이야기되도록 만들려는 운동이다. “너, 그런 이야기 들어봤어? 건강보험료를 조금 더 내서, 보장성을 강화하는 게 훨씬 더 이익이라고 하던데?”, “민간의료보험료 부담이 줄어드니까, 보험료 부담도 줄일 수 있다던데?” 이런 말들이 시민의 삶에서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도록 하는 운동이 바로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이다. 동네 미장원에 모인 아줌마들에게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셨습니까? 이제 국민건강보험으로 갈아타시죠?”라고 한 마디 건네는 운동이 바로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이다. 미장원 주인 아줌마가 내 머리를 다듬는 동안, 전국 곳곳에서 왁자지껄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가 이야기되길 상상한다.
주인 아줌마에게 이발료 7,000원을 내고 돌아서는데, 보험설계사 아줌마가 내 뒤통수를 향해 한 마디 던진다. “아저씨, 건강보험이나 종신보험 들었나요? 안 들었으면, 저한테 상담 한번 받고 가세요”, ‘아~ 저런 열성을 배워야 할텐데…’ 미장원을 나서는 내 머리는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내 심사는 더 복잡해져만 갔다.
월간 <복지동향> 2010년 12월호(제1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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