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1 2011-06-20   2490

[편집인의 글] 보편적 복지, 선언하는 자와 실현하는 자

이진석 | 서울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

 

보편적 복지, 선언하는 자와 실현하는 자

 

한 때는 무엇인가를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민주주의’를 입에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철창신세를 져야 했고, 불순한 사상을 자신의 머리 속에 담았다는 이유만으로 명운을 달리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형식적 민주주의가 성취된 지금은 무엇인가를 선언하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한 행위가 아니다.

 

한 때는 ‘복지’를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진보적이었다. 오로지 ‘성장’만이 지고지순의 가치인 양, 온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에,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의 복지를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불순하고 위험한 행위였다. 그러나 무상급식, 무상의료, 그리고 반값 등록금까지 터져 나오고 있는 지금은 복지가 더 이상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회적 진화에 게으른 존재는 필연적으로 도태된다. 새로운 사회를 준비하지 않은 존재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자유주의 세력은 오랜 투쟁 끝에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했지만, 사회경제 민주화라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준비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가 2000년대 우리가 겪었던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고통이었다. 거의 절멸 위기까지 이르렀던 뼈아픈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한국의 자유주의 세력은 기사회생의 계기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진보주의 세력의 현재는 어떤가? 변화된 시대적 상황을 이끄는 것은 고사하고, 적응하기에도 버거워하는 듯하다. 진보주의 세력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복지’가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데, 오히려 진보주의 세력의 존재감은 점차 흐려지고 있다. 자유주의 세력이 복지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하자, 세상의 서포트라이트는 그들에게 향했다. 진보주의 세력이 가진 마이크 수가 적고, 앰프 볼륨이 낮아서 이런 상황이 야기된 것일까? 오히려 2000년대 자유주의 세력이 그랬던 것처럼, 2010년대 들어서 진보주의 세력의 실력과 밑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그런 것이 아닐까?

 

이제는 무엇인가를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국민에게 하등의 감동과 울림을 전할 수 없다. 국민의 삶을 안정되고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립 서비스는 이미 차고 넘친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이제는 겪을 만큼 겪었고, 닳을 대로 닳았다. 말만 하는 것과 실제로 실현하려는 것쯤은 쉽게 분간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진보주의 세력의 다수는 선언 정치에 머물러 있다. 누가 더 센 주장을 하느냐를 놓고 벌이는 내부 경쟁에 매몰되어 있다. 국민과의 공감은 뒷전이고, 내부 주도권이 앞전이다. 한 때는 진보주의 세력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각종 복지 의제가 자유주의 세력의 의제로 넘어간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들의 복지정책은 진짜가 아니다” 혹은 “진정성이 없다”며 딱지를 붙여도, 누구의 주장이 진짜이고, 진정성 있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결국 국민의 몫이다. 과연 국민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삶의 안정과 풍요로움을 ‘진짜로’ 가져다 줄 세력으로 국민은 진보주의 세력을 꼽을까? 아니면, 자유주의 세력을 꼽을까?

 

보건의료 분야의 대표적 운동과제인 공공병원 30% 확충 사례를 보자. 1990년대 이후 십수년 동안 공공병원 확충은 진보주의 세력의 한결같은 요구였다. 그러나 이런 한결같은 요구에도 불구하고 공공병원 확충은 이뤄지지 않았다. 진보주의 세력의 영향을 받아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공병원 30% 확충을 공약으로 걸었다. 임기 중반에는 공공보건의료 확충 종합대책 예산으로 4조3천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도 책정했다.

 

정부 의사결정 라인 곳곳에 공공병원 확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여럿 포진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병원이 확충되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가지지 못한다면, 백 날 공공병원 30% 확충을 선언해도, 공공병원은 확충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껏 공공병원 30% 확충을 주장하는 보건의료 분야의 수많은 진보주의자들 중에서 이런 궁금증을 진지하게 표하는 이들을 별로 보지 못 했다.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은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스스로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

 

진보주의 세력의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복지 분야에서조차 자기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진보주의 세력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질 것이다. 복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진보주의 세력을 지지하기에는 국민의 삶이 너무나 고되다. 그리고 복지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은 향후 자유주의 세력이 연이어 내 놓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프로그램을 급격하게 수렴할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며 주기도문을 외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뤄지지 않는 것처럼, 복지를 선언하는 것으로는 보편적 복지국가가 이 땅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스스로 되물어 보자. 나는 선언하는 자인가? 실현하는 자인가?

월간 <복지동향> 2011년 6월호(제1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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