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간 페미니즘] 마리안느 루아르 : 여성의 자연스러운 얼굴

카네이션과 컴퍼스
한 여성의 초상화를 보자. 그림 속의 인물은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관객과 눈을 맞춘다. 그의 왼손에는 흰 카네이션이 들려 있고 오른손에는 컴퍼스가 들려 있다. 여성 뒤로는 지구본이 보인다. 책장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의 눈빛은 온화하면서도 호기심이 보인다. 그림의 주인공이 과학과 수학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인물의 이름이 무척 길다. ‘가브리엘-에밀리 르 토넬리에 드 브르퇴일, 마르키즈 뒤 샤틀레의 초상(1749)’이다. 18세기 프랑스의 화가 마리안느 루아르Marie-Anne Loir, 1705~1783가 그린 이 초상화는 프랑스 보르도 미술관에 소장 중이며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당시 유명한 살롱의 주인이면서 과학자, 수학자, 번역가였던 에밀리 뒤 샤틀레 부인Émilie du Châtelet, 1706~1749이다. 그는 오늘날 최초의 여성 근대 과학자로 알려졌다. 스페인어, 영어, 이태리어, 라틴어, 그리스어, 독일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그는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번역에 덧붙여 긴 해석을 덧붙인 주석을 달아 당대에 뉴턴의 학문을 정리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43년의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그가 남긴 역사적 흔적은 굉장하다. 많은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서 활동이 제한되었지만 샤틀레 부인은 상류층에서 태어나 남자 형제와 동등하게 교육받았기에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에밀리에게 과학, 외국어, 수학 등 다양한 공부만이 아니라 신체적 훈련도 시켰다. 승마와 펜싱 실력까지 갖췄던 에밀리는 피아노와 성악 등 정말 못 하는 게 없는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
그런데 루아르는 왜 샤틀레의 초상에 카네이션과 컴퍼스를 함께 넣었을까. 컴파스는 수학의 상징이고 흰 카네이션은 사랑의 상징이다. 지적 호기심이 넘치면서도 사랑할 줄 아는 여성임을 드러내는 구도다. 여성과학자의 얼굴을 그리는 안전한 방식이면서 동시에 샤틀레 부인을 함축적으로 잘 담았다고도 할 수 있다. 잘 알려진대로 1734년에 그는 볼테르와 만났고 그 후 15년간 교류하며 함께 연구했다. 여성이 역사에 기록되는 공통된 방식은 주로 남자와의 관계이다. 샤틀레 부인도 그의 많은 업적과 인간관계 중에서 볼테르와의 관계가 가장 강조되었다. 볼테르와의 교류가 중요하긴 하지만 샤틀레 부인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이 관계도 그저 한 부분일 뿐이다. 1738년에 과학 아카데미에서 출간된 샤틀레 부인의 논문은 훗날 적외선을 발견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1740년대에는 학문과 사랑에 대한 에세이 《행복론》을 썼다. 이 책은 그의 사후인 1779년에 정식 출간되었다. ‘상류층에서 태어난 신동’인 샤틀레 부인은 당대 여성으로서는 예외적인 인물이지만, 그를 예외적인 인물로만 여긴다면 이 또한 성차별적이다. 많은 여성들이 그와 같은 기회를 얻었다면 아마 역사 속에서 ‘신동’이 더 많이 나왔을 것이고, 굳이 신동이라 부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살롱의 여성 얼굴들
샤틀레 부인의 초상화를 그린 마리안느 루아르도 동시대에 인물화가로 명성을 얻은 화가다. 파리의 은 세공사 집안 출신으로 그의 할아버지도 화가였고 루아르의 남동생은 조각가였다. 인물화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중에는 귀부인들의 초상도 많았다.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 흔적에 비하면 그의 이름으로 정확하게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는 않다. 사인이 확실하게 남아 있는 대부분의 작품은 40대에서 60대 사이의 그림으로 확인된다. 그 외에는 제작 연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고 사인이 없는 작품도 있다.
루아르보다 조금 앞서서 활동했던 니콜라 드 라르지예르Nicolas de Largillierre도 샤틀레 부인의 초상을 남겼다. 같은 인물을 그린 두 사람의 초상화를 비교해보면 루아르가 그린 초상화가 어떤 면에서 다른지 알 수 있다. 드 라르지예르의 그림에서도 샤틀레 부인의 과학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왼 손은 지구본 위에 올려두고 오른 손에는 공구를 들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 속 샤틀레 부인은 허공을 응시하는 반면 루아르가 그린 샤틀레 부인은 자연스럽게 정면을 본다. 루아르의 그림이 옷의 묘사는 더 단순한 반면 얼굴 표정은 더 생생하며 인물이 있는 공간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이는 여성 화가들이 여성 인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인물들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처럼 루아르 초상화의 특징은 인물의 현실성이다. 신화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고 인물들은 자연스럽게 화가와 눈을 맞춘다. 비슷한 시기 파리에서 살롱을 주관한 유명 인사인 조프랭 부인의 초상화에도 섬세한 표정 묘사가 잘 담겼다. 워싱턴 D.C.의 여성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프랭 부인의 초상화(1760)’는 특히 앉아있는 자세를 통해 인물이 화가를 편안하게 대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루아르는 10대 시절 프랑스 남부에서 몇 년간 체류하며 작업한 적이 있으며 30대에는 프랑스를 떠나 수년간 로마에 머물며 그림을 배웠다. 루아르는 50대 후반인 1762년이 되어서야 마르세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활동한 시간이 많았던 그가 왜 파리 아카데미가 아니라 마르세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을까. 당시 여성의 입회를 제한한 파리 아카데미의 성차별적 규정 때문이었다. 성별로 회원을 구별하던 파리와는 달리 프랑스 남부 대도시 마르세유에는 성별에 따른 제한이 없었다. 루아르는 마르세유 미술 아카데미 회원이 되어 그곳에서 전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면 이처럼 기량을 펼칠 여성들이 많다. 루아르는 프랑스 대혁명을 몇 년 앞둔 1783년에 파리의 자택에서 일흔 여덟 살에 사망했다. 당시에 많은 예술가들이 묻히던 생로슈 교회에 안장되었다.

글 이라영 문화평론가
예술과 정치, 그리고 먹을 것을 고민하는 글쓰기와 창작 활동을 한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