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물화의 선구자
소셜미디어가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그림을 통해 식사 장면을 많이 남겼다. 우리가 무엇을 먹는지 시각적으로 기록하고 싶은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매체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현상인가 보다.
네덜란드의 ‘꽃 그림’ 이전에 아침식사 장면Breakfast-piece이 있었다. 아침식사 장면은 정물화의 일종으로 빵, 치즈, 생선, 과일, 견과류, 와인이 든 유리잔, 꽃병 등 섬세한 관찰을 요하는 정물들이 등장한다. 클라라 페테르스Clara Peeters, 1594-1657 추정는 이 분야의 선구자 격이다. 초창기 정물화를 발전시킨 작가 중 한 명으로 유리잔, 은쟁반, 음식, 꽃 등을 뛰어나게 묘사했다. 여성에게 예술 교육과 화가로서 활동하기에 많은 제한이 있었음에도 17세기 초반 플랑드르에서 활동한 여성 화가 중 가장 유명하다.
페테르스는 개인사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기본적인 생몰년조차 정확하지 않다. 1594년에 오늘날 벨기에 지역인 앤트워프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그즈음 출생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첫 작품으로 기록된 연대가 1607년이다 보니 학자들은 그의 출생이 정말 1594년이 맞는지 의구심을 가진다. 작품의 완성도를 볼 때 고작 열 세 살 나이에 그렸다고 보기 어려워서다. 사망년도도 알 수 없으나 1621년 이후로 작품의 기록이 없다. 여성의 길드 가입이 제한되었던 만큼 여성들의 기록은 더욱 찾기 어렵다.
분명한 사실은 페테르스는 아침식사 장면이라 부르는 장르가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보다 먼저 이 장르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확인된 페테르스의 첫 작품이 1607년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제작연대가 알려진 꽃 그림 중에 플랑드르에서 1608년 이전에 제작된 작품은 10여 점이 넘지 않는다. 페테르스는 정물화와 꽃 그림에 대한 초기 전문 화가 중 한 명으로, 이 장르가 막 부상하는 17세기 초에 활동했다. 1607년에 제작된 정물화에는 유리잔과 은쟁반, 브레첼이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마치 식탁 앞에 우리가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각도이다. 반짝거리고 빛이 반사되어 주변의 사물까지 품어내는 은식기나 유리잔 등은 아침식사 장면의 단골 소재다.

정물 속에서 나를 찾아봐!
페테르스의 세심하고 정교한 묘사력은 꽃과 과일, 견과, 채소, 새우, 게, 비늘 하나하나 치밀하게 묘사한 물고기와 반짝이는 식기 등 다양한 질감 표현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페테르스에게 주목할 점은 이러한 관찰력과 묘사력만이 아니다. 페테르스는 정물화에 자화상을 도입한 최초의 화가이기도 하다. 1611년 제작한 정물화에는 신비롭고 놀라운 화가의 자화상이 숨어 있다.
앞쪽에는 식사 중에 먹다 남은 것처럼 보이는 구부러진 빵 조각과 흩어져 있는 흰색 과자가 그릇에 담겨 있다. 이 그릇 뒤에는 와인이 담겨 있을 어두운 금속 주전자가 서 있다. 주전자의 반사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개의 얼굴이 보인다. 주전자의 각도에 따라 자화상 중 하나는 거꾸로 된 모습이다. 화면 가운데 서 있는 금색 잔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도 반사된 화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자화상을 정물화에 삽입하는 방식은 그 후 플랑드르 미술에 영향을 준다. 화가의 독보적인 기법과 시선은 네덜란드와 독일 전역에 널리 퍼졌다.
많은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완성했을 이 그림은 언뜻 보기에는 고가의 식기를 통해 풍요로운 소유물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먹다 남은 빵 조각이나 화려하지만 곧 시들어 버릴 꽃, 빛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병에 비친 화가의 모습은 찰나의 순간을 반영한다. 화가는 영원하지 않은 나의 순간을 물질 속에 박제한 셈이다. 페테르스는 사물을 관찰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도 열심히 관찰했다. 정물화는 표면적으로는 탁자 위에 사물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우리 일상의 사물을 둘러싸고 있는 빛과 대기에 반응하는 화가의 시선을 담는다. 정물still life은 정지된 장면이며 죽은 사물을 그리는 듯 하지만 실은 지속되는 삶을 탐구한다. 정물화 속에 자화상을 그려 넣은 화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
꽃을 그린 다른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여성 작가들의 정물화에서 드러나는 세심한 관찰력은 종종 여성의 인내심 덕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분석은 성별에 대한 편견에 바탕을 둔다. 여성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내심 덕분이 아니라 여성들이 일상에서 자수와 레이스 제작처럼 꼼꼼한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오랜 훈련을 통해 성실하게 관찰하고 치밀하게 묘사하는 능력이 쌓였다고 본다.
후원자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페테르스의 그림에는 당시의 사치품이 등장하기 때문에 부유한 수집가들의 지원이 있었을 것이다. 페테르스의 작품을 복제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도 꽤 남아있어 페테르스가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페테르스의 주요 작품은 스페인 왕실 소장품이 되었고 현재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정물은 정지된 장면이며 죽은 사물을 그리는 듯 하지만 실은 지속되는 삶을 탐구한다.
정물화 속에 자화상을 그려 넣은 화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
글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예술과 정치, 그리고 먹을 것을 고민하는 글쓰기와 창작 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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