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대환, 『진보정당은 비판적 지지를 넘어설 수 있는가』
진보정당 세우기는 단지 우익 반쪽의 정치구도를 교정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역감정과 부패구조를 타파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제이다. 제도정치권을 지배하고 있는 기성 정당들은 모두, 즉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물론 민주당조차도 지역감정과 부패구조의 포로가 되어 있으며 또한 그로 해서 득을 보고 있어 한국정치의 가장 큰 병폐로 지목되고 있는 지역감정과 부패구조를 타파할 능력도 의사도 없기 때문이다. 기성 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불신이 극도에 달해 선거에서의 대패가 예상되거나 실제로 나타나면, 내부 개혁세력의 주도하에 획기적인 개혁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뿐, 찻잔 속의 태풍처럼 곧 잠잠해지고 만다. 국민참여경선으로 한국정치의 일대 변혁을 초래할 듯했던 민주당이 지금은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성 정당의 한계를 입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정치의 근본적인 변화는 기성 정치권의 바깥에 있는 세력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기성 정치권 바깥에 있는 세력으로 외세가 있을 수 있고, 진보정당이 있을 수 있다.
IMF가 한국식 경제시스템을 영미식 경제시스템으로 바꿔놓으려고 하는 것이나, 히딩크가 한국축구계를 바꿔놓은 것은 외세에 의해 우리 체제가 변화를 겪는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외세에 의한 변화는 민족자존심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바람과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 한국정치의 병폐를 바로 치유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대안은 우리 내부의 개혁세력, 즉 진보정당이 기성 정치권의 변화를 강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진보정당의 필요성 혹은 중요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왔고 또한 진보정당을 세우기 위한 시도도 끊임없이 이루어졌으나 아직 기성 정치권의 행태를 바꿔놓을 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이번에 나온 주대환 위원장의 『진보정당은 비판적 지지를 넘어설 수 있는가』는 오랫동안 진보정당건설에 투신해 온 현장활동가로서 진보정당이 처해 있는 현상황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진보정당이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주대환 위원장의 진단에 의하면, 민주당을 포함한 보수정당은 기존의 지배적인 대립구도에 근저에 있는 지역감정을 극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현 지배구조의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기성 정치인 가운데 지역갈등구조 타파에 가장 적격자라고 주목받고 있는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조차 지역적 안배, 지역적 탕평책과 같은 지역주의적 사고방식의 틀 내에서 가능한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지역감정을 넘어설 수 있는 대립구도는 계급적 단결과 이념적 유대감을 기초로 하는 ‘진보 대 보수’의 대립이 이루어질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의 대립구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진보정당이 현실적으로 영향력 있는 정치세력으로 등장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만이 보수정당들도 정책과 이념의 차이로 정돈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진보정당의 걸림돌이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한국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진보정당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주대환 위원장에 의하면, 그것은 진보정당 당원이나 지지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당선(또는 집권) 가능한 후보(또는 정당) 중 상대적 진보성을 가진 후보(또는 정당)를 선거에서 지지해야 한다”는 비판적 지지론의 입장을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비판적 지지론자의 입장에서 볼 때, 진보정당(후보)은 어차피 당선되기(또는 집권하기) 어려우니 기성 정당(또는 정치인) 가운데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당(또는 후보)을 지지, 당선(수권)케 하여 진보정당의 성장에 유리한 여건을 만드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김대중(또는 평민당/국민회의), 지금은 노무현(또는 민주당)이 이러한 비판적 지지의 대상이다.
실제로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일반국민들은 물론 진보정당 지지자 가운데도 비판적 지지의 입장을 견지해 온 이들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주대환 위원장이 새 책에서 비판적 지지의 문제를 가장 먼저 다루고 또한 책의 절반 이상을 할애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다. 주위원장에게 또한 진보정당 운동가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겉으로는 진보적인 척하면서 실제로는 보수야당의 성향을 가진 ‘사이비’ 비판적 지지론자들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고 선거에서 극우정당을 지지하는 것보다 이들을 지지하는 것이 진보정당에게 유리하다고 믿는 ‘진정한’ 비판적 지지론자들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주대환 위원장은 김대중과 노무현, 특히 노무현의 ‘상대적 진보성’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밝히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김대중의 ‘상대적 진보성’이 노동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귀결된 것처럼, 노무현의 그것도 김대중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비판적 지지의 명분을 제공하는 것은 민주당이나 노무현의 ‘상대적 진보성’만이 아니다. 진보정당의 당선(또는 집권) 가능성이 낮았던 것도 중요한 명분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주대환 위원장의 다음 관심은 왜 지금까지 진보정당이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운동이 정체되어 온 데는 국가보안법과 탄압 또는 소선거구제 같은 외부적 요인과, 노동운동의 이념적 분열이나 실리적 조합주의 등과 같은 내적 요인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 중에서 주위원장은 외적 요인으로는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국가보안법과 그에 근거한 진보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탄압”이나 우리 사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 레드 콤플렉스보다는 단순다수제와 소선거구제를 결합한 현행 선거제도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대가 없이는 정당활동이나 선거운동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우리나라의 정치문화를, 내적 요인으로는 진보정당의 기반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에게 왜곡된 ‘계급의식’을 가져다준 조합주의적 경향과 현실에서는 개량주의적(또는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을 하면서 혁명주의를 내세워 진보정당운동을 방해하는 ‘사이비’ 혁명주의 그리고 진보정당운동가들의 한국정치문화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 등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시도하고 있는 주위원장의 분석은 대체로 정확하며 따라서 공감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원장의 분석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바꿔놓는 진보운동에는 정당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운동이나 시민운동도 있고, 진보정당운동에도 사회민주주의적(또는 선거) 정당운동만이 아니라 혁명적 정당운동도 있을 수 있으며, 각 유형은 각기 다른 영역에서 또한 객관적 여건에 따라 사회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잊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정당운동ㆍ사회운동이 존재하고,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적 정당운동으로 통합되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의 여건이 복합적이어서 각각의 운동이 우리 사회를 진보시키는 데 나름대로의 역할을 할 수 있고 또한 나름대로의 성과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일상의 문제(예, 소득)를 해결할 수 있다면 왜 굳이 정치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것일까? 국가나 자본가가 대화나 타협보다는 탄압으로 대응한다면 노동자들이 혁명주의적 경향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노동운동이나 진보정당이 환경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아예 환경운동에 적대적이라면 시민운동이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따라서 진보정당의 문제는 이렇게 다양한 형태와 이념적 경향을 가진 운동들을 하나로 묶어세울 수 있는 이념과 조직형태 그리고 의사결정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이 책에는 이러한 고민과 분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성공을 기원하는 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현장의 생생한 경험이 담겨 있는 귀중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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