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호] 주제기획 4_평화에 대한 상상력의 조건과 한계

동아시아 공동체론의 성찰

1. 동아시아적 맥락에서의 평화란?

동아시아인의 상호소통에서 언어가 문제란 것은 동아시아 교류활동에 참여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낀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히 통역이라는 기술적인 차원에서 해결될 것이 아니다. 언어로 표현된 내용의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동아시아 상호이해의 첫걸음이자, 이로부터 ‘인식공동체’로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열릴 터이다.

최근 필자가 경험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계간지 <창작과비평>이 올해(2006년)로 창간 40주년을 맞아, 국제심포지엄 ‘동아시아의 연대와 잡지의 역할 : 비판적 잡지 편집인 회의’ 를 지난 6월 9~10일 양일간 서울에서 열었다. 중국, 대만, 일본, 한국의 총 13개 잡지, 16인의 편집책임자들이 주제발표와 토론에 나선 이번 행사는 각계 전문가와 독자들의 진지한 관심과 참여 속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주최 측이 회의 참석자들에게 발표문을 준비할 때 고려해달라고 미리 부탁한 사항이 있었다. 그것은 동아시아 각 사회에서의 ‘진보’의 의미에 대해 언급해달라는 것이었는데, 막상 회의를 열고 보니 이에 대한 참석자들의 이해 방식이 서로 달라 행사를 준비해온 사람들은 당혹했다. 한국의 진보진영에서는 올해 초부터 ‘진보의 재구성’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진보란 ‘보수’의 반의어이다. 그런데 한국 밖에서 온 일부 참석자들은 진보를 단순히 ‘발전’과 같은 뜻 즉, 후진·저개발의 반의어로 이해했던 것이다.

진보에 대한 한국의 용법을 정확히 알려면, 그 용어가 쓰이는 맥락을 섬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87년의 민주화운동 승리 이후 거의 20년이 되어 가는 지금 한국 안에서는 1987년 이후의 민주화가 국민의 삶의 질의 개선과 행복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심각하게 회의하는 풍조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기대만큼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는 노무현 정부의 역할로 인해 민주주의의 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진보진영의 위기의식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시 묻고, 진보를 재구성하려는 활동이 지금 진보진영 내부에서 논쟁의 형태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상황 속에서 <창작과비평>은 해외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도 진보의 의미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것이다.

진보란 말과 마찬가지로 ‘평화’란 말도 지금 동아시아에서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중국대륙에서 ‘화평굴기(和平屈起)’란 말을 통해 지향하는 국제질서에서의 평화, 일본에서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세력이 추구하는 ‘보통국가’ 일본이 추구하는 평화, 그리고 분단된 한반도 남쪽(대한민국)의 일부 진보세력 사이에서 논쟁되고 있는 ‘평화국가’ 가 지향하는 평화가 서로 같지는 않다. 따라서 그 각각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희구하는 동아시아 평화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 것인지를 제대로 따져보려면 평화란 어휘가 사용되는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평화를 연구하거나 실천하는 사람들은 평화가 지상에서 획득가능하고 소망스러운 것이란 인식을 기반으로 평화가 결여된 현실을 변혁하려는 지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전쟁의 부재와 같은 소극적인 정의를 넘어서 군사주의, 빈곤, 환경 파괴, 가부장제 등에서 야기되는 모든 구조적 억압을 제거하는 것으로 평화를 규정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어찌 보면 평화의 궁극적 실현이 대동(大同, 또는 유토피아)의 도래인 듯이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평화운동도 노동·환경·여성운동 등과 결합된 포괄적 차원의 운동으로 발전해가는 것 같다. 이러한 추세는, 근본주의적 발상이 대개 그러하듯이, 일상생활 속에서 무디어진 평화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일깨우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세계사적 연관성을 간과하게 만드는 한편 일반 대중의 욕구를 도외시하기 쉽다. 따라서 필자는 평화에 대한 근본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당면한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획득가능하고 소망스러운 평화란 어떤 모습인가를 논의해보고자 한다.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에 이르는 경로로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동아시아공동체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공동체에 관한 담론 가운데는 그것을 마치 동아시아의 유토피아로서 상상하는 경향도 없지 않으나, 여기서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나타난 사회현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 발표에서는 1997년 ASEAN+3(한중일)체제가 출범한 이래, 특히 2001년 ASEAN+3 정상회의 때 ‘평화·번영·발전’을 추구하는 ‘동아시아 공동체(East Asia Community; EAC)’ 비전이 채택되기 전후해 급물살을 탄 다양한 동아시아공동체 논의의 현 단계를 평화의 관점에서 점검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다.

동아시아공동체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기대대로 평화의 공동체로서 실현되려면, 이 지역을 구성하는 국민국가의 밖에서 이뤄지는 국가 간 통합 과정과 국가 안에서 구성원 개개인의 참여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의 내부개혁 과정이 쌍방향적으로 추동해야 한다고 본다. 발표자는 바로 이 쌍방향성을 기준으로 삼아 아래에서 여러 갈래의 동아시아공동체 논의를 검토해볼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분열과 갈등의 동아시아 현실로부터 평화를 위한 상상력이 그 힘을 새롭게 길어 올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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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서/연세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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