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철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들어가며
계엄군의 도청 진입을 앞둔 1980년 5월 27일 새벽, 시민군 윤상원은 다음과 같이 최후항쟁을 결의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끝까지 뭉쳐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불의에 대항해 끝까지 싸웠다는 자랑스러운 기록을 남깁시다. 이 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아침이 옵니다.” 1)
광주항쟁은 박정희 사후 군부권위주의의 복원을 시도하던 전두환 신군부에 정면으로 항거한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이었다. 그것은 ① 18∼21일,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살상과 시민들의 목숨을 건 저항, ② 22∼26일, 계엄군의 철수와 항쟁공동체의 형성, 그리고 ③ 26일 오후∼27일 새벽, 계엄군의 재진입과 시민군의 자기희생이라는 세 국면의 연속이었다.
신군부의 엄청난 폭력 앞에 광주항쟁은 철저히 압살되었다. 그 결과는 유신독재에 이어 또 다른 군부독재의 출범이었다. 이 점에서 광주항쟁은 분명 좌절된 민주화운동이었다. 그러나 5월 27일의 최후항쟁을 끝으로 광주항쟁이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자기희생을 통해 독재정치의 부당성과 폭력성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임으로써, 광주항쟁은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운” 사건이 되었고, 한국사회에 새로운 “구조를 만든” 역사적 중대사건이 되었다.2) 광주항쟁은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많은 시민들의 ‘기억투쟁’을 통해 부활하였고, 한국 민주화를 추동하는 역사적 원천이 되었다.
이 글은 광주항쟁이 한국정치의 민주화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그 함의에 대해 논의한다. 광주항쟁은 왜 그리고 어떻게 한국 민주화를 추동하는 원천이 되었는가? 광주항쟁이 한국 민주화에 기여했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광주항쟁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함의는 무엇인가?
민주화와 신생민주주의
민주화(democratization)란 권위주의 체제가 성숙한 민주주의 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을 뜻한다. 개념적으로 민주화는 세 과정-민주화 이행, 민주주의 공고화, 민주주의 질적 심화-으로 구분된다. 민주화 이행(democratic transition)이 비민주적 정치체제의 붕괴, 새로운 민주정부의 형성, 민주적 제도의 생성을 수반하는 과정이라면, 민주주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는 신생민주주의가 절차적으로 민주적 규칙과 제도를 정착시켜 민주헌정질서의 안정과 지속을 꾀하는 과정이며, 민주주의 질적 심화(democratic deepening)는 공고화된 신생민주주의가 절차적 차원을 넘어, 내용적이고 실질적인 측면에서 그 질적 수준을 심화시켜가는 과정이다.
먼저, 민주화 이행은 권위주의 진영과 민주화 진영 간 힘의 분포와 전략적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헌팅톤(Huntington)에 의하면,3) 다음 세 가지 상황에서 신생민주주의가 출현한다. 첫째, ‘위로부터의 민주화 이행’(transformation)으로, 이는 권위주의 세력의 내부 균열로부터 발생한다. 즉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권위주의 진영의 개혁파들이 독재 질서를 고수하려는 권위주의 진영의 보수파들을 압도할 경우, 개혁파들이 민주화 세력과 협상을 통해 민주화 이행을 진행하는 경우이다. 둘째, ‘밑으로부터의 민주화 이행’(replacement)이다. 이는 민주화 세력의 힘이 권위주의 세력을 압도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이 경우, 권위주의 세력의 급속한 몰락과 민주화 세력의 정권 장악이 동반된다. 셋째, ‘타협을 통한 민주화 이행’(transplacement)이다. 이는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힘이 비등한 상황에서 두 세력 간의 타협에 의해 민주화 이행이 발생하는 경우이다.
하지만 민주화 이행의 성공이 신생민주주의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신생민주주의는 다시 권위주의로 퇴행하기도 한다. 그것은 신생민주주의의 정치적 취약성에서 비롯되며, 그 취약성은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제도적 차원에서 이른바 ‘집정관주의 문제’(praetorian problem)로 표현되는 군의 탈정치화 문제이다.4) 이는 민주화 이행 이후에도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군의 정치적 위상을 어떻게 축소시켜 최종적으로 민간우위의 민군관계를 제도화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가 해소되지 않을 경우, 신생민주주의는 쿠데타에 직면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갑작스런 죽음’(sudden death)을 맞게 된다.
둘째, 태도적 차원에서 민주적 규범과 가치가 얼마나 광범하게 확산되어 있는가의 문제이다. 신생민주주의의 안정적 지속을 위해서는 민주적 규칙과 절차를 수용·지지하는 사회 태도와 규범이 정착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신생민주주의는 서서히 자유헌정주의(liberal constitutionalism) 질서의 축소를 경험하게 되며, 그 결과 신생민주주의는 ‘점진적 죽음’(slow death)을 맞게 된다, 이 점에서 시민들의 민주적 규범과 태도는 권위주의 세력의 움직임을 견제하고 민주주의 공고화를 촉진하는 중요한 요건이다.5)
셋째, 행태적 차원에서 정치적 반대 세력의 형성과 제도화의 문제이다. ‘밑으로부터의 민주화 이행’을 제외한 ‘위로부터의 민주화 이행’ 및 ‘타협을 통한 민주화 이행’의 경우, 성공적인 민주화 이행이 권위주의 세력의 몰락을 의미하진 않는다. 민주화 이행 이후에도 권위주의 세력은 여전히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남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이를 견제하고 응징할 대안세력이 부재할 경우, 자유와 공정이 결여된 선거정치의 일상화는 물론, 권위주의 세력 중심의 패권적 정당체제의 출현 및 제도화로 귀결되기 쉽다. 이는 정권교체 가능성의 부재로 이어져, 신생민주주의의 정치과정은 인치(人治)가 법치(法治)를 압도하는 ‘비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로 퇴행하게 된다.6) 즉 신생민주주의의 정상적 작동을 위해, ‘조직화 된 대안세력’(organized alternative)의 출현과 지속이 필수적이다.7) 이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두 번 이상 발생하면 신생민주주의가 공고화 단계에 이른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8)
5·18 기억투쟁
광주항쟁 열흘 동안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폭력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인구 80만 명인 광주에 공수부대를 비롯한 정예부대 병력 2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이는 시민 40명 당 진압군 1명이 투입된 엄청난 무력이었다.9) 계엄군의 시위진압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고, 그 진압방식은 ‘인간사냥’에 가까운 매우 잔인한 것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민간인 희생자는 5·18 당시 사망자 155명, 상이 후 사망자 110명, 부상자 2,461명, 연행·구금 부상자 1,145명, 연행·구금자 1,447명, 행방불명자 81명, 기타 118명 등 총 5,517명으로 파악되고 있다.10)
광주항쟁은 발생 직후부터 신군부에 의해 ‘폭동’으로 규정되었다. 전두환 정권 내내 ‘5·18 폭동론’은 국가의 철저한 통제와 감시 속에 신군부와 그 추종세력들에 의해 생산·유포되었다. 그 결과, 당시 5·18의 실상을 잘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폭동론’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고, 5·18 희생자와 유가족, 그리고 그 동조자들은 ‘폭도’ 혹은 ‘불순집단’으로 매도되었다.
이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5·18 기억투쟁’을 촉발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기억투쟁의 주역은 희생자집단, 대학생집단, 그리고 재야의 민주화운동집단이었다. 항쟁 직후, 피해당사자 단체(유족회, 구속자 가족회, 부상자회)들의 주요 활동은 희생자를 추념하고 자신들의 심적 충격과 고통을 서로 위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국가의 노골적인 간섭과 방해 속에 진행되어야 했고,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추모·공감 활동은 자연스럽게 기억투쟁으로 발전되었다.11)
한편, 학생과 재야활동가들의 기억투쟁은 5·18 희생자들에 대한 부채의식과 대의적 책무감의 발로였다. 학생들의 기억투쟁은 처음부터 행동주의적이고 급진적이었다. 학생들은 광주학살에 항의하는 유인물 살포는 물론이고, 광주학살을 묵인한 미국에 대한 항의로 미문화원 방화 및 점거라는 극단적 행동도 불사했다. 이들의 기억투쟁은 1985년 4월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의 결성을 계기로 “민족·민주·민중”의 기치를 내건 전국수준의 연대투쟁으로 발전했다. 다른 한편, 재야활동가들의 기억투쟁은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결성을 계기로 활성화되었다. 민청련은 망월동 묘역 참배, 사진·수기·일지를 담은 자료집 발간, 사진·판화전 개최 등을 통해 5·18의 진실을 알렸으며,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실현’ 및 ‘냉전반공질서의 해소와 평화정착’의 기치 아래 개별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재야운동단체들과의 연대를 꾀하였다. 그 결과, 1987년 6월항쟁 이전에 이미 민주화 세력의 조직기반과 운동역량은 상당한 수준으로 신장될 수 있었다.12)
6월항쟁은 기억투쟁의 정치적 활동공간을 크게 확장시켰다. 기억투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마침내 1988년 11월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 ‘광주청문회’가 개최되었다. TV로 생중계된 청문회는 시청률 40%를 상회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를 통해 5·18의 실상을 처음 접한 시민들은 신군부의 유혈진압과 이를 방조한 미국에 크게 분노했다. 문화예술인들과 영상·영화인들은 5·18의 역사적 배경, 학살자의 야만성, 그리고 그날의 공포와 감동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했다.13)
기억투쟁은 ‘5·18 특별법 제정운동’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심판론’(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대해 “훗날의 역사”에 맡기자), 그리고 이에 따른 검찰의 광주학살 관련자들에 대한 불기소 결정은 시민들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시민사회는 ‘5·18학살자 처벌특별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국민서명운동과 대규모집회로 정부를 압박했고, 이에 대통령은 ‘5·18특별법’ 제정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그 결과, 1995년 12월 21일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과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광주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공인되었고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2000년 5월, 신군부 쿠데타의 피해자였던 김대중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5·18 기념식에 참석하여 5·18이 민주항쟁이었음을 공표했다. 이로써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 듯했다.
하지만 기억투쟁은 계속되었다. 이명박·박근혜 보수정부의 5·18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보수 인사와 집단들의 5·18 왜곡활동을 부추겼다. 이러한 움직임은 5·18 기억이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기억운동 활동가와 단체들은 아직 밝히지 못한 진상들의 추가적 규명과 5·18 왜곡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에 적극 호응했고, 그 결과 2018년 2월에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그리고 2020년 12월엔 이른바 ‘5·18 역사왜곡 처벌법’(‘5·18 특별법’의 일부개정)이 제정되었다.
광주항쟁의 역사적 영향력
1. 민주화 이행
한국의 민주화 이행은 ‘타협을 통한 민주화 이행’으로 평가된다. 그것의 시작은 1987년의 6월항쟁이었고, 이를 이끈 조직체는 시민사회 내 민주화 세력이 통일민주당(야당)과 연대하여 결성한 ‘국민운동본부’였다. 6월항쟁은 엄청난 국민적 호응 속에 진행되었다. 시위가 경찰력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자, 전두환은 군대동원을 통한 시위진압을 검토하였다. 그러나 군대동원은 좌절되었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6·29 선언’이 발표되었다.
6월항쟁의 성공 이면에는 광주항쟁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주학살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신군부세력의 ‘원죄’로 작동하였고, 재야 활동가들에게 보다 광범하고 다양한 시민사회 부문들을 포괄하는 민주화운동의 대중화와 조직화를 촉구하는 추동력으로 기능했다. 그 결과,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매우 효과적인 시민동원 능력을 지닌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될 수 있었다.
또한 광주항쟁은 전두환 정권의 군대동원을 좌절시킨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했다. 6월항쟁이 절정을 향하던 6월 19일 오전 10시, 전두환은 안기부장·국방장관·육해공군 참모총장·수방사령관·보안사령관 등 군고위관계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비상조치’ 발동을 전제로 군 병력 배치계획을 결정·시달했다.14) 하지만 군 병력을 통한 시위진압계획은 6월 19일 오후 4시 30분경에 돌연 중단되었다.
군대동원이 취소된 주요 배경은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1980년 광주학살의 경험이 군 지휘관들로 하여금 또다시 엄청난 희생을 가져올 수 있는 군대동원을 선호하지 않도록 촉구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당시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다수의 장성들은 광주학살과 같은 진압방식은 결코 회복할 수 없는 군 명예의 추락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정치적 재앙을 초래할 것으로 판단하고, ‘군 출동 불가’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15) 이 같은 군 내부의 분위기는, 군 출동 명령을 계속 고수할 경우, ‘역 쿠데타’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전두환에게 안겨주었다.16)
다른 하나는 미국의 태도 변화였다. 군고위관계자 청와대 회의에서 군 동원령이 결정되던 6월 19일 미 국무성은 “한국사태가 대화를 통해 해결되길 바란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6월 19일 오후 2시 릴리(James Lilley) 주한 미국대사는 전두환에게 레이건의 친서를 직접 전달하면서 “군의 개입은 한미동맹 관계를 위협하게 될 것이며, 1980년 광주사태의 재발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17)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1980년 광주항쟁 때와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미국은 5·18 이후 한국민의 대미의식의 변화, 특히 반미정서의 출현에 주목했다.18) 즉 광주항쟁이 창출해 낸 한국사회 내의 반미 흐름은 1987년 6월이라는 구체적 국면에서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을 심각하게 재검토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이미 정당성을 상실한 전두환 정권을 지지할 경우 한국 내의 반미감정이 더욱 고조될 것이며, 결국 이러한 사태의 발전은 미국의 국익에 결정적으로 반한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요컨대, 1980년 광주의 희생은 한편으로 민주화세력의 운동역량 제고에 기여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 미국 정부와 한국군 장성들에게 군 병력을 통한 시위진압을 반대하도록 촉구함으로써, 6월항쟁을 성공적인 민주화 이행으로 이끄는 데 이바지했다.
2. 민주주의 공고화
(1) 군부의 탈정치화
민주화 이행 이후에도 군부의 정치개입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군부 내에는 12·12 군사반란, 5·17 쿠데타, 그리고 5·18 유혈진압을 지휘한 전두환·노태우의 추종집단, 이른바 ‘하나회’ 장교집단이 여전히 건재했고, 이들의 군부 내 영향력은 상당한 상태였다. 때문에 이들은 “군 내부에 엄존하는 쿠데타 위협세력”으로 평가되고 있었다.19) 이들의 정치개입은 1987년 12월 대선과정에서 이미 관찰된 바 있었다. 당시 하나회 소속 일부 장성들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경우 불행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공표하기도 했다.20) 이는 정치적 성향의 장교집단이 건재하는 한,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은 언제든지 반전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한국의 신생민주주의가 쿠데타로 인한 ‘갑작스런죽음’에 직면할 위험성을 제거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1993년 3월 8일, 김영삼은 하나회의 핵심 멤버로 알려진 육군참모총장(김진영)과 기무사령관(서완수)을 전격적으로 해임했다. 5월 24일에는 12·12 군사반란에 관여한 이필섭 합참의장, 김진선 2군사령관, 안병호 수방사령관, 박종규 56사단장을 경질했고, 7월 15일에는 하나회 인맥으로 알려진 조남풍 1군사령관을 예편시켰다. 그 결과, 문민정부 출범 1년 동안 전역한 하나회 출신 중장급 이상 고위 장성이 8명에 이르렀고, 이외에 20여 명의 장성과 많은 영관급 장교들이 예편 또는 한직으로 밀려났다.21) 그리고 그 자리에는 비정치적 성향의 군 지휘관들로 채워졌다.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숙정 이면에도 광주항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광주청문회’를 통해 광주학살은 결코 씻을 수 없는 죄악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 김영삼에게 문민정부가 신군부세력과의 합당(민자당)을 기반으로 성립된 정부라는 사실은 결코 도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1993년 출범 직후부터 김영삼 정부는 “3당합당의 태생적 족쇄에 묶여” 있다는 국민적 비판을 받고 있었다.22) 이 점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하나회 숙정은 정권의 이미지를 단숨에 제고할 수 있는 최고의 승부처였던 것이다.
광주항쟁의 영향력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93년 5월, 김영삼 대통령은 ‘5·18 특별담화문’을 통해 문민정부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서있는 민주정부”임을 강조하면서, “신한국 건설”에 정진하기 위해 “시대가 남겨준 앙금과 한을 훌훌 털고”5·18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훗날의역사”에 맡기자고 제안했다. 그의 ‘역사심판론’은 학생과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이들은 ‘5·18특별법 쟁취를 위한 투쟁’에 돌입했고, 국민여론에 밀린 김영삼 정부는 기존 입장을 바꿔야 했다. 그 결과는 1995년 12월 19일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대한 특별법’ 제정이었다. 그리고 1997년 4월 대법원은 12·12를 명백한 “군사반란”으로, 5·18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행위”로 판결했다. 대법원 판결은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마련함으로써 군부의 정치개입 가능성을 제거시켰다. 이로써 한국의 신생민주주의는 ‘갑작스런 죽음’의 위험성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공고화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2) 민주적 규범의 확산
민주화 이행 이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 기억투쟁은 사람들의 5·18 기억을 빠르게 변화시켰다. 1997년 수행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들의 65%가 5·18을 ‘민중혁명’ 혹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식했고, ‘폭동’ 혹은 ‘모름’ 등으로 응답한 사람은 35%로 조사되었다.23) 그로부터 23년이 경과한 2020년 12월∼2021년 2월에 수행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76%가 5·18을 ‘민주항쟁’으로 기억했고, ‘폭동’ 혹은 ‘모름’으로 대답한 사람은 24%였다.24) 아래 제시된 [그림]들은 2020∼21년에 조사된 여론조사에 근거한 통계수치이다.25)
기억투쟁은 5·18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인들에게 민주적 규범을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정치사회화의 기제로 기능했다. [그림 2-1]은 군의 정치개입과 집회·표현의 자유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태도를 조사·분석한 것이다. 분석에 의하면, 전체 응답자들 중 약 80%가 “정권의 안위와 생존을 위해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도 괜찮다”에 반대했고, 약 67%가 “사회질서가 혼란스럽더라도 정부는 사람들의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한다”에 동의했다. 하지만 민주적 규범에 대한 각성의 정도는 5·18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에 따라 달리 나타났는데, ‘항쟁’으로 기억하는 집단이 여타 기억집단보다 민주적 규범에 대한 동의의 비율이 높았다. 구체적으로, 5·18을 ‘항쟁’이라고 인식하는 집단은 83%가 군대의 정치적 동원에 반대한 데 비해, ‘폭동’과 ‘모름’으로 응답한 사람들은 각각 71%와 73%만이 군대동원에 반대했다. 그리고 집회·표현의 자유의 경우, ‘항쟁’ 응답자들에서 69%, ‘폭동’ 응답자들에서 59%, 그리고 ‘모름’ 응답자들에서 62%가 동의했다. 이러한 분석결과는 광주항쟁이 일반시민들의 민주적 규범 형성에 기여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그림 2-2]는 민주적 규범에 대한 각성이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전체 응답자들 가운데 69%가 “민주주의 정부가 다른 어떤 정부형태보다 더 낫다”(민주주의 우월성)에 동의했고, 83%가 “민주주의가 우리나라 현실에 적합한 제도이다”(민주주의 적합성)에 동의했다. 이를 광주항쟁에 대한 기억의 유형(항쟁, 폭동, 모름)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면, 5·18을 ‘항쟁’으로 기억하는 사람들 중 73%가 민주주의의 우월성에 그리고 86%가 민주주의의 적합성에 동의했고, ‘폭동’으로 기억하는 사람들 중 각각 58%와 75%가, 그리고 ‘모름’ 응답자들은 각각 51%와 67%가 동의했다.
이러한 분석결과는 광주항쟁이 우리사회에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깊이 각인시킴으로써 한국 신생민주주의의 안정적 공고화에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3) 정치적 반대세력의 형성
많은 연구자들은 5·18 국가폭력이 우리사회에 지역균열과 이념균열을 촉발·형성시킨 핵심 요인으로 지목한다. 비록 이러한 정치균열이 사회갈등을 심화시켰다는 지적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역균열과 이념균열은 우리사회의 정치이념적 공간을 확장시켜 전국적 기반을 지닌 정치적 대안세력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정치균열은 국민혁명 및 산업혁명 등과 같은 역사적 중대사건을 배경으로 생성된다.26) 구체적으로, 역사적 중대사건은 정치·사회적 변동을 동반하며, 이러한 변동에 대한 인식과 대응을 둘러싼 상이한 정치적 입장들을 출현시켜 사회구성원들을 서로 다른 태도와 선호를 지닌 사회집단으로 층화(stratification)시키는 정치적 구분선, 즉 정치균열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정치균열은 사람들의 정치적 태도와 선택을 유인 혹은 강제하는 구조적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점에서 광주항쟁은 한국사회에 지역과 이념 차원의 정치균열을 형성시킨 중대사건이었다.
지역균열은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 이미 배태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전략은 지역적으로 서울·경기지역과 영남지역 중심의 지역불균등 개발정책이었다. 더불어 박정희 정권의 엘리트 충원은 영남출신에 집중되었다. 이 같은 경제·정치적 차별은 호남주민들에게 소외의식을, 영남주민들에게 특권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영호남 차별이 곧바로 정치균열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증폭시키고 현재화한 것은 5·18 국가폭력이었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광주항쟁의 유혈진압 그리고 권위주의 계승정당(authoritarian succession party)의 5·18 진상규명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영남기반 정치세력에 대한 호남인들의 반감을 형성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반면, 5·18 진상규명에 적극적 입장의 견지했던 평민당과 그 후신정당에 대한 호남인들의 호감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념균열 역시 광주항쟁에 의해 촉발되었다. 신군부는 처음부터 광주항쟁을 남파간첩의 선동에 추동된 ‘폭동’으로 규정했고, 신군부의 유혈진압은 미국의 ‘묵인’ 혹은 ‘동의’하에 진행되었다.27) 이에 따라, 기억투쟁은 민주화를 촉구하는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냉전·반공주의 세계관을 대체하는 탈냉전·탈반공주의 세계관의 형성과 실천의 차원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그림 2-3]은 기억투쟁을 통해 광주항쟁이 반공교육과 북한에 대한 태도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이에 의하면, 전체 응답자들 중 “청소년들에 대한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58%)이 반대하는 사람(42%)에 비해 다소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북한은 적대의 대상이기 보다는 협력의 대상이다”에 반대하는 사람(65%)이 동의하는 사람(35%)에 비해 훨씬 많았다. 즉 응답자들 가운데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사람들이 반공교육의 강화에 반대했고, 약 ⅓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북한을 협력의 대상이라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반공교육과 북한에 대한 태도는 5·18 기억의 유형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가장 큰 차이를 보인 집단은 ‘항쟁’ 기억집단과 ‘폭동’ 기억집단이었다. 5·18을 ‘항쟁’으로 기억하는 집단에서 반공교육 강화에 반대하는 비율은 46%인 반면, ‘폭동’이라고 인식하는 집단에서 반공교육 강화에 동의하는 비율이 76%에 달했다. 그리고 ‘항쟁’ 기억자들 중 38%가 북한을 협력 대상으로 보는 반면, ‘폭동’ 인식자들 중 17%만이 찬성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분석결과들은 5·18을 ‘항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폭동’ 혹은 ‘모름’으로 응답한 사람들에 비해, 반공주의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북한을 협력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광주항쟁이 한국인들의 반공주의 및 반북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한다. 즉 한국전쟁 이래 반공·반북주의가 정치적 지배이념으로 별다른 의문 없이 수용되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 엄청난 변화임에 틀림없다.
지역균열 및 이념균열은 한국인의 투표선택과 정당배열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87년 대선과 1988년 총선에서 정당배열은 – 민정당(보수대구·경북),신민주공화당(보수-충청), 통일민주당(보수적 자유주의-부산·경남), 평민당(개혁적 자유주의-호남) – 4개의 지역정당이 경쟁하는 일종의 다당제 형태를 보였다. 하지만 양대 선거에서 대선 신승(辛勝)과 총선 패배를 경험한 권위주의 세력은 보수세력 중심의 ‘패권정당 만들기’를 시도했다. 1990년 민정당 주도의 ‘3당 합당’이 바로 그것이었다. 즉 권위주의 세력(민정당)은 3당 합당을 통해 보수적 권위주의 분파(신민주공화당)와 보수적 자유주의 분파(통일민주당)를 포섭하여 패권적 정당체제를 만들어냈다. 이는 개혁적 자유주의 분파(평민당)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에 따라 보수세력을 견제할 대안세력으로서 야권의 역량과 위상은 현저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3당 합당을 통한 보수세력 중심의 패권적 정당체제는 14대 총선(1992년)을 거치면서 이내 ‘양당우위의 정당체제’로 전환되었다. 그것은 지역균열과 이념균열의 중첩적 작동의 결과였다. 정치적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 평민당은 독자적 의회진출에 실패한 재야운동권 세력과의 연대를 추구해야 했다. 평민당 계승정당의 외연확대 노력은 재야운동권 인사의 영입으로 이어졌다. 1992년 14대 총선을 앞두고 재야운동권의 ‘민주연합파’ 인사들이, 1995년 제1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활동가들이,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개혁신당그룹’이 영입되었다.28) 이에 따라, 호남기반 지역정당인 평민당 계승정당은 이념기반의 진보세력이라는 사회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게 되었고, 나아가 노무현·문재인과 같은 이른바 ‘PK 인사’들을 자연스럽게 평민당 계승정당으로 유인·포섭해낼 수 있었다. 그 결과, 평민당 계승정당은 권위주의 계승정당을 견제하는 전국적 차원의 정치적 대안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요컨대,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광주항쟁은 지역균열과 이념균열을 현재화함으로써 기존 반공·보수 중심의 단차원적 정치공간을 다양한 정치세력(반공보수, 중도자유, 진보세력 등)들이 경쟁하는 다차원적 정치공간으로 전환시켰으며, 양당우위의 정당체제를 제도화함으로써 권위주의 후신세력을 견제할 정치적 대안세력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 결과,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정치는 선거를 통한 4차례의 정권교체를 경험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가며
광주항쟁은 철저한 자기희생을 통해 한국 민주화의 원천이 되었다. 광주항쟁은 민주화운동의 저변 확대에 기여함으로써 6월항쟁을 ‘무혈혁명’으로 이끄는 추동력이 되었고, 전두환·노태우의 사법적 처벌을 이끌어냄으로써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된다”는 전례를 만들었으며, 지난한 기억투쟁을 통해 민주적 규범과 가치를 널리 확산시켰다. 또한 보수·진보의 이념균열과 영·호남 지역균열이라는 중첩된 정치균열을 생성·작동시킴으로써, 보수세력 중심의 패권적 정당체제의 제도화 시도를 막고 양당우위의 정당체제를 생성시켜 전국적 차원의 정치적 대안세력의 형성에 기여했다. 그 최종적 결과는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였다.
하지만 민주주의 공고화가 결코 질적으로 수준 높은 민주주의를 성취했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간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내용적 차원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여전히 개선되어야 할 대목들이 많다. 예컨대, 선거 레짐의 대표성과 비례성 제고, 권력통제 레짐의 정치적 책임성 향상, 법치 레짐의 평등성 확보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으며, 경제적 불평등 심화로 인한 정치적 평등의 훼손을 막기 위한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29)민주주의는 설치만 하면 저절로 작동하는 단순한 기계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들 마음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가치적 정향과 조응할 때 비로소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질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30) 즉 민주주의의 품질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운영하는 시민들의 태도와 신념에 달려있다. 우리가 광주항쟁을 기억하고 추념하는 것은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불의한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방지하고, 나아가 보다 수준 높은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함이다. 광주항쟁이 민주화 이행과 공고화의 추동력이 되었듯이,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심화를 위한 정신적 원천이 되길 바란다.



1) 박호재·임낙평. 2007, 『윤상원 평전』. 서울: 풀빛, 406-407
2) 최정운. 1999. 『오월의 사회과학』. 서울: 풀빛, 24
3) Samuel P. Huntington. 1991-2. “How countries Democratize.” Political Science Quarterly, 106:4, 579-616
4) Samuel P. Huntington. 1991.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231
5) Doh Chull Shin and Peter McDonough. 1999. “The Dynamics of Popular Reactions to Democratization in Korea.” Journal of Public Policy 19:1, 1-32
6) Andreas Schedler. 1998. “What is Democratic Consolidation?” Journal of Democracy 9:2, 99
7) Robert A. Dahl. ed. 1966. Political Oppositions in Western Democracies.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Robert A. Dahl. 1971. Polyarchies: Participation and Opposit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8) Richard Gunther, P. Nikiforos Diamandouros, and Hans-Jürgen Puhle. eds. 1995. The Politics of Democratic Consolidation: Southern Europe in Comparative Perspectiv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0
9) 박만규. 2003. “신군부의 광주항쟁 지압과 미국문제.” 『민주주의와 인권』 3권 1호, 228
10) 한겨레 2021/11/23,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20468.html
11) 김하야나. 2020. “묘지에서 몸으로 만드는 민주주의: 군사독재와 싸우는 광주항쟁의 제사 액티비즘.” 전남대 5·18연구소. 『5·18과 이후: 발생, 감응, 확장』. 전남대학교 출판문화원. 137-169; 나간채. 1997. “광주지역 5월운동조직의 형성과 발전.” 나간채(엮음). 『광주민중항쟁과 5월운동 연구』.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117-162
12) 나간채. 2012. 『한국의 5월운동』. 파주: 한울, 302-308
13) 김용철·최은정·박의경. 2020. “신문사설에 나타난 5·18담론의 변화양상과 동학.” 『문화와 정치』 9권 3호, 28-29
14) 권영기·김동현·지해범. 1989. “다큐멘터리: 군 3개 사단을 투입하라.” 『월간조선』 12월호. 104-130; 김성익. 1992. “전두환, 역사를 위한 육성증언: 6·29 전야의 고백.” 『월간조선』 1월호. 368-377
15) 김재홍. 1993. 『문민시대의 군부와 권력』. 서울: 나남, 268-269
16) 당시 군부에 대한 전두환의 인식은 6월 27일 그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군대가 나오면 항상 쿠데타 위험이 있어.” 김성익. 1992. “전두환, 역사를 위한 육성증언: 6·29 전야의 고백.” 『월간조선』 1월호, 386
17) 돈 오버도퍼. 1998. 『두개의 코리아』. 서울: 중앙일보사, 167
18) 키미야 타다시. 1997. “비교적 시각에서 본 5·18: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심화.” 『한국정치학회 5·18 학술심포지움』, 14-17
19) 김영삼. 2001.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상』. 서울: 조선일보사, 92
20) 五島隆夫. 1987. 『제5공화국, 그 군부인맥』. 서울: 지양사, 239-242; 김대중. 2010. 『김대중 자서전 1』. 서울: 삼인, 534
21) 공보처. 1997. 『변화와 개혁: 김영삼 정부 국정5년 자료집 1』, 29
22) 위의 자료집, 26
23) 한국사회과학자료원. 2007. 『한국종합사회조사, 2005 코드북』, 4
23) 한국사회과학자료원. 2007. 『한국종합사회조사, 2005 코드북』, 4
24) 김용철·조영호. 2022. “5·18 기억투쟁과 한국인의 정치적 태도.” 『민주주의와 인권』 22권 3호, 5-40
25) 이 글의 [그림 1-1], [그림 1-2], [그림 1-3]은 위 논문(김용철·조영호 2022)에서 가져왔으며, 기술통계 분석결과는 카이제곱 검정(<0.01 수준)을 통과했으며, 잠재적 변수들을 포함한 회귀분석에서도 유의미한 결과를 보였다.
26) Seymour Lipset and Stein Rokkan. 1967. Party Systems and Voter Alignments: Cross-national Perspectives. New York, NY: The Free Press
27) SJames Fowler. 1999. “The United States and South Korean Democratization.” Political Science Quarterly 114:2, 265-288; 박원곤. 2011. “5·18 광주 민주화 항쟁과 미국의 대응.” 『한국정치학회보』 45집 5호, 125-145
28) 정기영. 2013. “재야의 정치세력화와 민주화 투쟁.” 류상영·김삼웅·심지연(편저). 『김대중과 한국 야당사』. 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5-235
29) 김용철. 2020.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한국 민주주의: 좋은 민주주의인가?” 『기억과 전망』 42호, 58-96
30) Ronald Inglehart and Christian Welzel. 2005. Modernization, Cultural Change, and Democrac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월간 <복지동향> 2023년 5월호(제2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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