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5 2015-11-10   1523

[복지칼럼] 흙수저를 물어도 포기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자

흙수저를 물어도 포기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자

남기철 l 동덕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 2015년 10월~12월까지 남기철 교수의 칼럼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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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기본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 다수의 뜻에 따라 권력의 발휘와 정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기본적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민주국가란 단지 정치적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공정한 기회를 가지고 신분적 억압 없이 노력과 성취에 따라 계층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구조 역시 갖추어야 한다. 민주적 정치도 마찬가지로 경제적 사회적 전제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취약해지고 있다는 지적은 여기저기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안타깝게도 개천에서 용이 나기에는 우리나라의 수질은 너무 나빠진 듯하다.

요즘 금수저, 흙수저가 회자되곤 한다. 단어만 들어도 “금수저를 물고 났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쉽게 연상이 된다. 예전부터 있던 말이겠지만 최근 젊은 층에서 연예인 2세가 연예계에 쉽게(?) 데뷔하는 것이 능력이냐 아니면 부모의 후광이냐는 점을 놓고 수저의 비유를 통해 논란을 벌이면서 이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결국은 계층의 고착화에 대한 인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SNS에서 유행하는 흙수저 빙고라는 해학적인 내용도 있다. “집 화장실에 물을 받는 다라이(?)가 있다”, “냉동실에는 비닐 안에 든 뭔가가 많다”, “부모님이 건강검진을 받지 않으신다”, “식탁 유리 아래 식탁보가 비닐로 되어 있다”, “부모님이 취미생활이 없으시다”, “1년에 신발 한두개를 번갈아 신는다” 등의 25개 문장이 포함된 가로세로 5*5의 격자에서 빙고게임처럼 한 줄이 모두 해당되면 ‘흙수저 인증’이라는 것이다. 서민층은 스스로 이 중 내가 몇 가지에 해당하는지, 혹은 빙고를 외쳐야 하는 상황은 아닌지 살펴보게 만들곤 한다. 이미 흙수저 빙고의 version도 여러 가지가 돌아다니는 것 같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심지어 놋수저, 플라스틱 수저와 아울러 흙수저를 경제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금수저는 자산 20억 원 이상 혹은 가구 연수입 2억 원 이상, 은수저는 자산 10억 원 이상 또는 가구 연수입 8000만 원 이상, 동수저는 자산 5억 원 이상 또는 가구 연수입 5,500만 원 이상이다. 그리고 흙수저는 자산 5,000만 원 이하와 가구 연수입 2,000만 원 이하를 지칭한다. 이는 물론 SNS에서 떠도는 임의적인 구분이다. 당연히 그 금액 기준에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좋은 기회는 좋은 수저를 물고 있어야만 찾아오는 것이라 한다. 흙수저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SNS에 떠도는 흙수저론은 갈수록 서민층이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은 점점 불가능해진다는 자조 섞인 현실진단이다. 피케티가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아지면서 소수 유산계층만이 부를 축적해가고 있다고 역설한 주장과 본질적으로 같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보다 흙수저론이 더 생생하게 다가옴은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 시대 청년들의 아픔과 왜곡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 계층 고착화에 대한 청년층의 풍자나 해학은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물론 어떤 사회에서건 원하는 성취가 어려운 청년들은 불만을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는 실제 문제의 심각성과는 별도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당한 지적이 아니라면 재미도 없고 널리 유행하지도 않는다. 시민의 수준은 높다. 정확한 혹은 필요한 문제의식이고 또 공감하는 정도가 크니 유행한다. 흙수저 입에 물고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고, 불평등 구조가 너무 강고하다도 느끼고들 있다. 사회의 전반적인 체계나 질서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수준의 불공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 사회가 얼마나 발전가능성이 있을까? 게다가 기성세대, 특히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가 이 불만을 치기어린 것으로 혹은 불온한 것으로 여긴다면 변화의 기대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인내의 한계나 임계점이라는 단어가 새삼 무섭게 느껴지는 요즈음이기도 하다.

사회복지와 유사한 말로 사회보장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두 용어의 차이가 부각될 수도 있겠지만 상식적 수준에서는 유사한 내용을 지칭하며 사용된다. 특히 현 정부는 사회보장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면서 사회복지라는 말을 대신해 사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장’이라는 말에는 ‘방위’ ‘지킨다’는 의미가 있는 만큼 그 사회의 심각한 불안요소를 제어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임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보장은 체제유지 혹은 체제수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계층구조의 고착화, 사회 역동성의 상실은 체제를 직접적으로 위협할만한 요소이다. 그리고 사회보장은 이를 막아야 할 내용과 방향을 지녀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작금의 상황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최근의 정책기조 속에서 불평등의 심화와 고착화가 예견 불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었음에도 사회보장은 무력하기만 하다. 사회구성원 다수의 인식에 부적절하게 과도한 불평등이 창궐해 있다고 느껴질 때, 사회보장은 적극적으로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사회보장을 강화하라는 주장을 위험요소로 여기고 있다. 사회보장에 대해 효율성과 투명성을 저해하는 도덕적 해이의 연속선상에서 조망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한때 벤처정신이 강조되던 시기가 있었다. 벤처기업 열풍이 불던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이다. 당시에 벤처정신을 강조하고 또 성공사례를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청년들 다수가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시도보다 안정된 고수익의 직업을 찾는데만 천착한다는 개탄도 꽤나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국의 수재는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데 몰두하고 한국의 수재는 의사가 되는데 몰두한다”는 기사를 보았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의 청년들이 아예 더 극단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좋은(?) 자리에 진출하거나 성취를 이루려면 수저를 잘 물고나야만 한다는, 흙수저를 물고서는 모험도, 도전도, 심지어 안일하게 안주하려는 고수익 직업을 추구하는 것까지도 모두 불가능하다는 냉소를 보내고 있다. 훨씬 더 나쁜 상황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대물림(상속)은 고유한 내재적 특징이기도 하다. 원가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세대에게 차별적인 차원으로 작동하는 것을 막아내는 기계적 절대적 평등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불평등의 정도는 사회적 공정성이라는 시민적 합의의 수준 내에 있어야 한다. 불평등의 정도는 절대 공정함이라는 사회적 합의의 임계치를 넘어서지 않도록 해야 하고, 사회보장은 여기서 적극적 역할을 부여받아야 한다. 가장 마지막 순간에야 겨우 굶어죽지 않도록 자선을 제도화하여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도록 ‘사회적 배제’에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 흙수저를 물고 난 많은 사람이 공정한 출발을 할 수 있고, 교육과 직업준비의 과정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비용이 필요할 것이다. 불로소득에 해당하는 지대성격의 이득에 대해서 세금을 통한 규제와 환수가 있어야 하고, 이 환수금은 사회구성원의 고른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활동에 사용되어야 한다. 이 공익적 기여에 대해 부자는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나면서는 수저가 바뀌는 일도 더 많아져야 한다. 사회보장 체계가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집행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다. 제정신이라면 현재 상황은 중앙정부의 사회보장 주무부처가 지방정부의 복지사업에 대해 유사중복이라고 트집 잡고 앉아있으며 허비할 시간은 없다.

우리나라가 개천에서 용이 계속 나오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공정성의 기초가 되는 적절한 사회보장이 그나마 우리사회 청년들이 아직도 패기 있는 시도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작은 토대로 작동하기를 기대한다. 흙수저를 물고 대한민국에 나왔지만 자포자기의 냉소보다는 개척과 노력이 어색하지 않은 미래를 꿈꾸어보자.

월간 <복지동향> 2015년 11월호(제2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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