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2 2012-03-15   1319

[동향3] 안에서 밖으로 시야를 확장하는 패러다임의 변화, 노동자 건강권 관련

임준|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

 

 

서.

노동자건강권운동의 역사를 문송면 군 사망을 계기로 형성된 노동안전보건단체의 태동으로부터 설명한다면 올해가 25년째 되는 해다. 노동자건강권운동은 87년 민주화투쟁과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의 성장을 배경으로 발전하였다. 전국 각 지역에서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이 만들어졌고, 원진레이온투쟁을 계기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성장을 거듭하던 노동자건강권운동은 1997년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부침을 겪게 된다. 노동자건강권운동 진영은 경제위기를 빌미로 촉발된 신자유주의 규제완화에 맞서기 위하여 산재추방운동연합을 만들어 대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이상관투쟁을 계기로 운동 역량의 한계 및 내부 의견의 차이만을 확인한 채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 결과 산재추방운동연합을 해체하는 아픔을 경험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새로운 조직이 등장하고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는 노력이 꾸준하게 있어 왔다.

 

이와 같은 노동자건강권운동의 역사 속에서 많은 선배활동가와 노동조합 활동가, 그리고 전문가들은 노동안전보건단체에 참여하면서 산재대책활동, 교육 및 상담, 산업안전보건법 및 산재보상법 개정투쟁 등 헌신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등장하지 못하고 있고, 더욱이 노동의제에서조차도 중심적인 과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활동의 성과가 축적되지 못하고 많은 활동가와 전문가들이 운동에서 떨어져나가는 일들이 발생해왔다. 개인적 전망으로 인하여 이탈한 경우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노동자건강권운동이 개인의 삶과 전망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면서 다른 운동 영역으로 옮겨가거나 운동의 전망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안정적인 재정 구조와 취약한 회원 기반 하에서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은 당연하게도 상근활동가들의 재생산 구조를 확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상근활동가들의 역량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직의 발전적 전망을 내오지 못하고 현실에 닥친 사업 또는 일정한 수익 사업에 많은 역량을 쏟을 수밖에 없었고 회원 구조가 더 취약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조직이 상근활동가를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하고 있고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안이 모색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불안전한 조직 구조는 더 악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안전보건운동인가, 노동자건강권운동인가?

노동자건강권운동의 전망을 논의하려면 우선적으로 노동자건강권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과거에 주요하게 사용해온 노동안전보건운동의 개념 대신에 노동자건강권운동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은 노동안전보건운동과 노동자건강권운동을 명확한 구분 없이 필요에 따라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개념을 정의를 어떻게 하고, 그에 따라 운동의 전망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조직의 발전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혼재 되어 있는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조직발전 방향의 논의에 앞서서 전제되어야 한다.

 

본고에서는 노동안전보건운동을 과거 특정 유해 인자별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었던 운동으로 한정하여 정의하고자 한다. 이때의 노동안전보건운동은 제조업, 건설업 등 전통적으로 산재가 많이 발생하는 사업장에서 산재 예방을 위해 만들어졌던 산업안전보건법과 그 체계의 대당의 개념으로서 정의될 수 있는데, 해당 사업장의 노동자, 그리고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활동가와 전문가 그룹이 전개하였던 제반 안전보건활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 정의에 기초할 때 노동안전보건운동은 기존의 산업안전보건법이 근거하고 있는 산업적 노동관계적 측면에 근거한 활동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즉, 업종으로는 제조업과 건설업이 중심일 수밖에 없고, 고용 측면에서는 직접적인 고용관계가 관심 대상이 되며, 산업안전보건법의 책임 권한 관계를 현재의 취약한 안전보건체계에서도 비교적 손쉽게 물을 수 있는 중규모 이상의 사업장이 주요 대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유해인자별 안전보건활동이 중심적인 과제로 부각된다. 운동 주체 측면에서도 노동조합과 이를 지원하는 활동가와 전문가 등 노동안전보건단체의 중심성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노동자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포괄적 문제에 대하여 관심과 활동을 확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제기된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담론체계와 활동내용, 그리고 활동주체 면에서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노동안전보건운동과 달리 산업안전보건법 및 그 체계의 대당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고 악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대당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확장된 운동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담론적 규정 하에서 노동자건강권운동은 전통적인 노동안전보건운동과 달리 전체 노동자의 건강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중에서 건강문제의 취약 집단인 비정규노동, 이주노동, 여성노동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노동안전보건운동이 전통적인 안전보건의 문제를 중심적으로 고민했다면,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노동자의 건강 문제가 산재, 직업병 뿐 아니라 환경이나 여성, 인권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운동의 범위와 주제도 확장된다. 즉,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노동자 건강의 결정 요인이 사회경제적 요인부터 유해 물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영역에 거쳐 있다는 점에서 직업안전보건의 문제만을 갖고 노동자 건강 문제를 접근하는 것이 협소한 시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운동의 주체 측면에서도 노동자건강권운동은 노동자 또는 일하는 사람 전체가 건강권의 실제적인 권리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 규정을 한다고 해서 기존의 노동안전보건운동과 구별되는 노동자건강권운동이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노동안전보건단체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활동을 수행한 바가 있지만, 현실 속에서 구현되지는 못하였다. 일부 지역사업 및 정책과 연대 사업 등을 통해 노동자건강권운동의 문제의식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실제로는 과거 노동안전보건운동의 패러다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렇게 노동자건강권운동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에는 활동 방향의 전환에 따른 조직의 발전 전망을 구체적으로 만들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이 대두되었다.

 

노동자건강권운동에 어울리는 조직의 모습은?

앞장의 정의에 기초하면 노동자건강권운동은 전통적인 산재직업병문제에 대한 대책활동, 교육 및 상담, 정책 활동 뿐 아니라 지역 의제, 환경 및 녹색 의제, 인권 의제 등의 활동을 포괄해야 한다. 또한, 노동안전보건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활동 내용 뿐 아니라 조직 체계 등 활동 방식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기존의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유지하면서도 미조직노동자, 비정규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의 건강 문제에 강조점을 두고 그들 또는 그들의 조직을 지원하는 데에 역량을 투여할 수 있도록 모양새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단체나 조직도 그러한 방향으로 체계를 변화하거나 활동방식을 고민하지는 못하였다.

 

기존의 노동안전보건단체만 보더라도 노동자건강권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안전보건 관련 전문가와 활동가, 산재노동자, 노동조합 간부 및 활동가 등으로 회원 구조가 제한될 필요가 없다. 가급적 참여하는 회원의 폭이 넓어져야 한다. 직접적인 회원 범위의 확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면 노동자건강 문제와 연동되어 있는 환경, 인권 등을 의제로 활동하는 단체들과 연대의 수준을 높이고 간접적 방식으로 회원의 범위를 넓혀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물론, 과거에 비해 다른 부문 단체들과 연대활동의 폭이 상당한 수준으로 넓어지긴 하였지만, 실질적인 회원 구조나 연대 활동의 조직적 구조를 넓히는 데까지는 문제의식을 진전시키지 못하였다. 그 결과 당위적 차원에서 비정규노동, 환경, 이주, 지역, 인권 단체 등과 연대를 이야기하고 특정 대책 활동을 통해 연대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노동자 또는 일하는 사람의 건강권 문제를 공동의 의제로 올려놓고 수평적이고 지속적인 연대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이 노동자건강권운동의 패러다임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기존의 회원 구조를 탈피하고 조직 활동의 강조점을 넓히기 위한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물론, 이를 현실화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인적 구성 자체가 노동조합 활동가와 상근활동가, 그리고 안전보건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개별 단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운동에서 활동의 방향을 바꾸는 문제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추동하기가 쉽지 않다.

 

현실적 대안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단체나 지역부터 노동자 또는 일하는 사람 전체의 건강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환경, 생태, 인권 단체 등과 연대 수준을 높여 공동의 활동을 조직해나가는 것이다. 기존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면서 지역별로 노동자건강(환경)네트워크 등과 같은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조직은 단일한 조직적 틀을 갖추기 보다는 지역별 운영구조를 갖고 네트워크 조직의 합의와 요구에 기초하여 공동 활동이 가능하도록 조직을 운용할 필요가 있다. 공동의 정책 기능과 선전(회지 발간 등) 기능을 담당하는 조직만 별도로 두고 각 단체 예산의 10%를 공동 기금으로 조성하여 활동하는 조직을 상정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의 결과물에 따라 공동 활동의 수준 및 조직의 결합력을 높여나갈 수 있을 것이고 조직 단위도 세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

우선적으로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은 기존의 노동안전보건운동의 평가에 기초하여 노동자건강권운동이 제기되는 문제의식과 실제적 의미를 공유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 노동자건강권운동이 제안된 배경과 의미, 그리고 현실 운동에서 어떠한 실천적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이에 기초하여 가능한 지역부터 노동자 또는 일하는 사람의 건강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과 조직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지금까지 연대 활동의 경험이 있는 조직부터 노동자건강권의 문제의식을 확장시켜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노동안전보건단체들 간에 문제의식을 공유해나가는 작업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다만,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을 단일 조직으로 묶어내는 작업은 현실의 역량 및 조건 속에서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기존의 담론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지양되어야 한다. 가능한 지역부터 노동자건강(환경)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조직 활동의 방향이자 새로운 운동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월간 <복지동향> 2012년 03월호(제1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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