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 웰스가 남긴 미완성의 필름 조각들 중에 브라질 어부들의 이야기 한 토막이 끼여있다. 반세기도 더 이전의 일이다. 작은 어촌의 어부 네 사람은 정년이 되어 어선을 탈 수 없게 되었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본능에 닿아있는 육체는 제도적 나이에 관계없이 현실을 참을 수 없었다. 나무를 잘라 뗏목을 만들고, 가족과 이웃의 근심어린 눈길에 밀리면서 항해를 시작했다. 대통령을 만나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이 울분에 찬 어부들의 노후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항해는 험난했다. 리우데자네이로까지 무려 수천 킬로미터에 달했다. 목숨을 건 항해는 그 목표도 과정도 모두 생존 그 자체였다. 사소한 여유를 가질 겨를 없이 강행한 여정은 한 달 이상 걸렸다. 그 사이 소문이 먼저 수도에 닿았다. 뒤이어 뗏목이 무사히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영웅이 되어 있었다. 촬영 인파를 거쳐 대통령을 만나고, 작은 소망을 말했다. 그리고 삶을 다시 음미해볼 만큼 충분한 세월이 흐른 뒤, 그들은 웰스의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요"
어부들이 원했던 것은 삶이었다. 최소한의 삶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그것을 다른 용어를 사용하여 말하면 사회보장이 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연령, 능력, 경제력, 기회의 박탈, 편견 그리고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를 그렇게 부른다. 어부들의 분노는 베버리지가 토인비 홀에서 얻은 깨달음보다 근원적인 것이며, 그들 뗏목의 여정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보다 현실적이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브라질에서 있었던 일을, 그 세기의 중반에 미국의 장인이 필름에 재구성하고, 우리는 21세기에 감상을 하지만, 뭔가 "변한 게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심정이나 이 심정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존재한다. 바로 그것은 사회보장 운동의 실존적 근거이기도 하다.
사회보장, 다시 말해 우리가 바라는 최소한의 삶의 확보는 투쟁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투쟁이 먹혀들어 그 반작용으로 정부와 의회가 움직여야 가능하다. 버릇처럼 나누듯, 사회권에 비해 자유권은 투쟁만으로 쟁취할 수 있다. 싸움에 이기는 자체로, 부당한 힘에 맞서는 그것으로 어느 정도 현상적 자유는 획득된다. 하지만 삶을 보장해주는 권리는 그야말로 보장해주어야 삶이 살아난다. 그래서 사회권이고, 그래서 사회보장이고, 그래서 돈이며, 인간의 존엄과 가치며, 인간다운 생활이며, 행복추구권이다.
사회보장은 시민에겐 권리이고 국가엔 의무다. 그리고 모두에겐 희망이다. 국가는 그 의무 이행의 시작을 헌법전에 사회권 목록을 빠뜨리지 않는 것으로 삼는다. 따라서 우리 헌법에도 사회보장을 약속하는 사회권적 기본권이 나열되어 있다. 하나도 소홀히 취급하지 않고 망라하고 있다. 누구의 말처럼 복음서가 무색할 정도로 화려하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민주법치국가를 표방하는 이 나라에서 사회보장의 전망과 관련하여 여전히 답답한 걸림돌로 와 닿는 것들이 있다. 우선 첫 번째가 헌법의 인식이다. 민주국가에선 어차피 헌법이든 법률이든 법에 의해 제도화되지 않으면 구체적 복지는 없다. 따라서 헌법에 사회권 목록을 장식하는 것이 그 첫걸음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이 그야말로 국가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장식에 그쳐서는 곤란한 것이다.
동독 출신의 법철학자 헤르만 클레너가 한 말은 이렇다. "레스토랑에 앉아 메뉴만 읽는다고 배가 불러지는가" 헌법의 사회권 목록은 고급 식당임을 알려주는 훌륭한 메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메뉴에 따라 음식이 식탁 위에 차려지지 않으면 우리에겐 별 의미가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호주머니에 그 음식값을 지불할 돈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럴 경우 헌법의 목록은 정말 자본가들을 위한 장식과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돈을 가진 자들을 위한 품위와 허례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분위기와 인식도 함께 문제다. 헌법학에서 말하는 사회권이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20세기에서 사회권이 논의되었던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생래적 모순과 갈등이 현실화되고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독점자본세력이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제국주의가 발호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가진 자의 절제가 미덕으로 발휘되지 못한 데 가지지 못한 자의 자존이 여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보장을 의미하는 사회권이 헌법전에 빠질 수 없는 메뉴가 된 것은, 어느 국가든 사회주의적 이념을 헌법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시대적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에선 사회주의 색깔 논쟁이 시시때때로 횡행한다. 정치가도 언론도 사법부도 함께 한다. 이런 유형의 시대착오적 소란은 은근히 사회보장의 내일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헌법을 다루는 법학자도 비슷하다. 사회보장에 적극적 관심없는 정부가 헌법의 규정을 규범으로 느끼지 않고 메뉴 ― 언제쯤 저 음식을 만들지? ―로만 감상하듯, 헌법학을 실천적 학문으로 인식하지 않는 철저함이 결여된 학자는 사회권에 얽힌 관념과 언어적 유희에만 사로잡히고 만다. 수험생들을 위한 설명만 하고 앉아 있다. 헌법의 한 줄이 살아서 움직이게 해야 한다. 그 실천적 방안을 세우는 데 적극 나서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분명한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실은 뗏목은 엔진이 없어도 흘러는 간다. 그나마 통나무를 묶은 끈을 보호해주고 방향을 살펴주는 것이 겨우 만든 몇 개의 법률이다. 그렇다면 뗏목 위에 올라 앉은 우리가 안전한 기관선으로 옮겨 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법률이 더 필요한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월간 <복지동향> 2001년 10월호(제36호)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