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현(건강세상네트워크 사무국장)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건강보험을 정착시킨 나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의료보험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의료보험이 전국민 의료보험을 달성하는데 120년 이상이 소요된 것에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1977년 직장의료보험 실시를 시작으로 불과 12년만인 1989년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을 정착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은 의료보장의 중요한 근간으로서 자리매김 하였으나 건강보험의 내용과 질에 있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보험의 낮은 보장성과 높은 개인부담,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존재, 공공의료의 취약, 의료서비스 질에 대한 통제 미비, 비용유발적인 지불보상 방식 등은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을 위협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건강보험은 국가가 책임지는 제도이며 실질적인 의료안전망의 기능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현주소는 아직 그러한 수준과는 괴리가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차기 정부는 신자유주의적인 정책기조를 견지하고 있으며, 보건의료분야와 관련해서는 ‘시장원리’에 근간을 둔 정책대안들이 공공연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아직 공식화 되지는 않았으나 ‘건강보험의 분리 및 경쟁체계 도입’, ‘대체영 민영의료보험 도입’, ‘의료기관의 자율계약제’ 등 공공부문의 시장주도권을 강화하거나 경쟁체계를 골자로 하는 정책도입 들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건강보험의 보편적 원리를 훼손할 여지가 크며 무엇보다 건강불평등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려가 됩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단일보험체계를 채택하고 있고 균등한 급여혜택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보험에서의 시장원리 도입은 건강보험의 운영주체인 보험자를 여러 개로 분리하고 상호 경쟁하는 체계를 갖추자는 것인데, 이러한 구조 하에서는 보험자간 급여수준의 차이를 방지하기 어렵고 따라서 건강보험 가입자간의 급여혜택도 불균등하게 제공될 것입니다. 또한 민영의료보험은 구매력 있는 국민들만의 소유물이 될 것이며 보험사와 의료기관과의 계약이 허용될 경우 우리나라의 건강보장체계는 시장주도형으로 재편될 것입니다. 민영의료보험은 수익성을 우선으로 하고 있고 선별적으로 가입자를 선정하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결코 유리한 제도가 아닙니다. 민영의료보험이 주를 이루는 미국의 경우 공·사영역을 불문하고 전국민의 14%가 건강보장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으며 국민들의 건강수준도 경제선진국 가운데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장중심의 보건의료체계 개편이 오히려 건강불평등의 심화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비용절감만을 목표로 한 보건의료체계 개혁은 이미 서구국가들 중심으로 진행된 바 있으며, 차기정부의 개혁방안도 선험국의 경우와 거의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건의료체계 개혁에서 비용절감은 필요요소이지만 충분요소는 아니라는 점과 시장원리에 입각한 개혁정책이 중앙정부의 약화, 서비스의 단절, 불형평성을 초래하였다고 평가한 보고들도 있어, 비용절감만을 목표로 하는 개혁정책이 능사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건강보험은 국민들에게 신뢰받는 제도이어야 하며, 그 신뢰는 건강보험의 기본 원리에 충실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결과라고 판단합니다. 의료보장의 보편성의 원리에 입각한 공공부문의 강화만이 건강보험의 제 기능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차기정부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정책대안들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건강보장의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의료보장은 건강보험과 의료급여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제도의 비합리성으로 인해 상당수의 국민들이 건강보장의 혜택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건강보험 영역에서는 지역가입자 중의 25%가 건강보험 체납가구이며, 이들 중 2/3이상은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생계형 체납가구입니다. 이 외 3만여명에 이르는 주민등록말소자도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료급여 영역에서는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 이하임에도 불구하고 부양의무자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료이용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빈곤층이며 의료이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비합리성과 경제적인 이유로 의료이용을 못한다는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건강보장은 국민들의 경제수준과 관계없이 차별 없는 혜택이 제공되었을 때 그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으로 차기 정부는 보건의료제도 개혁의 최우선순위를 사각지대 해소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건강보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보장성은 현재 64% 수준으로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상당히 낮은 수준입니다. 보장성의 영역도 입원보다는 외래에 치중되어 있어 암 등 중증질환에 걸렸을 때 국민들이 많은 의료비를 부담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질병으로 인한 가계 부담은 저소득층에게 더욱 심각한 문제로, 이러한 보장수준의 취약성은 계층간 건강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주된 요인이 됩니다. 따라서 급여의 범위를 지금보다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와 함께 가구 소비지출에서 의료비가 일정액 이상을 초과하지 않도록 비급여를 포함한 전체 의료비의 지출 상한선을 설정하고 상한선 초과시 그 비용을 보상해주는 체계도 같이 작동해야 합니다. 건강보험의 보장성 개선 없이 비용절감 중심의 정책만을 선호 한다면 이로 인해 더 큰 사회적 비용을 국민들이 부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셋째, 의료의 질 중심의 성과 관리를 중시해야 합니다. 건강보험은 제한된 재원으로 운영되는 제도이고, 일정부분 비용통제나 관리가 필요한 영역임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효율적인 운영방식을 채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료기관에 대한 보상체계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과 같이 진료행위에 대한 평가나 적정성에 대한 판단 없이 건강보험에서 보상해주는 방식은 지양해야 합니다. 과연 특정 진료행위가 의료의 질을 제대로 담보하고 있는지를 판단하고, 이를 근거로 보상수준을 차등화 시키는 것이 올바른 방식입니다. 국민들은 진료행위에 대한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건강보험에서 불필요한 비용 발생은 의사 및 의료기관의 잘못된 행태에 의해 주로 발생하게 됩니다. 의사 및 의료기관의 진료행태를 의료의 질과 연계시키고, 이에 대한 평가와 보상수준을 결정하는 방식 등으로 건강보험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은 국민들의 의료보장을 위한 유일한 제도적 장치입니다. 이 제도가 비용절감만을 우선시하는 잘못된 경제 논리에 의해 훼손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차기 정부는 건강보험의 진정한 개혁방안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숙고해야할 것입니다.
월간 <복지동향> 2008년 02월호(제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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