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 활동과 우리의 인권 미래
이숙진(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 교수)
들어가는 말
TV가 요란하다. 도대체 해결방법을 짐작할 수 없는 문제인데 마이크를 잡은 당사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인권위에 진정하겠다”고. 혹자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인권보호의 최후 보루’라고 한다. 2001년 4월 30일, 한나라당이 반대표를 던진 가운데 3표 차이로 국가인권위원회법이 통과되었다. 인권위가 업무를 시작한 2001년 11월, 공권력 앞에서 움츠릴 수 밖에 없었던 국민들은 이제 경찰서나 교도소안에서의 인권침해를 호소할 수 있었고, 인권 사각지대였던 사회복지시설 생활자의 인권 상황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개선할 통로를 갖게 되었으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차별시정과 평등을 소리내어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국민들은 인권위가 ‘인권의 옹호자’이자 ‘인권의 감시자’가 되어줄 것을 기대했다. 그간 우리 국민의 인권의식은 인권위에 접수된 3만5천여건의 진정 건수만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인권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인권옹호자이자 감시자로서의 인권위에 대한 기대는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출범 7년을 갓넘긴 인권위는 이러한 기대에 어떻게 응답하여야 할까. 최근 조직 축소 요구를 받은 국가인권위원회의 활동을 돌아보고 성과를 짚어봄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인권침해차별 행위에 대한 조사와 구제인권위의 여러 업무들 중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인권침해와 차별행위에 대해 국민이 진정을 하면 이를 조사하고 피해를 구제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진정’은 피해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 단체’에 의한 제3자 진정도 가능한데 주로 문서나 전화 등의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다. 2008년 12월까지 총 35,163건의 진정이 접수되었고 이 가운데 인권침해사건이 27,993건, 차별행위사건이 5,380건이었다. 어떤 기관에서의 인권침해사건 비중이 가장 높았을까. 구금시설이 11,929건이 접수되어 42.6%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다음은 경찰이 6,198건으로 많았으며 기타국가기관, 보호시설, 지방자치단체, 검찰의 순으로 나타났다. 21개 차별유형 중에 가장 빈번하게 차별이 일어난다고 접수된 유형은 장애에 근거한 차별이 1,222건으로 가장 많았다.
인권위의 진정사건 접수 현황을 살펴보면 인권침해 사건이 차별행위 사건에 비해 훨씬 많은 비중임을 알 수 있다. 인권침해 사건이 많은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자유권적 기본권을 보장하는데 취약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확고히 정착된 사회일수록, 자유권적 기본권 보장이 철저한 사회일수록,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는 줄어드는 것이 통상적이다. 호주 등 인권위원회를 설치하고 있는 상당수 국가들은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보다는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인차별, 연령차별 등의 각종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차별행위를 조사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하고 있다. 즉 사회시스템과 재정 등에 의해 자유권적 기본권이 일정수준에 도달하면 인권의식의 발전은 평등권 침해행위 즉 차별행위에 집중되고 이에 대한 진정이 보다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차별을 이해하고 이를 차별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비교대상을 필요로 하고 직접차별, 간접차별, 역차별 등의 다양한 차별형태를 고려해야 하는 등 기본권적 침해사건보다는 판단이 훨씬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차별사건은 개인의 피해구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상황에 대한 적용가능성 때문에 단1건이라도 차별이라고 판단되는 사건이 지니는 사회적 파급력이 훨씬 크다. 때문에 캐나다, 영국, 호주 등 인권위원회는 무엇이 차별인지, 차별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은 무엇인지, 차별인 경우 이를 조정하거나 조정에 실패할 경우 법률적 절차를 어떻게 지원할 지 등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인권발전국들의 모습이다.
우리 국가인권위원회의 사건접수 현황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인권 발전 수준을 짐작해보면 여전히 자유권적 기본권을 보장하고 보호해야하는 업무를 게을리 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여전히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우려해야 하며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통신의 자유 등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권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고려해야만 하는 것은 평등권 침해에 대한 국민감수성이 점차 높아지면서 차별행위에 대한 진정이 증가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이후 장애차별 진정사건이 보다 활발해지고 있음을 감안할 때 차별행위판단에 대한 인권위의 역할과 업무는 보다 가중될 수밖에 없다. 국가인권위법이 21개 유형에 대한 차별행위를 평등권 침해로 규정하고 있고 이 각각의 유형이 어떤 경우에, 어떤 범주에서, 어떤 기준을 충족시킬 때 차별인지에 대한 세부적인 기준들에 대한 요구가 점차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살색’ 논쟁으로부터 시작된 차별 감수성 제고와 권고적 효력
인권침해와 차별행위에 대한 진정은 그러한 사건들이 인권을 침해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감수성, 민감성인데 인권위의 몇몇 결정들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인권감수성, 인권민감성을 높이는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
2002년 7월,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몇몇 외국인들을 포함한 진정인은 크레파스와 수채물감의 특정색을 ‘살색’이라고 명명한 것은 다른 피부색에 대한 차별행위를 조장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다. 이미 체류 외국인이 140만명을 넘어선 우리사회에서 ‘살색’은 별다른 의식없이 관행처럼 사용되었던 것이다. ‘살색’크레파스 사건은 일상생활 깊숙히 뿌리내린 차별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고 인권위는 기술표준원으로 하여금 ‘살색’이라는 색명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차별’에 대한 화두는 양심적 병역거부 수용자들에게 종교집회를 허용하고, 학생이 아닌 청소년이 공공시설 이용시 할인요금 적용에서 배제되는 것을 개선하도록 하고, 서울 YMCA 여성 회원들에게 총회의결권을 허용하도록 권고했으며, 교원임용시 응시연령을 40세로 제한한 것은 연령차별이므로 이를 폐지하라고 권고했고, 부부교수라는 이유로 초빙교수 임용에서 배제한 것은 가족상황을 이유로한 고용차별이라는 의견을 표명했으며, 경찰․소방․교정직 등의 공무원채용시 키와 몸무게를 제한하는 것은 신체조건에 의한 평등권을 침해하므로 이를 개선하도록 권고하고, 두발 단속시 교사가 학생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자르는 일은 인권침해이며, 남녀를 구별하지 않는 방법으로 출석부 번호를 부여하도록 하는 권고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결정들이 차별로 판단되기까지에는 상당한 논란이 수반되었고 인권위가 차별이라고 개선을 권고한 사건들이 모두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인권위는 인권침해나 차별행위를 확인하고도 이를 구제할 수 있는 법적인 강제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권고를 통해 이를 이행하도록 하고 있는데 권고수용율이 비교적 높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력없는 권고의 실효성을 문제삼는 비판적 입장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권위는 사법기관이 아니라 인권의 관점에서 사건에 대한 조사와 조정, 권고를 하는 독립적인 국가기구이다. 인권위가 법률적 강제를 담보한다면 피해구제가 용이할 수는 있으나 차별 판단은 기존의 법률적 테두리에 갇혀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권은 법률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넓은 개념이다. 즉 모든 인권사안이 법률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인권침해와 차별행위를 인식하는 것은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인권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권위의 판단은 법률이나 판례보다 훨씬 전향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인권과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것은 엄격한 잣대보다는 성찰을 수반할 수 있는 유연한 잣대가 훨씬 효과적이다. 인권위의 권고적 효력은 우리 사회의 인권감수성을 높이고 있으며 이는 인권위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감수성 향상이 인권침해와 차별행위를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점을 기억할 때 인권위의 이러한 기능은 보다 확대, 강화될 필요가 있다.
정책적 기능의 확대 : 인권침해 악법이나 정책에 대한 폐지 혹은 개선 권고
인권을 침해하거나 차별을 조장할 수 있는 법이나 정책에 대한 인권위의 권고 또는 의견표명은 굵직한 외교문제에서부터 일상적 생활의 문제까지 다양했다. 2002년 테러방지법을 제정하려는 시도에 대해 헌법과 국제인권법에 위반됨을 적시하며 반대의견을 표명함으로써 국회에서 자동폐기된 사례가 있다. 또한 호주제의 인권침해에 대해 의견을 제출, 헌법 불합치 결정에 기여한 측면이 있고, 반전․평화․인권의 관점에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의견을 표명했으며, 교육인적자원부의 NEIS 개발영역 중 교무/학사, 입․진학, 보건영역, 교원인사기록 관련 내용들이 인권침해적 요소가 있으므로 개선할 것을 권고했다.
이밖에도 제정과정에서부터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던 국가보안법에 대해 전면 폐지를 권고하면서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양심․사상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등이 침해될 소지가 있음을 인정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2005년 4월에 폐지의견을, 비정규직법에 대해서는 노동인권 보호와 비정규직 차별해소의 취지에 맞게 법안을 수정하라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도 양심적 병역거부권과 병역의무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국회의장과 국방부장관에게 권고한 바가 있다. 인권위의 개선권고에는 국가적 차원의 정책과 법률 뿐만 아니라 사생활보호의 중요성을 일깨워진 사건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 중에 초등학생의 일기장 검사 사건은 우리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일상에서 작동하는 폭력적인 개인의 권리 침해에 대해 다시한번 질문할 수 있게 해준 경우였다. 어른이므로 교사이므로 교육적 관점에서 아동의 일기를 강제로 검사하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논의된 것이다. 초등학생도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양심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누릴 향유자라는 관점에서 일기 검사는 인권 침해 우려가 크므로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 인권위의 의견이었다.
국가의 중요한 갈등사안에 대한 인권위의 권고는 많은 경우 정부를 불편하게 한 것이 사실이다. 정부와 거리두기를 해야만 정부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인권의 관점을 견지할 수 있는 것이 인권기구가 지녀야 할 존재적 특성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인권위의 정책적 기능은 보다 전문화되고 계획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인권적 관점이라는 가치판단 뿐만 아니라 정책의 설계와 재정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개선을 권고할 때 보다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으며 이는 특히 사회권 관련 권고의 개발에 더욱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인권보장을 위한 제도적 틀 마련: NAP수립과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
2001년 출범 이후 인권위가 주력한 인권보장의 큰 그림은 NAP(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와 차별금지법에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인권NAP는 인권위가 3년여에 걸쳐 작성한 것으로 이에 기초해서 인권NAP를 수립하도록 2006년에 정부에 권고했다. NAP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국가의 종합적인 인권정책계획을 담은 것으로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인권NAP의 개요와 NAP 권고안 추진과정 및 방법을, 2부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 인권보호를 위해 향후 5년간 집중할 분야, 긴급히 구제가 필요한 분야, 당사자 스스로 의제설정이 어려운 분야를 기준으로 장애인, 비정규직, 이주노동자와 난민, 시설생활인, 성적 소수자 등 총 11개 대상영역의 인권보호를 제시하고, 3부는 인권증진을 위한 인프라 구축을 위해 필요한 제도개선 및 보완분야 등을 담고 있다. NAP는 우리나라 인권정책의 로드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인권위는 이에 대한 모니터링과 자문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인권법이 아니다. 즉 우리에게 인권법은 없으며 인권위원회법이라고 하는 인권위의 조직과 기능을 다룬 조직법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차별에 대한 개념 정의나 범주 등에 대한 법률적 규정의 부재로 말미암아 차별을 판단하고 적극적인 차별구제를 실현하는데 적지않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법요구는 이러한 필요성에 근거하여 제기되어 왔으며 인권위는 약 6년여에 걸쳐 차별금지법권고안을 마련하여 2006년 7월에 국무총리에게 이 권고법안에 기초하여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것을 권고했다. 결국 차별금지법은 제17대 국회의 회기 만료로 자동폐기되고 말았지만 권고법안 마련의 과정에서 제기된 차별금지 법체계의 구성과 개념, 범주, 판단기준 등에 대한 논의는 차별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을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차별금지법권고법안의 마련과 더불어 한층 속도를 내게 되었으며 2007년 4월에 제정, 장애계의 오랜 숙원이 해결되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다. 각각의 차별유형에 대한 개별 차별금지법 제정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감안할 때, 일반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인권위를 비롯한 인권관련자들의 사회적 책무이기도 하다.
남겨진 많은 과제들
위에 언급한 사안들이 인권위 활동의 전부가 아니며 또 인권위만의 역할이 아님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권위는 2001년 출범한 이래 한국사회의 변화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러한 영향은 인권위 활동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평가들 속에서 미래의 역할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혹자는 인권위가 너무 친정부적이고 소극적이며 정책 발굴에 전문성이 떨어지며 사법기관에 대한 권고가 부진했음을 비판한다. 그런데 혹자는 그 반대의 이유로 인권위를 비판하기도 한다. 조사능력에 한계가 있고, 권고의 실효성에 문제가 있으므로 보다 강력한 조사권과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 모두가 가치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넘어설 수 있는 다른 가치는 없다.
인권위가 보다 민주적으로 보다 인권의 관점에 충실하게 활동해야 함은 인권위라는 조직의 존재적 당위이다. 많은 인권 전문가들은 인권위가 보다 적극적으로 인권을 선도하며 조사대상을 확대하고 사전 예방기능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독립성을 근간으로 지속적으로 ‘인권’의 이름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하며 그것이 인권위 고유의 역할이라고 지적한다. 쌓여가는 인권현안들 앞에서 ‘인권’을 위해 할 일을 다하는 정부를 찾기란 쉽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정부를 찾는 것은 쉽다고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월간 <복지동향> 2009년 05월호(제1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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