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희 참여연대 공동대표,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 글은 한상희 외, 사회권에 대한 개인구제절차 강화 방안 연구·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 가입 및 인권위 조사대상 확대를 중심으로, 국가인권위원회, 2023의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들어가며
사회권으로 통칭하는 권리들은 복지국가 체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회적·경제적 평등이나 복지정책을 형성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상대방인 개인이 법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게 한다.
사회권은 개인이 국가에 대하여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고 그에 상응하는 국가의 조치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혹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갖춘 주거생활을 실현해주지 않는 국가에 대해 그 미진함이 위법하다고 주장할 힘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권은 복지의 문제가 행정이나 입법의 수준을 넘어 사법이라는 근대적 권력이 작동할 수 있게 한다. 정책적 우선순위나 재정의 적정 배분 혹은 경제성의 논리와 함께 법적 타당성이라는 판단이 복지정책 과정에 유의미하게 투입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초 바이마르헌법이 그러했듯, 사회권은 오랫동안 권리로서의 실체를 가질 수 없었다. “자유권과는 달리” 사회권은 정책적 선택이 필요하며(그래서 사법관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며) 막대한 재정이 소요된다(즉 기득권 집단의 재산에 부담을 준다)는 것이 이유였다. 2차세계대전 후 세계 인권 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도 사회권규약은 냉전의 최전선이 되어 자유권 규약과 구분되어야 했고, 개인이 복지정책 과정에 대해 실효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인 사법절차 내지는 소송절차는 사회권과는 무관한 것인 양 법리가 일그러지기도 하였다. 헌법이나 인권 규약에 사회권이 명시되건 아니건, 그것은 국가의 경제정책이나 사회정책의 하위개념에 불과하며, 따라서 개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의 거대정책 과정에 맞서 싸울 수는 없는 미약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심지어 국제 인권 체제를 구축했던 UN에서조차 사회권은 규범적으로 열등한 존재였다. 자유권의 경우 이미 1976년 자유권 규약이 채택될 때부터 개인진정제도가 도입되어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침해된 자신의 권리를 구제받을 수 있게 하였다. 자유권위원회는 이에 따라 지금까지 2천 건이 넘는 심사를 행하였다. 하지만 “점진적 실현”이나 “이용 가능한 자원”이라는 조건이 달린 사회권의 경우, 정책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이유로 그의 추진체계를 구성하거나 개인진정 절차를 통한 “사법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은 계속 지체되어 왔다. 사회권위원회의 설치가 1985년에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반세기를 넘는 세계 인권 체제의 역사 대부분의 기간동안 사회권은 법적 지위를 제대로 획득하지 못한 채 인류에 대한 하나의 공허한 약속으로 부유하였을 뿐이었다.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와 개인진정제도
1) 개인진정제도
2013년 5월에 발효된 UN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이하 “선택의정서”)는 사회권의 이런 모습을 급진적으로 전환한다. 이 선택의정서는 “모든 인간의 권리와 기초적 자유가 지닌 보편성, 불가분성, 상호의존성, 상호관련성을 재확인”(선택의정서 전문)하면서 자유권/사회권이라는 이분법이나 사회권의 프로그램 규정화라는 그간의 논의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사회권 또한 즉시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권리로 재규정될 필요가 있음에 국제사회가 합의하였음을 선언한 것이다. 개인진정절차는 선택의정서의 이런 방침을 구체화하는 가장 두드러진 제도이다.
사회권위원회는 사회권 규약상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집단, 혹은 이들의 동의를 얻거나 정당한 이유를 가진 제삼자가 당사국에 대하여 제기하는 진정을 접수하고 심사할 권한을 가진다(1조). 이 개인진정절차의 도입은 무엇에 비견할 수 없는 의의가 있다. 첫째 그것은 종래 국가가 베푸는 복지정책을 무기력하게 수혜하는 데 그쳐야 했던 개인이나 집단들로 하여금 그 국가를 상대로 자신의 사회권 규약상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이때의 피해자는 그 국가의 법률 또는 관행에 의하여 실제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단순히 복지정책 일반이나 법 제도에 대하여 비판하는 추상적인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진정 심사의 과정에서 개인적인 권리구제(이에는 손해 예방을 위한 잠정적 조치도 포함된다)는 물론, 국가정책의 타당성 내지는 인권적합성에 대한 실질적인 심사와 그에 대한 진정인의 의견제시가 가능하게 된다는 점에서, 보다 민주적이고 실효적인 복지정책 과정을 모색할 수 있게 한다(제3조 내지 제5조 참조).
둘째, 그동안 통치의 영역으로만 인식되었던 복지정책에 대하여 그 타당성 여부의 심사를 위한 실질적인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사회권이 보다 구체적이고 법적인 권리로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위원회는 개인 진정을 심사하는 데 있어 사실조사를 거쳐 당사국 조치의 상당성(reasonableness)을 심사하여야 한다. 선택의정서는 그 심사기준을 정하면서 많은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재량의 여지(margin of discretion)”나 “판단여지(margin of appreciation)”와 같은 문구를 삭제해 버렸다(제8조4항). 사회권에 대한 점진적 실현, 자원의 이용가능성 등과 같은 사회권 규약상의 용어들이 사회권을 순수하게 정책문제로 간주해왔던 관행들을 일거에 불식시킨 것이다. 우리 헌법재판소처럼 권리침해 여부의 판단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국가에 폭넓은 재량의 여지를 인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여기서는 당사국들이 사회권의 점진적 실현의 의무에 부합하는 조치(a measure of compliance)를 하였는지의 여부를 사회권위원회가 주체적이고 중립적으로 판단한다. 이를 위하여 사회권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해 심사하게 된다. ① 신중하고 대상이 설정된(targeted) 조치를 취했는지, ② 비차별적, 비자의적인 조치인지, ③ 가용자원의 배분이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한 것인지, ④ 규약상 권리를 가장 덜 제한하는 대안을 선택했는지, ⑤ 조치에 걸린 시간은 어떠했는지, ⑥ 한계선 상의 개인이나 집단의 상황이 우선 고려되었는지, ⑦ 기타 자원 동원의 효율성(저비용 여부)이나 국제협력에 대한 요청 여부 등도 심사기준이 된다. 또한 이런 기준에 의한 심사의 결과 구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원상회복, 배상, 재활, 만족 및 재발 방지의 보장을 통한 피해의 시정(redress) 등을 권고하게 된다.
그 외에도 이 선택의정서는 국가 간 진정 절차(제10조) 및 조사절차(제11조)도 규정하였다. 특히 후자는 법적 권리로서의 사회권의 의미를 구성함에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진정이 없는 경우에도 규약상 권리에 대한 심각하거나 체계적인 침해가 있다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입수하였을 때, 사회권위원회의 재량으로 당사국에 대한 방문 조사 등 대규모의 조사를 개시하여 수행할 수 있게 한 것이다(제11조).
2) 개인진정제도의 운용 실태
선택의정서 발효 후 10년이 지난 2023년 8월 21일 현재, 사회권위원회 공식 통계에 의할 때 사회권위원회는 총 311건의 진정을 접수하여 그중 104건의 개인 진정을 처리하였다. 13건1)에 대해서는 본안판단을 내렸으며 10건(이 중 7건이 주거권 침해 인정)에 대하여 규약 위반을 선언하였다(그 외 본안기각 3건, 각하 26건, 취하 등 불속행결정 65건). 또한 진정 건수를 기준으로 할 때, 스페인이 최다 피진정 국가이며(244건), 42건의 이탈리아가 그 뒤에 자리한다. 그 외 포르투갈 5건, 아르헨티나 4건, 프랑스가 3건이며, 핀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등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사건유형별로 보자면, 식량·의복·주거 및 적절한 생활 수준에 대한 권리에 관한 진정 278건에 이어 건강권이 17건이다. 종래 가장 전형적인 사회복지 분야로 간주되었던 영역에서 최다건수의 진정이 제기되었다. 노동3권 등 노동 관련 권리에 관한 진정도 총 24건을 차지한다. 이런 분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스페인이다. 스페인의 경우 경기침체와 더불어 강제퇴거조치가 빈발하였지만, 국내의 절차로 제대로 구제받지 못하는 상황이 빈발하였다. 이에 주거권운동을 주도하는 시민단체들이 나서 개인진정절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최초의 사례는 I.D.G. v. Spain 사건(2015)이다. 사회권위원회는 2007~2008년의 스페인 재정위기 사태에서 모기지(mortgage)를 상환하지 못한 진정인에게 공시송달의 방법에 의하여 강제퇴거 조치를 집행한 것이 주거권 침해라고 판단하였다. 또, 소유자의 동의 없이 아파트에 거주하던 여성에게 불법점유 사실이 없는 경우에만 사회적 주택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한 스페인의 조치 또한 비례성의 원칙을 위반하여 진정인에게 대체 주택에 접근할 어떤 가능성도 부인한 것으로 주거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판단도 있었다(Maribel Viviana López Albán v. Spain, 2019).
반면 불법점거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진정인에게 수차례에 걸쳐 대체 주거를 제공하면서 이주를 요청하였으나 진정인이 이를 거부하자 법원이 강제 퇴거를 명한 사건은 당사국의 손을 들어 주었다(Soraya Moreno Romero v. Spain(2018). 퇴거의 목적과 결과에 대한 비례성 검토를 하였고, 당사국이 가용자원을 최대한 동원하여 모든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진정인의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절한 주거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는 주장은 기각되어야 한다고 판단되었다. 그 외, Lopez Rodriguez v. Spain(2018) 사건의 경우 정부가 장애가 있는 수형자인 진정인에게 비기여성 장애급여를 감액하여 지급하도록 한 조치는 사회권규약 상의 사회보장권 및 차별 없이 이 권리에 접근할 권리를 침해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선택의정서 가입의 필요성
우리나라가 선택의정서에 가입할 필요는 차고 넘친다.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의 시대적 의미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권/사회권의 이분법을 넘어 모든 인권이 보편성, 불가분성, 상호의존성, 상호관련성을 가짐을 재확인하며 자유권과 마찬가지로 사회권 또한 법적 권리로서의 실체를 가진다는 점을 명확하게 선언한다. 개인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구제가 가능한 구체적인 권리로서 사회권의 지위를 재구성하는 한편, 그에 상응하는 국가 의무를 당사국이 제대로 이행하였는지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심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권을 두고 국가 특히 행정관료들이 주도하는 공공역무에 부수되는 이익 혹은 국가적 시혜라는 인식이 지배하였다. 그 배경에는 개발독재라든가 성장 중심의 국가 운영 원리들은 소위 자본의 유출에 해당하는 복지행정 혹은 그 전제로서 자원의 재분배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시민들이 사회권을 주장하며 스스로 권리주체로 등장하는 것 자체를 불온시하거나 반사회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요컨대, 복지정책 과정에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거나 항의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국회를 향하거나 청원하는 등의 소극적인 과정만이 열려 있었다. 인권 구제의 최후 보루인 법원이나 헌법재판소는 시민들이 사회권의 주체가 되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거부하였고, 국가인권위원회의 경우 사회권에 대한 권한을 아예 부여하지도 않았다.
선택의정서 가입은 이런 답답함에 물꼬를 열게 한다. 우선 개인진정절차를 통해 시민들의 권리구제 가능성이 크게 확장된다. 사회권에 소극적인 우리 입법부와 행정부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시민들이 스스로 사회권의 주체로서 나설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스페인의 사례가 그러하듯, 다양한 인권운동이나 사회운동이 보다 확장되고 심화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사회권은 개인주의에 기반한 것이라는 한계를 넘어, 시민들이 숙의와 연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구성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인권의 세계화 국면 앞에서 사회권에 관한 국제 인권 규범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할 기회가 마련된다. 우리의 복지정책을 편협한 관료적 시선 혹은 경제성장 우선적 사고에 고착시키는 과오를 극복하고,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인권친화적인 정책 과정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선택의정서 가입은 우리의 인권이 보다 풍부하게 실천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시민사회가 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사회정의를 구성해내고, 이를 통해 인권친화적인 입법과 행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중대한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2023년 8월 현재 51개의 국가가 선택의정서에 서명하였고, 가입 절차를 완료한 국가도 28개국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의 경우에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사회권규약에 가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유보 없이 선택의정서에 가입하고 그에 상응하는 법령 개정과 행정관행의 개선을 위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실제 사회권규약 또는 그 선택의정서에 의하여 우리가 부담하여야 하는 의무는 현재의 경제 수준이나 재정 능력 등에 비추어 볼 때 이행 불가능한 수준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미 우리 국가가 부담하고 이행하여야 함에도 그동안 간과하거나 무시해 왔던 잘못된 인권 체제 자체를 고치고 교정함으로써 그 상당 부분을 이행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사회권 집행이 지체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권의 보장을 위해 가용자원을 최대한 동원하지 않고 있는, 의도된 부집행(不執行)의 상황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선택의정서 가입을 계기로 사회권을 향한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 사회복지정책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치고 있음을 핑계 삼아 그 가입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 체제로는 선택의정서 가입은 기대난망일 듯하다. 정부조직법상의 담당 기관은 인권행정의 주무 기관인 법무부이다. 그러나 그동안 정부는 선택의정서 가입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왔을 뿐 아니라, 법무부의 인권행정 능력이나 자원, 의지를 감안할 때 시간만 끌거나 되려 가입 반대의 의견으로 돌아설 가능성도 없지 않다. 비슷한 경로로 찬반양론에 함몰되어 가입이 지체되고 있는 독일은 이 점에서 타산지석이 된다.
실제 스페인이나 우루과이가 그러했듯이 선택의정서 가입은 시민사회의 요구와 압박이 있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사회권은 워낙 폭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권리이기 때문에 다양한 주체들의 숙의와 연대가 필수적이며, 특히 개인진정절차를 중심으로 하는 선택의정서에의 가입은 더욱 그러한 과정이 요청된다. 사회권은 자유권 이상으로 정치적인 권리다. 그것의 실효적인 보장 절차인 개인진정절차는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복지정책 과정에서 소외된 개인의 권리를 구제하는 절차이지만 동시에 사회권에 관한 시민적 합의와 정책가치를 도출하기 위한 공공영역을 창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런 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야 한다. 시민사회가 가입을 위한 일정 수준의 동력을 확보할 때까지 사회권의 요청을 널리 공유하고 확산시키며 그 목소리들을 모아 내는 플랫폼 또는 광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존재 이유이다.
| 미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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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복지동향> 2024년 6월호(제3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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