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주 |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
인터뷰 및 정리 | 전은경, 장지희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활동가
1950~1960년대 부산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단 수용시설이자 인권유린의 현장인 영화숙·재생원. 1975년부터 1987년까지 국가 폭력이 자행된 형제복지원의 전신으로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폭행, 감금, 강제노역, 성폭행, 사망 등 각종 인권침해가 벌어졌고, 피해자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망자의 날인 음력 9월 9일, 암매장 추정 지역에서 진행된 위령제는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손석주 대표의 꿈이었다. 첫 위령제가 열린 2023년 10월 23일, 그는 “채 피지도 못하고 여기 이름 모를 야산에 묻혀있는 형제자매들에게 고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부모 형제의 따뜻한 사랑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아무 잘못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이름마저 생소한 영화숙·재생원,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고통과 굶주림 그리고 폭력에 멀리 하늘나라로 가신 형제자매님.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6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이제 찾아왔습니다. 너무 늦어 죄송하고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이제 그는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영화숙·재생원뿐만 아니라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등 여러 수용시설에서 고통받았던 피해자들이 하나가 되어 먼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정부로부터 시설 수용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실효성 있는 구제를 받고 싶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부산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를 맡고 있는 손석주입니다.
영화숙·재생원 사건은 50여 년 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2022년에 이르러서야 손석주님의 고발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화숙·재생원이 어떤 곳이었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씀해 주세요.
아마 형제복지원에 대해 알고 계신 분들은 많을 텐데요. 그에 반해 영화숙·재생원은 생소하게 느끼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간단히 말하면 영화숙· 재생원은 형제복지원의 원조 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례에서부터 운영, 통솔 방식, 체계 등 영화숙·재생원을 모방해 설립한 것이 형제복지원이라고 할 수 있죠. 영화숙·재생원이 1975년에 폐업을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형제복지원이 생긴 것이고요.
항상 영화숙·재생원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영화숙과 재생원은 같은 공간을 공유한 다른 기관으로 봐야 합니다. 영화숙은 아동 보육시설이었고, 재생원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습니다. 영화숙은 아동 시설로 30년 정도 운영되던 곳이었고, 부랑인 시설 설립을 계획 중이던 부산시와 영화숙이 위탁 계약을 맺으면서 재생원이 추가로 만들어진 것이죠. 영화숙은 15세 미만의 아이들이 모여있었고 재생원에는 성인들만 모여있었는데, 재생원의 목적은 노동착취였다고 보입니다. 처음 영화숙만 운영될 당시에는 인부가 따로 있었고 아동들은 보조적인 역할 정도만 했지만, 재생원이 설립된 이후로는 성인 부랑인들의 노동력 착취가 시작되었죠.
특히 영화숙의 경우 어느 정도 이동의 자유가 있었지만, 재생원은 완전한 감금시설이었습니다. 하루에 오직 한 시간만 방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그 외에는 방 밖을 나갈 수 없었어요. 재생원에는 화장실조차 없었고, 밤이 되면 방마다 배변통 두 개를 들여놓고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아침에는 다시 배변통을 들고 나갔는데, 탈출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돼요. 당시 재생원에는 어르신이나 환자, 발달 장애인들도 많았는데 음식 공급도 원활하지 않고 치료도 전무하다 보니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어요.
물론 영화숙의 상황도 좋지는 않았습니다. 영화숙의 어린이들이 탈출을 시도했다가 다시 잡혀 오면 몽둥이로 발바닥을 40~50대 정도 맞습니다. 통증 때문에 걷지를 못하니 기어서라도 식당에 가면 식사 시간은 이미 끝나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에 치료도 받지 못하니 병이 악화하여 죽는 아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 특히 식사량이 부족해 배가 고픈 아이들이 무엇이든 주워 먹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는데요. 아이 셋이 다대포 바닷가에서 바짝 마른 물고기를 주워와 나눠 먹었는데 하필이면 그 물고기가 복어였던 겁니다. 결국에는 그날 저녁에 세 아이가 모두 사망했죠. 또 영화숙에 있는 모든 아이가 눈병과 피부병을 달고 살았지만 치료는 전혀 없었어요. 안에서 일어나는 폭행도 형제복지원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소대장, 지도장, 반장들이 자신의 위세를 세우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어린아이들을 폭행하는 일들이 많았지만, 관리자들은 이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죠.
당시 영화숙·재생원의 납치, 유괴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보도가 아예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관리하고 감시해야 할 기관에서는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순영 원장이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5일 만에 풀려나는 일도 있었고요. 비호세력의 존재 덕에 언론보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들이 묵인되면서 영화숙·재생원이 계속 운영될 수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숙·재생원이 운영되던 15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지만, 정확한 자료도 없으니 통계도 낼 수 없는 상황이고요.
영화숙·재생원 사건을 고발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처음 영화숙·재생원 피해 사실을 알리게 된 것은 선감학원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모습을 보며 느낀 억울한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똑같은 일을 당했는데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피해보상을 떠나 이런 일은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하는 문제라고 느꼈습니다. 그 후 무작정 양산시청 기자실을 찾아가 영화숙·재생원의 피해 사실을 알렸습니다. 운영 시기, 수용인원 등 제가 아는 내용을 모두 전달하고 며칠 후 기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당시 2시간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기자분께서 4~5년 전에 영화숙·재생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신입 기자 시절에 기삿거리를 찾는 본인에게 당시 국민학교 교사셨던 어머니께서 영화숙·재생원의 문제를 언급하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에는 반세기도 지난 일일뿐더러 피해자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사할 생각을 하지 않고 흘려들었었는데, 5년 후에 저와 만나게 된 거죠.
그렇게 2022년 10월 31일에 국제신문에서 첫 기사가 나오자마자 두 번째 피해자가 기자에게 연락을 했고, 그분이 현재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의 부대표를 맡고 계십니다. 두 번째 피해자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두 번째 기사가 작성되었고, 신기하게도 기사가 나올 때마다 연락해 오는 피해자들이 한 명씩 늘어나면서 기획 기사가 이어졌어요. 그렇게 4명의 피해자가 모인 것을 계기로 협의회가 탄생하게 되었죠.
그러나 지역신문이다 보니 이 사실을 더 널리 알리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이야기가 담긴 신문을 수십 장 복사해서 부산시에 위치한 단체들에 알리고 다녔어요. 부산에 위치한 대학교 총학생회에도 찾아가고, 정당, 언론 등 곳곳을 돌아다녔죠. 그러면서 점차 영화숙·재생원 피해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KBS 시사직격 방송이 나간 이후 피해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연락이 왔죠.
현재 대표직을 맡아 활동하고 계신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이하 협의회)는 2022년 12월 15일에 만들어졌어요. 영화숙·재생원에 대한 기사가 나간 후 연락해 온 피해자들이 3명 있었는데, 그분들과 함께 더 많은 피해자를 모아보자고 의기투합해 협의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후 피해자를 찾으러 전국을 누비고 다녔어요. 피해자 한 명을 찾으면 그 피해자와 연결된 또 다른 피해자들을 소개받는 방식으로 피해자들을 모았는데, 현재 부산시에 등록된 인원만 150여 명에 달합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에서는 영화숙·재생원의 피해자를 7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데요. 영화숙·재생원 피해자 중에서 부산 소년의집으로 이동해간 피해자분들이 500명 정도 있고, 어릴 적 이름, 생년월일과 현재의 인적 사항이 일치하지 않아 소재 파악이 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협의회는 1년 간의 활동 이후 2023년 8월에 비영리단체로 등록했는데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 4월에도 인천, 포천, 남양주, 천안을 돌면서 십여 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이분들이 진화위의 조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에서는 매년 피해자들을 기리는 위령제를 진행하고 계시는데요. 전국의 피해자들을 처음으로 직접 만났을 때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을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거나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첫 번째 위령제에서 피해자들이 80~90명 정도 모였고, 올해 위령제에는 15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위령제에서 만난 피해자들은 50년 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인데도 몇 마디 나누고 나면 ‘까불이’, ‘토까이’, ‘4번’ 등등 서로의 별명을 다 기억하더라고요. 참 신기했죠. 다들 옛날 얘기를 하면서 추억도 나눴고요.
현재 협의회에는 딱 두 분의 여성 피해자가 있는데 요. 그중 한 분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분은 7세에 집 근처에 있던 경주역에서 놀다가 타고 있던 열차가 출발해 부산역에 도착했고,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영화숙에 실려와 가족들과 이별하게 된 경우였습니다. 그런데 영화숙을 나온 뒤로 가족을 찾고자 거리에서 몇십 년을 헤매며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가족을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경찰이 전해주었다는 겁니다. 굉장히 의아하죠. 그렇게 가족을 찾아달라고 할 때는 못 찾다가 동생이 죽었다며 연락이 온 것이니까요. 또 올해 연락이 닿은 다른 여성 피해자분께서 영화숙에는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 온 6명의 아이가 있었다고 증언해주셨는데요. 모두 2~4세의 아이들이었다고 합니다. 그 연령대 아이들은 보육원을 갈 나이가 아닌데도 영화숙으로 실려 왔고, 해당 피해자분께서 직접 그 아이들을 돌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6명의 아이가 한꺼번에 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 사라진 아이들은 해외 입양을 간 것으로 추정이 되고요.
이번에 연락을 해오신 피해자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여아 소대에서 함께 생활하던 피해자 중 몇몇과 계속 연락을 이어오고 있지만,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신 분들의 경우 피해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시는 것으로 보여요. 하지만 피해자들에게도 항상 하는 이야기이지만, 저희가 죄를 지어 이런 일을 겪은 것도 아니고, 절대 창피해 할 일이 아니죠. 물론 피해자분들이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해가 돼요. 아픈 상처지만 묻어두겠다는 분들이 많고, 그분들의 의견을 존중해 그 이상의 설득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손석주 님은 총 두 번 영화숙·재생원에 갇혀있었다고 하셨는데요. 자세한 내용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1971년 거리에서 신문을 팔다가 처음 잡혀갔어요. 그때 제 나이가 9살이었고, 두 달 만에 산속으로 도망을 쳐 탈출했습니다. 그 당시 제 이름부터 집 주소, 학교명, 부모님 성함, 담임 선생님 성함까지 정확히 이야기했고 연락을 취해달라고도 요청했지만,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제 가족이든 담임 선생님이든 전혀 연락받은 적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이후 1973년도에 다시 영화숙으로 잡혀갔는데 1년 가까이 거기서 지내야 했어요. 결국 출석 미달로 퇴학 처리가 되었고, 그 경험이 저에게 큰 타격을 주었죠.
다른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갈대밭에서 사촌들과 놀다가 납치되어 영화숙·재생원에 들어오신 분이 있습니다. 가족들이 세 번이나 찾으러 갔지만 영화숙에서는 그런 아이는 없다며 발뺌했다고 합니다. 당시 가족들이 명단까지 확인했지만, 아예 다른 이름으로 등록을 해놔서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해요. 결국 4번째로 방문할 때 경찰을 대동해가니 그제야 여기 있다며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겁니다. 현재까지도 가족을 찾지 못한 피해자들도 매우 많습니다. 부산 소년의집에서 호적을 새로 만든 분들이 300명이나 되고, 실제 생년월일과 호적상 생년월일이 10년 이상 차이 나는 분들도 계시다보니 가족을 찾기가 어렵죠. 이런 민간기관에서는 부랑인들을 단속할 권한이 없음에도 부산시의 묵인하에 상시적인 단속과 납치, 감금 행위가 이루어진 겁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과거의 경험과 트라우마로 인 해 60~70대가 되어서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나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행동을 제지당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아요. 누군가의 지시만 받고 살아와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일례로 영화숙·재생원 시절에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고,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네 명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앞에 음식이 있어도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손을 댈 수 없는 것이 일상이었어요. 어릴적 망가진 삶이 그 후의 삶에도 계속 영향을 주어 사회 구성원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해야 할 시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많습니다. 신체적인 학대보다도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고통받은 피해자들이 너무 많아요. 20세를 한참 넘겨서 주민등록증을 만든 분들도 수두룩하고, 지속적으로 비굴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분들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피폐해졌는지를 조명하고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고 싶어요.
당시 영화숙·재생원에서 만난 또래 피해자들이 많았을 텐데요. 수용시설에 갇혀있을 때 다른 피해자들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탈출한 이후로 연락을 취하거나 만남을 이어간 경우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영화숙·재생원에서 생활할 당시에는 막내 격에 해당했습니다. 영화숙·재생원은 이순영 원장이 비리 혐의로 구속되고, 언론 보도도 이루어지면서 점차 폐업 수순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알로이시오 신부가 영화숙에 머물던 301명을 소년의집으로 데려갔어요. 하지만 폐업 수순을 밟던 와중에도 영화숙·재생원에서는 아이들을 내보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년의집에서 한 사람당 천 원 정도를 지불하고 아이들을 데려왔다고 해요. 그 후에는 11월에 34명, 12월에 41명이 소년의집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입소했던 73년에는 대부분의 아이가 소년의집으로 이동한 상황이었고 제 또래가 매우 적었죠. 소년의집으로 이동하지 못한 피해자들은 대부분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요. 저는 74년에 영화숙·재생원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학교에서 퇴학 처리가 되었고, 3년 동안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대방아동심리상담소 등 여러 시설들을 전전하며 살아왔습니다. 다른 분 중에서는 형제 복지원이나 삼청교육대를 모두 겪은 분도 계시고요. 저처럼 소년의집으로 이동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타의에 의해 제2, 제3의 기관으로 옮겨 다니며 피해를 경험했고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자연스레 피해자들끼리의 관계도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피해자는 협의회를 계기로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고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최초로 기자를 찾아가 피해 사실을 고발했을 때와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를 구성하고 활동하고 있는 지금을 비교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부나 사회에 바라는 내용도 달라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활동을 하며 생각의 변화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작년부터 서울을 다니면서 진화위 김광동 위원장에게 직권조사를 요구해왔습니다. 조사기관에 조사를 신청한 피해자가 당시에는 7명밖에 없었고, 7명의 피해자만을 가지고 영화숙·재생원 사건을 조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산 덕성원피해생존자협의회 안종환 대표와 함께 면접, 교섭에 들어갔고 2023년 8월 18일 직권조사가 결정되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피해자가 등장할 때마다 곧바로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죠. 직권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신청 기간에만 개별적으로 피해자들의 신청을 받아 그 기간 내에 신청하신 분들에 대해서만 조사가 이루어지고, 그 기간을 지나 피해 사실을 알리신 분들의 경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직권조사가 결정되지 않은 형제복지원은 신청 기간이 지나 조사를 받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들이 많죠. 지난해 7월 진화위 김광동 위원장이 부산에 내려와 만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우리는 가해자 처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진실을 밝혀달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가해자가 사망해 책임을 질 수 있는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 요구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직권조사라는 결정이 이루어졌으니 큰 성과라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형제복지원이 저희보다 먼저 앞장서 길을 닦아주었기 때문에 저희가 힘든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었고, 직권조사라는 선물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분들에게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죠. 그리고 동시에 영화숙·재생원,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이 네 곳이 최악의 수용시설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이외에도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악질적인 시설들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수용시설의 경우에도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진상규명을 하길 바라고 있어요.
뒤늦게 사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는 만큼, 피해자 대부분이 이미 고령이기도 하고 남아있는 증거자료들 도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활동하며 느낀 어려운 점이나 아쉬운 점이 있을까요?
제일 어려운 게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피해자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진이나 관련 자료들을 최대한 모으고 있어요. 형제복지원 연구용역을 맡으셨던 동아대 남찬섭 교수님께서 형제복지원 자료와 함께 딸려 온 영화숙·재생원 자료들을 따로 정리해 전달해주신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후에 국가기록원이나 부산시를 다니며 기록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다른 자료들은 찾지 못했습니다. 1950년대의 기록들도 남아있는데 그 이후의 자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믿기 어렵죠. 형제복지원 서류들과 함께 영화숙·재생원 자료가 딸려 온 것만 보더라도 더 많은 자료가 있을 거라고 추정되고, 부산시에서 이 자료들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요. 특히 부산시에서 왔던 공문 기록이나 부산시에 청구한 영수증 자료, 부산시 지원 내역도 발견되었는데 유일하게 없는 것이 명부입니다. 문서고에 들어가 직접 자료를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지난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합(UN) 산하 고문방지위원회 심의에 참석해 고문 피해를 증언하셨는데요. 그 결과 의미있는 권고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을 소개해주시고, 정부가 이를 이행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제6차 최종 견해의 주요 권고로는 시설수용 및 과거사 피해자의 구제 보장, 고문 범죄화 및 시효 배제, 구금 초기 단계부터의 변호인 조력권의 보장, 정신 보건 시설 강제 입원 및 입소 방지 등이 있습니다. 권고 내용에 만족하고,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협의회에서는 영화숙에 있다가 해외 입양을 갔던 김성주 님과 제가 함께 스위스 제네바에 가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김성주 님의 개인 사정으로 저 혼자 가게 되었죠. 비행기도 태어나 처음 타봤습니다. 제네바에 가기 전에 발표할 원고를 열심히 준비해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미리 써온 원고를 그대로 읽는 것은 만족스럽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준비해 간 원고는 읽지 않고 정말 제 마음에서 우러나온,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화숙·재생원 내부에서 자행된 일들에 대해서는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 충분히 접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옆에 누워 잠들었던 친구가 아침에 죽어있는 모습을 보며 나도 내일 아침에 해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공포, 언젠가는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신체적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배고픔과 폭행으로 인한 고통은 모두 지나가지만, 어린 나이에 어떻게 행동하면 한 대라도 덜 맞을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먹을 수 있을까 궁리하고 두려움에 떠는 일이 신체적인 폭력보다도 훨씬 끔찍했다고 말했습니다. 저희와는 전혀 교류가 없는 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듣는 위원분들이 모두 눈물을 훔치시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며 저의 이야기에 공감을 해주시는구나 싶었죠. 이번 계기를 통해 국제사회도 대한민국의 수용 시설이나 장애인 시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자행되고 있는지 관심을 두고 지켜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 인권위원회 이사국이 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오르더라고요. 대한민국의 인권 문제들은 현재진행형이고, 과거사가 바로잡히지도 않았는데 어떤 자격으로 이사국이 된 것인지 의문이 들더라구요. 특히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의 권고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를 지킬 의지가 없으면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어떤 노력을 기울일지 지켜봐야죠. 가장 화나는 일은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의 최종 견해에 대한 우리나라 정부의 입장 발표입니다. 정부가 대응을 잘하고 있다는 답변을 내놓았는데, 2017년에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내놓은 정부의 답변과 매우 동일합니다. 분개할 수밖에 없죠.
저는 정부가 배상이나 보상의 문제를 떠나 과거사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1세대 피해자들은 이제 곧 사라질 수 밖에 없고,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하고 명예회복도 되지 못한 채 돌아가시게 될 것 같아 걱정됩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습니다.
대구 희망원, 덕성원, 칠성원 등 영화숙·재생원과 유사한 수용시설이 많았지만 많은 피해자들이 지금도 본 인의 피해 사실을 밝히며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대표님께서도 이들을 위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오셨는데요. 피해자들이 나서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또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피해자협의회를 꾸리고 운영해 온 경험자의 입장에서 말씀해 주세요.
사회의 시선도 문제이고, 내가 나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으니 선뜻 나서지 않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활동 초기에 시간이 될 때마다 인권센터, 언론사 등 온갖 곳에 전화를 걸면서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부탁했어요. 전화하면 상대방이 주로 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도와주기를 원하냐는 건데, 저도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알지를 못하니 무작정 도와달라고만 답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작년에 피해자 6명이 모여 부산 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을 때였어요. 그때 방송국에서 기자회견을 촬영해가서 피해자들이 애타게 8시 뉴스를 보고 있는데 나오지 않더라고요. 나중에 알아보니 그림이 너무 안 나와서 뉴스에 싣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언론도 진실을 밝히는 일보다 그림을 더 중요시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죠. 그래서 그 이후로는 그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피해자들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다녔습니다. 부산시에 있는 13개의 인권 단체를 찾아다니며 도움도 요청했고요. 그렇게 연결된 단체들에 의지하며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피해자가 피해자를 직접 인터뷰하는 영상도 기록하고 있어요. 그리고 영화숙·재생원을 방송에서 다뤄준 시사직격 PD님과 기자, 교수님들이 모인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 지원단’도 만들었어요. 지금까지도 주기적으로 지원단분들을 만나고 있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인맥이 형성되어서 여러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협의회의 힘만으로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도와주시는 많은 분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임에도 신청 기간을 넘겨 조사를 받지 못한 분들이 400여 명이 되는데요.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길잡이의 역할을 맡아 부산시에서 구제 협의회를 만들어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구 희망원 피해자와 서울시립아동보호소 피해자들도 모으고 있고요.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건 조사와 진상규명을 맡는 기관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런 면에서 진화위가 2025년 5월에 활동을 종료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진화위의 운영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여러 의원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하고 있고요. 수용시설 문제에 대해 조사를 할 수 있는 기관은 진화위뿐이고, 진화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재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진화위의 존속은 필수적입니다. 많은 단체와 시민들이 힘을 모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에도 많은 피해자분이 포함되어 있지만, 실제 피해자의 수는 훨씬 많은 것 으로 생각되는데요. 아직 용기를 내지 못하고 계신 피해자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영화숙·재생원의 피해자들이 전부 고령인만큼, 지금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하면 평생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내 가슴 속에 있는 말 한 마디든 두 마디든 해주셨으면 합니다. 한 분이 용기를 내면 다른 피해자들도 그분을 보고 본인도 용기를 내게 됩니다.
힘들더라도 피해 사실을 알려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이 활동을 하면서 피해 사실을 알리고 조사를 신청하고 싶어도 글을 몰라 신청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당사자의 신청 서류 작성을 도와드리기도 했었고요. 어떤 식으로든 직접 도움을 드릴 수 있으니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시는 분들도 마음 편히 연락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는 공영 장례 관련해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공영 장례 위임절차와 유언 공증 지원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특히 올해 초, 가족이 없는 무연고 생존자분들이 사후 국가소송 배상금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사를 유언장에 담기도 했는데요. 이 같은 일을 하게 되신 계기는 무엇이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작년에 활동하면서 보니 형제복지원 소송 중에 돌아가신 피해자분들이 많더라고요. 피해자들이 모두 고령인 만큼 이런 일은 저희에게도 곧 닥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도 사람답게 살지 못했던 분들이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외롭게 세상을 떠나지 않도록 협의회에서 직접 상을 치러줄 수 있는 방식을 찾다가 공영 장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작년에 법이 바뀌면서 당사자의 유언이 있으면 무연고자이더라도 지인이나 단체가 장례를 대신 치러줄 수 있게 되었고요.
다만 혼자 사시는 분들이 많다 보니 어떻게 사망 사실을 빠르게 알고 대처할지가 가장 큰 과제입니 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산시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고, 개인적으로 이런 사안은 관에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산시는 무연고자가 사망하는 경우 부고를 띄워 공영 장례를 하고 있고, 부산 시민 공영 장례 조문단도 운영하고 있는데요. 현재 우리 협의회도 공영 장례 조문단에서 활동하며 무연고자 장례식에 찾아가 조문을 드리고 있습니다. 사회적 참사가 있었을 때마다 많은 시민들이 찾아가 함께 슬픔을 나눈 것처럼 장례식장 입구에서 공영 장례의 의미를 안내하고, 일반 장례 때문에 장례식장에 방문한 분들도 공영 장례를 찾아 추모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추진하고 있어요.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우리 모두 이웃사촌이었던 거잖아요. 현재 피해 생존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무연고자분들의 공영 장례까지도 많은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협의회 내에서는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 무연고자인 피해 생존자의 재산이 국가에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곳에 기부될 수 있도록 하는 활동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국가로부터 배상금을 얻게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이 돈이 다시 국가로 환원되는 것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기부되기를 바라는 분들로부터 신청을 받고 있어요. 현재 유언장은 12명 정도 작성하셨고요.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의 대표로서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현재 가장 중요한 목표는 피해자 한 분이라도 더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영리단체이지만 후에는 재단법인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도 있어요. 재단법인을 설립해 저희가 다 죽고 없어지더라도 추모 사업과 위령제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부산시로부터 도움을 받아 형제복지원 피해자협의회와 공동으로 추모 공원을 만드는 것도 최종 목표 중 하나입니다. 가능하다면 건물을 구해 피해 생존자들이 한곳에 모여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현재도 부산시에 무연고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의 장점이 무연고자분들이 사망하셨을 때 공영 장례도 곧바로 진행할 수 있고, 뒤에 입주하시는 분들은 가재 도구를 그대로 사용하며 월세만 내면 된다는 점이에요. 특히 이분들의 생활 전반을 챙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장점이 있죠. 피해 생존자들이 생의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즐기다 갈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또 수용시설 피해 생존자들이 하나가 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영화숙·재생원 단체 이외에 연대하고 있는 단체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연대체들을 점차 늘려가고 싶어요. 지금도 협의회 안에서 12명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하고 있는데요. 부산 반빈곤센터에서 영정 사진을 찍어주셨는데, 그때 모였던 피해자들이 주기적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다 함께 모여 윷놀이도 하고, 점심 한 그릇 먹고 바람도 쐬고 오고 그럽니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가 계속 유지되면서 서로 아픔을 나누고 의지하다 보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피해자들이 사회에 안전하게 복귀하고 적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제대로 만들어지도록 돕는 것도 목표 중 하나입니다. 지금 여러 단체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처럼 다른 단체들이 저희와 함께해줄 때마다 큰 원동력이 됩니다.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또 대표로서 활동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제가 작년까지는 제 일과 협의회 활동을 병행했었지만 2023년 12월부로는 이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협의회 활동 때문에 근무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다 보니 사업장에 계속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올해에는 빚을 져가며 활동하고 있지만 시간을 충분히 투자하지 않으면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비용을 모두 감당하더라도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재정이 넉넉하면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는 못한 상황이에요. 이건 다른 단체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협의회의 회원들도 활동의 필요성은 느끼지만 시간, 재정 문제에 더해 자신의 활동을 통해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부족하다보니 협의회 활동을 하겠다고 나서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앞으로 같이 이 활동을 주도적으로 해나갈 사람이 없다는 점이 힘든 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피해자들을 모으는 것도 쉽지 않아 어려움이 있죠.
마지막으로 복지동향 구독자분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해주세요.
복지동향을 찾아 읽는 분들은 모두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신 분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보신다면 이 얘기를 꼭 드리고 싶어요. 어떤 일이든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모든 일이 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의 힘이 얼마큼 도움이 되겠냐, 하실 수 있겠지만 한 사람의 용기가 10명의 힘으로 이어지는 일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 활동에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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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행 101-2089-7277-04 (예금주: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월간 <복지동향> 2024년 12월호(제3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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