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헌 | 의료민영화저지와무상의료실현을위한운동본부 사무국장
전 국민 건강보험 제도는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자본의 입장에서도 건강한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제도였다. 1977년 박정희 정부가 직장 의료보험을 시작한 것도 당시 산업화에 건강한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민건강보험은 개선해야 할 과제가 많다. 그동안 무상의료운동본부를 비롯한 노동·시민사회는 건강권 실현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건강보험과 의료 공공성 강화와 보편적 의료보장의 확대를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해 왔다. 우리나라의 보건의료가 민간 중심의 시장주의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얼마간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많긴 하지만 국민건강보험은 국민에게 높은 신뢰를 받는 제도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국민건강보험을 강화하는 것은 앞으로도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의료 민영화 공세와 공공의료 고사시키기, 건강보험 보장성 축소 등의 공격으로 인해 건강보험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의료체계는 그 어느 때보다 위기에 직면해 있다. 윤석열 정부는 건강보험의 대척점에 있는 민영보험을 지원하며 민영보험이 의료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식 의료체계를 목표로 나아갔다. 그러다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중의 강력한 저항에 의해 실패하면서 윤석열은 파면됐다. 그러나 미국식 의료체계로 나아가는 추세는 윤석열 정부 들어 더 강화된 것이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경향이 아니다. 거대 양당의 정부 모두가 그동안 이 방향을 추구해 왔고, 양당 사이에 질적 차이가 아니라 양적 차이만 존재했을 뿐이다. 따라서 윤석열 파면으로 이러한 위기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윤석열이 대중 운동에 의해 파면된 상황에서 치러지는 조기 대선은 대중들에게 변화의 염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염원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미국식 의료 민영화로 나아가고 있던 추세를 중단시키고, 건강보험을 중심으로 공공 의료가 지배하는 체계로 나아가기 시작해야 한다.
낮은 보장률
현재 건강보험의 보장률은 윤석열 정부 2년 차인 2023년에 0.8% 낮아진 64.9%로 OECD 최저 보장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는 OECD 평균인 74%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고 일본의 84%에는 한참 못 미친다. 거의 유일하게 급여와 비급여를 섞어 진료하는 혼합진료가 허용되는 나라여서 비급여 증가로 인한 의료비 부담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그림 1] 참조). 비급여는 보장률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이다.

가계 지출에서 보건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6.1%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그림 2] 참조).

이렇게 낮은 보장률은 민영보험사들을 위해 정부가 방치해 온 측면이 크다. 윤석열 정부를 제외한 역대 정부들이 목표 보장률을 제시하긴 했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은 미미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비급여로 인한 높은 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민영보험을 찾고, 민영보험은 의료공급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와 돈벌이 비급여 진료를 늘리는 식의 악순환이 계속됐다. 이런 악순환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건강보험의 보장률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무엇보다 비급여를 근본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의료적 필요를 넘어서는 혼합진료를 전면 금지해야 한다. 새로 들어서는 정부는 단기적으로 OECD 평균인 74%, 임기 내에 80% 수준으로 건강보험 보장률을 끌어올려야 한다.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에 걸맞는 보장률을 달성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노인 의료비 100% 국가 보장이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은 OECD 1위로 노인들이 겪는 고통이 엄청나다. 65세 이상 노인들은 간병을 포함한 모든 의료서비스를 무료로 받아야 한다. 한평생을 사회에 이바지한 노인들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 노인 무상의료는 노인은 물론 젊은 층에도 꼭 필요한 것이다. 젊은 층이 현재 부모에 대해 지고 있는 무거운 의료비 부담을 없애 주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전망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새 정부는 노인 의료비 100% 국가 보장을 시작으로 전 국민이 건강보험만으로 진료받을 수 있는 무상의료 실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튼튼한 재정
건강보험이 높은 보장률을 달성해 머지않은 미래에 무상의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뒷받침돼야 한다. 우리 정부의 건강보험 재정 지원 규모는 선진국들보다 현저히 낮다. 정부의 건강보험 재정 기여율은 14%로, 일본(28%)이나 대만(36%)에 크게 못 미친다. 2023년 기준 건강보험 재원 중 보험료 비중이 81%인 반면, 정부 지원 비중은 16%에 불과하다. 건강보험 재정의 대부분을 노동자-서민들이 내는 보험료로 충당하고 있다.
정부는 걸핏하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건강보험 재정이 거덜 날 것이라며 공포 마케팅을 해댄다. 건강보험 보장률은 높이지 않으면서 노동자-서민들의 보험료 부담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을 다른 나라들 수준으로 대폭 늘리고 기업주들과 부자들의 보험료 부담을 늘리면 건강보험 재정이 거덜 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정부의 지원을 적어도 30%로 늘려야 한다.
기업과 노동자의 건강보험료 부담 비율도 5대5로 노동자들의 부담이 지나치게 크다. 한국과 비슷한 제도를 운영하는 프랑스의 경우 근로 소득에 대한 노동자들의 보험료 부담이 아예 없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경우 기업이 노동자보다 약 5배 더 많은 사회보험료를 부담한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수백만의 플랫폼노동자들을 비롯한 특수고용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보험료를 전적으로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따라서 특수고용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을 포함해 기업의 부담을 대폭 늘려 기업과 노동자 부담 비율을 최소 7:3으로 조정해야 한다.
또한, 고소득, 고액 자산가들만을 위한 보험료 상한을 없애고 이들에게 누진 보험료를 부과해야 한다. 이는 날로 커지고 있는 빈부 격차를 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민영보험 활성화 중단
2007년에 도입된 실손보험은 비급여를 늘려 의료비를 높이고 건강보험 보장률을 떨어뜨리는 주역이다. 역대 정부들은 일관되게 민영보험 활성화 정책을 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건강보험을 위기로 내모는 것이다. 정부는 건강보험을 강화하기는커녕 실손보험을 “제2의 건강보험”이라고 광고하며 민영보험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나서 왔다. 특히 윤석열 정부는 민영보험사가 비급여 심사를 하고, 진료비도 의료기관이 직접 보험사에 청구하는 직불제를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의료기관의 진료비 청구에 대해 심사하고 관리하는 것처럼, 민영보험사가 의료기관의 진료를 통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민영보험을 건강보험과 경쟁하는 보험으로 격상시켜 건강보험을 약화하고 종국에는 건강보험을 대체하는 미국식 의료 민영화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민영보험사들이 지배하는 미국식 의료체계는 악명 높다. 제3자 채권추심 중 의료비가 56.9%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세계 1위 경제의 미국 노동자-서민들은 아프면 가계 파탄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그림 3] 참조).

민영 실손보험은 민간 병원들이 수익성을 높이는 통로가 되어 비급여 진료를 늘리게 만든다. 그 결과 비급여로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진료과목들로 의사들과 자원이 쏠리는 심각한 불균형을 낳았다. 반대로 돈이 되지 않는 건강보험 진료가 대부분인 응급질환, 소아질환, 공공병원 등은 극심한 의료진 부족을 겪고 있다. 실손보험이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서울 소재 굴지의 대형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 사망과 같은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또한, 비급여 증가는 낭비적 건강보험 재정지출도 늘려 건강보험 재정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5월 14일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실손보험 가입자가 비가입자와 동일한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이용했다면 건강보험 재정에서 연간 3조 8천300억 원∼10조 9천200억 원의 추가 지출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정도 금액이면 아프면 쉴 권리 보장을 위한 상병수당 지급이 당장 가능하다. 우리나라 정규직의 40%, 비정규직의 80%가 유급 병가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2024년 말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상병수당에 소요되는 재정은 최소 986억 원~최대 1조 3천억 원에 불과하다. 이뿐 아니라,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공공병원을 매년 몇 개씩 설립할 수 있다.
건강보험 빅데이터 민영보험사 개방 금지
윤석열 정부는 개인의 동의 없이 건강보험 공단에 축적된 막대한 개인 의료·건강 정보를 민영보험사에 넘겨주려 하고 있다. 건강 정보와 의료 정보는 가장 민감한 정보인데도 가명 처리로 민영보험사들이 마음껏 돈벌이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려는 것이다. 가명 정보가 다른 정보와 결합하면 재식별이 가능해지더라도 말이다.
최근 SK텔레콤의 해킹으로 인한 개인정보 대량 유출은 가입자들에게 심각한 불편과 우려를 낳았고 앞으로 어떠한 피해를 가져올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건강보험 공단의 개인 의료·건강 정보 유출은 이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위험을 가입자들에게 초래할 수 있다. 개인의 거의 모든 정보가 포함된 정보는 성격상 범죄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료·건강 정보 유출로 인해 발생한 피해는 불가역적이다. SK텔레콤의 사례에서 보듯 사기업들은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심산에다가 보안에 대한 충분한 투자를 꺼린다. 민영보험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건강보험 공단의 보건의료 빅데이터는 절대로 민영보험사에 개방해서는 안 된다.
민영보험은 더 활성화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예컨대, 이미 민영보험에 가입된 중증환자들의 고액 보험금을 보험사가 부당하게 지급 거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알려져 있다. 정말 국민과 환자를 위한다면 정부는 민영보험사의 이런 갑질을 강력히 제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혼합진료를 전면 금지해 사람들이 민영보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민영보험은 과잉 의료를 부추겨 의료비를 증가시키고, 의사 등 의료 자원 쏠림과 불균형을 초래하는 등 오늘날 한국 의료체계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민영보험사들의 궁극적 목표는 건강보험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따라서 새 정부는 건강보험에 대한 정부 지원을 대폭 확대하고 기업의 부담을 늘리는 등 건강보험 재정을 확충해 보장률을 높임으로써 건강보험만으로 모든 치료가 가능한, 민영보험이 필요 없는 사회를 향한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건강보험만으로 무상의료 가능할까
민영화로 상징되는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에도 불구하고 선진 자본주의에서 국가의 경제적 비중은 축소된 게 아니라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공공 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주요 경제 전체에서 35~50% 범위를 차지했다.1 우리나라는 이보다는 낮지만 2000년대 이후 꾸준히 늘어나 30% 가까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수준은 2008년 금융 공황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증가했다. 중국과 같은 국가자본주의 국가뿐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떠받드는 서방 정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각국 정부들은 은행과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가장 최근에 영국 노동당 정부는 브리티시 스틸을 국유화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정부 개입과 큰 정부를 금기시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거짓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따라서 언제나 복지를 위해 투자할 돈은 없다는 정부의 말은 새빨간 거짓이다. 국민건강보험만으로 간병비를 포함한 모든 의료서비스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상당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경제 성장을 명목으로 수십조 원의 감세로 기업과 부자들을 지원했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도 “AI 관련 예산을 선진국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증액”하겠다고 발표했다.
장기 침체에 빠진 경제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언제나 노동자·서민들과 빈곤층이다. 거대 기업들과 부자들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지원한다면, 노동자·서민들과 빈곤층을 위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새로 들어설 정부는 가장 고통이 심한 노동자·서민들과 빈곤층을 위한 재정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평범한 대중은 새 정부의 효능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 운동은 차기 정부에 이러한 투쟁을 강력히 요구하고 압박해야 한다.
| 미주 |
- Choonara, Joseph, 2024, “The late, late capitalism show”, International Socialism, Issue:185, https://isj.org.uk/the-late-late-capitalism-show/ ↩︎
월간 <복지동향> 2025년 6월호(제3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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