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의 붕괴 ?
건강보험공단이 의료기관에 지급할 돈이 없어 지급불능 상태에 빠질 것인가? 국가기관이 재정이 없어 돈을 지불하지 못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2000년에 건강보험은 총 수입이 9조 5천억이나 지출은 10조 5천억으로 작년 1년간 1조 90억원의 적자를 보였다. 보험별로는 지역의보 2,899억, 공교가 60억, 그리고 직장의보가 적자폭이 매우 커 7,041의 적자를 보였다. 2000년의 적자는 그나마 기존의 적립금으로 충당하여 버틸수가 있었으나 남아있던 적립금마저도 올해 들어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더욱이 올해 들어 진료비 지출이 1조원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데다가 증가폭이 감소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보험료 수입은 7천 5백억 정도에 불과해 이 상태가 지속되면 올해만 해도 적자는 최소한 4조원에 달할 것으로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적자가 발생하면 보험료 인상이나 국고지원을 확대하면 될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작년의 의약분업 사태의 후유증, 그리고 국민과 시민단체의 반발로 보험료의 대폭 인상은 정치적으로 수용성이 없는 상태에 있다. 기존의 적립금과 국고지원금을 조기 집행하여 적자를 메운다 해도 현 상태에서 획기적인 별도의 조치가 없는 한 올 중반에 가면 건강보험공단은 완전한 재정 고갈과 더불어 지급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상정하기 싫은 가설이지만 건강보험공단이 지급불능 사태에 빠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의료기관들이 재정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진료비 청구 유예를 선언할 가능성은 지금까지의 의료기관의 행태를 보면 거의 가능성이 약해 보인다.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는 건강보험공단에게서 진료비를 받지 못하는 의사들이 의료보험이 없던 1977년 이전 시절로 되돌아가 환자들에게 진료비 전액을 직접 지불하도록 요구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요구를 받은 환자들은 보험료 납부를 거부하는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1977년에 시작된 국가주도의 사회보험방식의 의료보장체계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불행한 가설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태에서 획기적인 정책의 변화 혹은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재정위기의 발생 원인
90년대 중반 지역의료보험은 재정고갈 상태이었으나 의료보험의 총적립금은 3조원을 상회할 정도이었고, 의료보험 통합을 주장하던 측에서는 의보 재정통합을 통해 보험급여를 확대하자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과 5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너무나도 급격히 바뀌었다. 그렇다면 왜 건강보험이 이렇게 급속한 재정위기로 빠져들게 되었는가 ?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수입보다 지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 건강보험의 재정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건강보험의 지출, 즉 의료기관에 지출하는 진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의료보험 진료비가 늘어나는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한 요인이 결합되어 있다.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민간의료기관이 의료공급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 근본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논외로 하고 좀 더 실제적인 논리를 적용하면 건강보험 가입자가 늘어나는 경우(가입자의 증가), 보험급여 범위가 넓어져 진료비가 늘어나는 경우, 의료 이용량이 절대적으로 늘어 나는 경우, 즉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국민들이 병원에 자주 가거나 아니면 의료를 많이 이용할 수밖에 없는 노인인구가 증가하는 경우, 병의원과 약국에 지불하는 수가가 인상되는 경우(수가 인상), 고가의 의료장비와 고가약을 사용하는 경우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여기에 의료공급자가 유발하는 불필요한 의료행위의 증가가 앞의 요인과 밀접하게 결합된다. 최근의 건강보험 진료비 급증은 이러한 일반적인 요인에 작년에 겪었던 의약분업의 여파가 맞물려 있는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일반적인 요인이 어느 정도 진료비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인정한다해도 작년부터, 특히 의약분업을 전후해서 건강보험 진료비가 급증하는 이유로 주목받는 것은 급격한 수가인상과 약가의 증가이다. 의료보험 수가는 95년부터 99년까지 연평균 5.07%가 인상되었다. 즉 연간 5.1%정도 수가가 인상된 것이다. 그러나 작년에 의사파업의 와중에서 99년 11월 9.9% 수가 인상, 2000년 4월 6.0%, 7월 9.0%, 9월 6.5%, 2001년 1월 7.08% 등 1년 2개월 동안 무려 5차례 걸쳐 34.5%의 수가를 인상하였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5년 내지 6년에 걸쳐 인상해야 될 의료보험수가를 1년만에 인상한 것이다. 따라서 최근 진행된 진료비 급증의 일차적 원인은 일단 수가 인상이 지나치게 높았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 의약분업 이후 고가약 처방이 늘어나면서 약가의 비중이 높아진 점도 진료비 증가를 가져온 원인 중의 하나이다. 과거 평균적으로 보면 약가가 진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를 정도였으나 의약분업이후 이 비율이 35% 정도로 높아져 진료비 증가에 기여하였다. 수가 인상과 약가 비중이 진료비 증가를 100%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지난 1년간의 진료비 급증에 가장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한 것이다.
이처럼 진료비는 급증하는 반면, 보험료 수입은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다. IMF 구제금융기를 겪으면서 전반적으로 소득이 하락하자 소득에 비례하여 부담하는 보험료 수입도 증가되지 못했고, 의료보험 통합의 와중에서 보험료 부과, 징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했으며, 그리고 보험료 인상에 대한 국민적 설득력을 정부가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적정한 보험료 인상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수입의 일부를 차지하는 국고지원금이 늘어나기는 했으나 늘어나는 진료비 증가폭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
중장기적인 측면에서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원론적으로 수입의 측면에서 드러나지 않은 보험료 부과 소득의 추적, 단계적 보험료 인상, 그리고 국고지원의 점진적 확대가 가능하다. 지출의 측면에서는 포괄수가제, 총액계약제 등 수가체계의 변경, 상대적으로 영리성을 덜띄는 공공의료기관의 확대, 1차진료의 강화를 통한 질병의 예방 강화 등이 검토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재정위기는 재정절감 효과가 단기간에 나타나는 단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먼저 단기적인 대책으로 가장 쉽게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은 가입자의 부담을 늘리는 보험료 인상, 소액진료비 본인 전액 부담제 도입을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험료가 최소한 50%이상 인상되어야 하며, 소액진료비 자부담제는 장기적으로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의약분업과정에서 나타난 정부 행정의 난맥상 때문에 정치적으로 수용되기 어렵다.
특히 보험료 추가 부담의 정당성이 급여확대에서 찾아지지 않고 의약분업의 후유증과 수가인상에 기인한 것으로 비춰지는 이상 국민적 설득력을 갖기 어렵고, 보험료 인상 절차에 대한 시민사회의 통제 강화로 예전처럼 일방적인 보험료 인상도 쉽지 않다. 국고부담 확대도 그것이 수천억원이 아닌, 4조원에 달한다면 기획예산처에서 도저히 수용하기 힘든 사항이 된다.
지출 측면에서 단기적으로 재정지출을 억제하는 방안으로 우선적으로 검토될수 있는 것은 수가재조정이다. 여기에는 아직도 인하 요인이 남아있는 보험약가의 인하, 의료공급자에게 과도하게 단기처방과 많은 처방을 유도하는 유인을 제거하는 것(예를 들어 주사제 처방료와 조제료의 폐지 혹은 대폭 인하), 원외 처방전 발행의 총량 규제(예를 들어 하루 일정 건수 이상의 처방이 이루어지는 경우 초과분에 대해 수가를 낮게 산정함) 등이 검토될 수 있다. 물론 중장기적으로 병원경영의 투명성이 확보되면 적정한 이윤을 보장하는 선에서 수가의 재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른 하나의 방안은 사후의 급여관리를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허위, 부당청구를 제도적으로 예방할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한데 가장 직접적인 것은 진료비 내역에 대한 정보공개를 강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환자가 인터넷을 통해서 진료비 내역을 알수 있도록 하는 조회시스템 구축하는 것이나, 진료비 내역의 상세한 기재를 강제하는 방안이 가능하다. 그리고 심사평가원의 기능을 혁신적으로 강화하여 진료비 내역에 대한 실사를 강화하는 방법도 있다. 특히 현행 진료비 심사제도가 의료기관의 급여청구에 대한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는데 사실상 큰 역할을 못한다는 점에서 심사평가원의 진료비 심사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현재의 건강보험의 재정위기는 우리 나라 의료체계의 근본적 재편을 요구하고 있다. 극도록 상업화된 의료 시스템, 기본적 건강관리에 대한 공공의료시스템의 취약, 과잉진료와 공급자가 유발하는 의료 수요를 제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행위별 수가체계 등을 혁신하지 않는다면 재정위기의 극복은 난망한 과제일수도 있다. 특히 공급자 규제에 대한 정책 없이 보험료의 인상은 더욱더 어려워 질 것이다. 따라서 향후 정부정책은 수입측면보다 지출측면에서 재정지출 요인을 억제하려는 총체적인 의료비 지출 통제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월간 <복지동향> 2001년 03월호(제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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