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에서 복지국가 바라보기
황규성 l 한신대학교 연구교수
비교적 성공적인 독일의 사회통합
4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통일독일에 내려앉았다. 우리가 독일 통일을 평가할 때 들이대는 거의 유일한 잣대는 경제적 성과다. 통일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독일 경제가 휘청거리자 통일 후유증, 과도한 통일 부담이 평가를 주도했다. 해외에서도 독일이 유럽의 환자에서 슈퍼스타로 거듭나고 있다는 찬사가 이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도 이제 독일 배우기로 바뀌는 분위기다. 독일통일을 바라보는 담론지형은 경제적 성과에 따라 진자운동을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런데 사회통합은 독일이 통일되면서 받아 안았던 숙제 중에서 난이도가 가장 높은 문제였다. 사회통합은 정치통합, 경제통합에 비해 시간도 오래 걸리고 가시밭길도 많은 험한 길이다. 동독출신은 이등국민, 서독출신은 일등국민이라는 오씨-베씨(Ossi-Wessi), 동독향수(Ostalgie)라는 용어가 통일 직후부터 회자되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통합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동서독 지역 간의 격차는 빠른 속도로 좁혀져 가고 있으며 통일을 괜히 했으니 다시 갈라서자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애당초 우려했던 수준은 아니다. 사회통합은 일정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종착역 없는 여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독일은 오히려 성공적인 사회통합의 길을 걷고 있다. 복지국가는 이 길을 안내해왔다.
통일 이전 동서독의 복지
서독 복지국가는 1949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복지제도를 소득보장과 사회서비스로 대별하면 서독은 사회서비스는 약하고 소득보장은 강력했다. 사회보험의 소득대체율은 60%후반에서 70%에 이르렀다. 서독 복지 제도를 떠받치는 것은 고용의 양과 질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 유지되었던 실업률 1%대의 완전고용과 정규직 고용은 사회보험의 곳간을 든든히 채웠다. 그래서 노동과 복지는 같은 마당에서 노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독의 복지제도는 남성이 사회보험에 가입하는 정규직 일자리를 통해 가족을 부양하고 노령․질병․실업․산업재해 등 사회적 위험에 직면했을 때 사회보험을 통해 남성 소득자와 그 가족이 성취한 생활수준을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서독 복지국가의 제도적 설계는 높은 수준의 소득보장 등 강점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사회통합의 관점에서는 취약성이 있었다. 첫째, 복지제도의 핵심 적용 대상자는 사회보험이 적용되는 정규직 임금노동자로서 이들과 타자들 사이에 내부자-외부자 문제를 안고 있다. 비정규직이나 가정주부 등 비경제활동 인구는 복지참여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재분배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제도는 낸 만큼 받아가는 구조로서, 노동시장의 불평등은 복지의 불평등으로 연결된다. 셋째, 성 역할의 분리를 전제한다. 젠더의 관점에서 복지국가를 파악하는 연구들은 독일을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분리된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로 그려낸다. 이런 성격은 사회서비스의 미발달로 이어졌다. 특히 성 분업에 입각한 보수적 가족주의와 가족정책으로 사회서비스, 특히 보육 서비스는 발달되지 못했다.
동독은 국가가 일자리를 보장하는 노동권이 사회정책의 핵심이었다. 사회보험도 있었지만 소득보장 수준은 낮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연금의 경우에도 일단 수급액이 정해지면 좀처럼 인상되지 않아서 실질적인 소득보장 기능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회서비스는 고도로 발달했다. 특히 전국적으로 발달된 보육시설 덕에 여성의 직업생활 참여율은 90% 정도로 세계 최고수준에 달했다.
소득보장의 마력과 사회서비스의 희생
통일은 동독제도를 폐기하고 그 자리에 서독제도를 얹어 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서독의 입장에서 보면 복지에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었고 동독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한 높은 수준의 소득보장제도를 적용받았지만 사회서비스는 희생되었다. 이 과정에서 집단별로 통일의 복지효과가 달리 나타났다. 특혜를 입은 집단은 동독지역의 노인들이었다. 동독지역에서 발생한 연금 수급권을 서독제도의 틀에서 받아 안았으니 통일 대박은 통일 이후 동독지역의 노인에게 주어졌다. 반면 가장 큰 피해를 본 집단은 여성이었다. 동독시절 약 90%에 달했던 여성 고용률은 체제전환 직후 55~57%로 뚝 떨어졌다. 여성의 활발한 직업노동 참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던 보육시설은 다수가 문을 닫았다.
사회정책은 동독지역의 체제전환에 이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상당한 수준의 소득보장이 이루어지면서 동독주민의 생활수준 향상 욕구를 충족시켰다는 점이다. 특히 연금의 경우는 수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수준으로 정책이 공급됨으로써 잠재적인 체제전환 역류요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낳았다. 화폐의 1:1 교환과 후한 연금수급액 및 실업급여는 동독주민이 소득보장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반면, 보육서비스는 체제전환에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이 규범으로 정착되었던 동독이 독일의 동독지역으로 바뀌었지만 가치지향은 급격히 변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독지역 여성들에게 노동시장 상황과 보육 서비스의 후퇴는 성역할에 관한 가치와 실제 사이에 부정교합을 초래했다.
소득보장의 한계와 사회서비스의 발달
저출산, 고령화와 같은 인구구조의 변화와 고실업 등 노동시장의 문제는 독일을 비껴가지 않았다. 1997년에 이르면 독일 역사상 최초로 복지수급자 수가 취업자 수를 넘어섰다. 이러다보니 소득보장정책은 더 이상 확대는 불가능하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2007년에는 연금수급 개시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변경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이는 취업자 수와 연금수급자 수의 불균형을 조정하는 시도로서 연금제도의 틀은 유지한 채 인구구조의 변화에 대처한 정책이었다. 반면 사회서비스 부문은 획기적인 전환을 맞았다. 1990년대부터 이미 노동시장은 성별분업 모델을 지탱하던 남성의 가족부양 능력을 보장하기 어렵게 되었다. 전통적인 가족주의에 의존한 돌봄의 가족화로는 독일이 봉착한 난관을 돌파하기 힘들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에 따라 일과 가정의 양립, 가족정책의 지속가능성 등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보육인프라의 확충은 중요한 정책대안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보육인프라를 통한 여성의 고용률 제고가 시대적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2005년 선거에 의해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이 성립되자 2010년까지 전국적으로 보육시설을 23만개 만들 것이라고 계획이 공표되었다. 기민당 안에서는 보수적인 가족주의를 고수하려는 흐름이 강해 돌봄서비스의 제도화는 당내 반발에 직면했지만 정책은 실행되었다. 보육시설 확충에 대중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를 추진할 주체로서 사민당이 연정의 파트너로 참여한 상태에서 메르켈 총리와 가족부 장관 폰 데어 라이엔 장관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으며 사용자 단체도 일가족 양립을 요구했다는 점 등이 정책의 전환을 가져왔던 요인들로 지적된다.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독일(서독)의 돌봄서비스가 한참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발달한 현상을 두고 복지국가의 뒤늦은 건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득보장에서 사회서비스 확대로
통일 이후 약 15년 정도는 소득보장 일변도의 체제전환 지원방식이었다. 그러나 소득보장제도가 동독의 체제전환을 지원하는 데에는 한계도 분명하다. 무엇보다 소득보장제도는 취업자 수, 고용률, 고용형태 등 고용에 크게 의존하는 데 노동시장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취업자 수와 복지제도 적용 대상자 사이의 비례가 깨진다면 소득보장제도의 지속가능성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동독 체제전환 이후 약 15년 동안 줄기차게 전개되어 왔다.
독일은 사회보험 중심의 사회보장체제가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는 사례로 지적된다. 동독의 체제전환은 서독 복지제도가 안고 있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까지 이식했다. 체제전환 이후 약 15년 정도는 그 한계가 수면 아래로 잠복해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서비스는 유력한 구원투수 노릇을 했다. 특히 동독지역에서 보육서비스가 확대되면서 여성의 고용률은 전반적으로 높아졌고, 그 중에서 3세 미만 아동을 둔 여성의 고용률은 2005년에 43.7%에서 2012년에 60.6%로 급상승했다. 보육인프라 확충은 여성의 고용률 제고에 그치지 않고 동독 주민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정책으로서 체제전환의 정당성을 높이는 유력한 수단으로 작동했다.
복지국가: 수동적 대응과 사회 만들어 나가기 사이에서
통일이라는 디렉토리에는 사회적 위험이 압축파일 형태로 담겨있다. 오래되고 새로운 사회적 위험이 압축파일에서 풀어지는 순간 버퍼링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사양도 좋아야 하지만 양질의 프로그램도 있어야 한다. 소득보장정책과 사회서비스 정책은 독립적인 기능이 있다. 엄격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소득보장정책은 오래된 사회적 위험에 대한 소극적 대응인 반면 사회서비스는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한 대응임과 동시에 사전적, 예방적인 성격을 가진다.
소득보장정책은 대표적인 사후적, 교정적 사회정책이다. 소득보장 사회정책은 경제적 체제전환 과정에서 나타나는 실업, 소득의 상실, 빈곤, 불평등을 사후적으로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에 사회서비스, 특히 보육인프라 확충은 사후적, 교정적 차원의 사회정책이 아니라 사전적, 예방적 사회정책에 해당된다. 사회서비스, 특히 보육서비스는 서비스 수요를 증대시키는 사회구조의 변동에 의해 형성되는 수동적 반영물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사회변화를 촉진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독일 복지국가는 통일 이후 성격이 변화해 왔다. 보수적, 조합주의적 성격으로부터 북유럽형 공동체주의적 요소와 영미형 자유주의적 요소가 가미되어 이중적 전환을 하고 있다는 진단이 있다. 이 가운데 가족정책이나 보육인프라는 공동체주의적 요소에 해당하는데, 이는 동독의 체제전환과 통일로 인해 독일 복지국가 전체의 성격이 변화하는 징후인 것이다. 산업별 단체협약의 약화에 대응하여 최근에 도입된 전국적 최저임금제도 역시 임금소득 불평등에 대한 복지국가적 대응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독일보다 더 나은 통일복지국가 만들기
독일은 자기성찰이 강한 나라다. 통일과 복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통일당시에도 서독의 제도를 일방적으로 동독에 이식하지 말고 동서독 제도 중에서 좋은 점을 골라 새로운 사회보장 시스템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다. 결국 사회서비스는 동독의 제도가 시차를 두고 부활한 사례에 해당된다. 복지국가 개혁담론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논의들은 복지국가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독일인들의 자기성찰임과 동시에 향후 개혁의 방향을 예견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다. 모든 이에게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프라 개념이나 사회보험의 적용범위를 임금노동자에서 시민으로 넓히자는 시민보험 개념들, 기본소득제도 구상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개혁담론들로부터 착안하여 복지국가의 독일적 우회로를 답습하지 않고 신작로를 놓을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통일과 복지국가 건설의 후발국으로 우리가 누리는 이점일 것이다.
월간 <복지동향> 2016년 2월호(제2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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