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호] 권두언_미래로서의 과거 또는 대한민국 역사의 생환 : ‘구태의연한 새로움’을 진정한 새로움으로 변화시키는 법

2004년 9월, 급변하는 세계라는 말이 이처럼 실감난 적이 있을까 싶다. 마치 2004년 8월까지는 아예 없었던 날들이기나 하듯이 우리는 9월 1일부터 새로 시작한 것 같다. 아테네에서 열렸던 올림픽이 끝나서가 아니다. 8월까지 일들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사건과 사건이 터져나온다. 그런데 아무리 숨도 못 쉴 정도로 몰아친다 해도 정신없이 혼비백산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사건마다 새롭지만 정작 변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신차리고 두눈뜨고 뚜렷이 꿰뚫어볼 일이다.

8월 31일 개인회생제. 한국경제는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있고 모든 방면에서 양극화 현상이 또렷하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그나마 급한 신용불량 개인을 회생시키는 ‘새로운’ 정책이 나온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택담보대출의 상환원리금은 최저생계비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개인택시, 중장비 등 생계수단도 처분하는 것을 조건으로 달고 있다. 이런 조건으로 신용불량자들이 회생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의 대책이 다른 정책들도 신뢰하기 어렵게 한다.

9월 1일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는 북오세티아 초등학교 인질극. 언론에서 보도한 인질 수 300명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데다 어린이들까지 사정없이 폭탄 아래 늘어놓은 ‘아주 새로운’ 테러유형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끝나고 보니 죽은 아이들만 300명 넘는 ‘아주 새로운’ 참사였다. 러시아라는 국가는 이들 어린이들의 미래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피랍 사실이 보도되자마자 재빠르게 이라크 추가파병을 재확인한 침략‘전쟁참여’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묵인, 방조 아래 야만적으로 살해된 우리 청년 김선일의 미래가 대한민국의 미래에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저쪽 땅 어린이들의 죽음이 러시아의 미래를 가둔 것처럼, 여기 이 땅의 청년 김선일의 죽음이 대한민국의 미래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9월 2일 대한민국 대법원.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을 재판하면서 판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정보원의 일까지 떠맡았다. 그뿐만 아니다. 국회에 대고는 법은 이렇게 정해라, 저렇게 하면 안 된다, 제법 길게 주문을 늘어놓은 ‘정말 새로운’ 면모를 과시했다. 단 이 대법원의 새로운 행보 덕분에 대한민국 국가와 국민의 생활에서 진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북한이 직 · 간접적으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 체제를 전복하려고 시도한다”는, 그 전혀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발언자가 입에 올리니 참으로 새롭게 들렸다. 그러면서 “오늘날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이 늘어나 통일전선의 형성이 우려된다”는, ‘그야말로 새로운’ 정보까지 판결문에 박아넣었는데, 그 북한동조세력이 누구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으니 결국 어디로, 어떻게 새롭게 변해야 할지 오리무중인 것은 21세기 초두 지금도 냉전시대 예전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사태들은 그것으로 충분히 절망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하는 진짜 이유는 지난 3월에서 5월까지 두 달 남짓 이 나라를 온통 뒤흔들었던 사상 초유의 대통령탄핵사건을 겪으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헌정시스템을 확실하게 점검해 보고자 했던 잡지의 주제기획이나 특집 자체가 앉은자리에서 통째로 과거의 일로 밀려버릴 우려 때문이다. 단 한 달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6개월 뒤에 나올 저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기획하였으니 이런 짧은 기획실력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한 가지 아주 역설적인 이유에서 희망을 잃지 않기로 했다. 지금 보았듯이 새로운 것들이 아무리 쌓여도 변한 것은 별반 없다는 것이 건국 이래 반공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관철되어 온 ‘변화-비변화의 법칙’이다. 그러니 과거에서부터 쌓여온 것이야말로, 아니 이 나라 역사에서 가장 과거의 것이 가장 새로운 것이 된다. 그것은 항상 그야말로 ‘변치 않는’ 자태로 이 나라, 이 사회를 압도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항상 새로운 이 어두운 역사들, 전쟁과 가난의 폐허를 딛고 ‘한강의 기적’을 달성하면서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시대를 열어 평화적 정권교체를 두 번이나 이루어낸 지금도, 항상 새롭게 그 진로의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있는 그 과거들, 이것은 아직도 옛것이 되지 않는 현재형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경제기적과 민주주의이행이라는 ‘양지의 대한민국’이 있다면, 극우반공사회라는 어둠과 비극의 대한민국이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과거의 비극과 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제대로 된 ‘과거청산’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부끄러운 나라다. 우리는 그런 나라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건국의 주역이 되지 못한 채 여전히 우리 국민들의 마음에는 귀국조차 하지 못한 느낌을 주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제 과거의 전쟁이니 잊어버릴 만도 하지만 죽어서 이제 없어진 이들답지 않게 대한민국 어디를 파헤쳐도 그때 맞은 총탄을 앙상한 해골에 담고 새로이 나타나는 무고하게 학살된 양민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살 만큼 살았는가 싶은데 자신들의 실상을 밝히려고만 하면 이런 이유를 들이대고 저런 세력을 앞장세워 어떤 때는 애국단원으로, 어떤 때는 ‘원로’로, 그 명칭도 새롭게 나타나는 친일파, 독재부역자, 수구냉전세력들…. 과거는 이렇게 우리의 현재에서 항상 새롭지만, 그 자체로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이렇게 새로운 과거’가 시도때도 없이 나타난다는 것은 결코 온당한 일이 못된다. 이미 돌아갔어야 했을 만한 사람들이 아직도 ‘원로’로 살아남아 ‘살아 있는 망령’으로 매체를 타면서 배회하는가 하면, 그때 정말 돌아가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제대로 무덤조차 갖지 못한 죽임을 당한 채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며 벌떡벌떡 일어나는, 그런 대한민국이 과연 제대로 된 나라꼴을 하고 있다고 하겠는가.

이들 과거의 비극적 사연들은 하나같이 ‘대한민국국가’와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국가’가 존재하는 한, 국가에 엉킨 이 문제들은 그 자체 해결되지 않는 한 언제나 문제로 남고 해결을 요구해 올 것이다. 학살, 고문, 탄압, 처형 등 그 어떤 단어도 국가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이 대한민국국가로 인해 생긴 문제는 응당 이 국가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런 문제를 생겨나게 만든 힘 이상의 힘을 쏟아 그 죽음과 비극의 진실들을 제대로 밝혀내야만 한다. 그래야 이 대한민국국가가 과거-현재-미래를 온전한 모습으로 이어가는 ‘자기 역사’라는 것을 가질 수 있다.

자기 역사를 살려내지 못하고 묻어버리는 국가는 그 묻어버리는 역사만큼이나 ‘없(어지)는 국가’이다. 지금 우리는 조선왕조국가 때의 일들을 갖고 언성을 높이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없는 국가’ 때 일어난 일들이야말로 역사가가 학술적으로 풀어갈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직 ‘있는 국가’이며 앞으로도 ‘있어야 할 국가’이다. 따라서 일제하 전시 성노예(‘위안부’)에 대한 망언만이 문제가 아니며, 과거사문제를 역사가들의 학술적 문제로 풀어가자는 억지주장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로 보인다. 이는 바로 이 대한민국국가의 현재성, 그 위신과 권위를 부정하려는 ‘반국가적’ 발상, 다시 말해 민주공화국의 근간과 존재이유에 직결되는, 그 어느 사안 못지않게 중차대한 공적 사안을 한갓 사적 사안으로 격하시키고 주변화시키려고 하는 발상, 외견상 점잖고 민주적인 것 같으면서도 기실 노골적으로 문제 자체를 거세하려는 반민주적 발상이다.

우리의 현재가 직면한 과거사문제는 결코 망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확한 사실과 기억의 복원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진실의 규명은 죽은 자, 희생당한 자에 대해 살아 있는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기본책무이기도 하다. 살아남고 승리한 것이 곧 진실은 아니다. 역사는 죽고 패배한 것에 더 많은 진실이 있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 묻힌 진실을 밝혀내고 살 속 깊이 박힌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다시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도록 교훈을 얻어내야 하며, 이 교훈을 망각하지 않도록 후손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죽은 역사를 생환(生還)시키고 민주공화국의 기틀을 바로잡는 일, 대한민국을 떳떳하게 살 만한 나라로 만드는 일을 공론의 빛 속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단견을 버리고 긴 안목으로,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여 정리해 나가야 할 공화국의 중차대한 공적 사안과 마주하고 있다.

이번 호의 편제는 어느 때보다 단순해졌다. 주제기획과 특집은 모두 직 · 간접적으로 “탄핵의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기억은 우리의 현재다. 탄핵정국 내내 나타났던 대한민국 시민사회와 그 안에 형성되었던 공공영역의 다양성과 역동성은 결코 한때의 일시적인 바람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 사회 저변에 폭넓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주주의 기저층을 확인하게 만든다. 광장의 촛불은 이를 상징한다. 이것이 주제기획과 특집을 구성한 우리들의 기본인식이었다. 두꺼운 냉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저 억센 4월, 5월, 6월로 이어진 3대 시민항쟁의 역사에 의해 개척된 민주주의 황톳길을 따라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시민사회, 직업정치꾼들의 어리석은 수작을 용납하지 않는 각성된 시민사회운동과 시민의식,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이 땅에서 일어날 모든 변화의 진보적 추동력으로 작용할 것을 기대해도 좋은, 그래서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항상 ‘진정 새로운 새로움’으로 이어가게 해줄 참여, 연대, 평화, 생태의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의 실질적 초석임을 우리는 믿는다.

독자들께 이번 호 이후 편집진에 새로운 변화가 있게 됨을 알려드린다. 그 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유아기 『시민과세계』가 제 발로 걸을 수 있도록 심장 역할을 맡아 헌신적으로 일해 왔던 홍일표 간사가 재충전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그렇지만 곧 새 간사가 충원될 것이고 또 권혁범, 전창환 두 분이 안식년을 마치고 되돌아오게 된다. 다음 호부터는 다시 처음처럼 시작하는 마음을 갖고 알찬 잡지를 만들 것임을 독자들께 다짐 드린다.

2004년 9월

공동편집인 이병천ㆍ홍윤기

이병천, 홍윤기 / 공동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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