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1 2011-07-18   2787

[심층분석2] 복지국가와 젠더정치

김영미 | 동서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

 

복지, 한국 정치의 상징

 

2011년, 복지는 한국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라기보다는 2008년 촛불집회, 2010년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이어져온 흐름이며,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매김하였다. 2008년 촛불집회는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라는 먹거리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분출된 것이다.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제기된 초등학생 무상급식 제안은 기존의 선별적 복지에 대한 반발, 보편적 복지에 대한 요구에 부합한 것이다. 그리고 2011년 현재, 각 정당들과 정당 내 유력 대권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복지비전과 보육, 교육, 의료 등 복지정책안들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겨냥해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지만, 그만큼 복지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높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이 보여주는 바는 첫째, 시민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한 권리 요구가 중요한 공적의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자산, 교육, 주거, 소비, 의식 등 다방면에서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과 그 속에서 증폭되고 있는 시민들의 삶에 대한 위기의식과 불안감이 놓여있다. 자녀보육과 교육에 대한 불안, 일자리에 대한 불안, 건강과 안전에 대한 불안이 아이를 낳고 키우고 교육하고 먹이는 것, 건강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보호받는 것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문제들, 그러나 지극히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와 관련된 권리들을 정치적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둘째, 이러한 문제들은 특히 여성들의 생활세계와 밀접하게 관련되는데, 여성들의 삶의 문제가 주요 공적의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2000년대 ‘저출산 위기 담론’이 제기된 이후 한국 사회의 주요 정책의제가 되어온 저출산 문제와 그에 따른 모성과 노동, 일가족 양립, 성별분업 등에 관한 논의들 역시 젠더문제가 얼마나 중요하고 정치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셋째, 생활에 밀착된 미시적인 사회적 권리에 대한 요구를 통해 평범한 여성들이 정치적 주체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2008년 촛불집회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는데, 촛불집회를 주도한 것은 십대 여학생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들, 각종 인터넷 모임의 여성 회원들이었다. 그리고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제기된 무상급식 논쟁에서 무상급식 실시의 강력한 지원군이 된 것은 초등학생 자녀를 둔 여성들이었다. 이 여성들을 광장으로 이끌어낸 것은 생활세계와 밀접한 의제와 함께,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형식적 젠더평등’과 ‘실질적 젠더불평등’ 간의 괴리였다. 같은 비용을 지불하고 동일한 교육을 받고 능력에 있어서는 오히려 앞설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 내에서는 채용, 승진, 임금상의 차별을 받고 있고, 가정 내에서는 전통적 성별분업이 유지되면서 가사와 양육의 책임을 전담하고 있는 것이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형식적 민주화 과정에 일정한 기대를 건 것도 사실이지만,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기초한 한국 사회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IMF 경제위기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촉진시켰다.

여성, 복지국가 실현의 주체?

 

복지국가 실현은 현재 한국 사회의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비전과 정책전략, 정치전략(주체세력, 동맹세력)에 대해서는 어떠한 합의된 바도, 논의된 바도 없다. 어떤 세력이 어떤 비전과 전략을 갖고 국민적 동의를 획득할 것인가에 따라 실현될 복지국가의 유형은 달라질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과정이 단순히 시급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대중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는 정책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자 하는 가치를 합의과정을 통해 도출하고(예컨대 경제성장, 무한경쟁, 차별과 배제보다는 인간다운 생활, 행복한 삶, 평등과 연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정책을 구상하고, 정치적 주체세력 혹은 동맹세력을 형성하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주체는 누가 될 것이며,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인가? 볼드윈(Baldwin, 1990:297)은 복지개혁을 위한 연대를 구성하는 데 있어 계급보다 ‘공공의 위험’이라는 공통된 이해가 더 크게 작용한다고 했다. 앞서 살펴본 2008년부터 현재까지 일련의 사회현상들을 통해 드러난 우리 사회의 ‘공공의 위험’은 고용, 일-가정 양립, 출산, 보육, 교육, 의료 등 여성들이 경험하는 생활세계 안에서의 위험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한국은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한 상태에서 1997년 IMF경제위기 이후 급격하게 이루어진 노동시장의 유연화, 비정규직의 증가, 가족구조의 변화, 저출산·고령화 진전, 여성의 노동시장 증가와 돌봄 위기 등 근대적 구(舊) 사회적 위험과 탈근대적 신(新) 사회위험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이중적인 사회적 위험(dual social risk)을 경험하고 있다. 과거의 사회적 위험에 해당되는 실업(미취업)의 위험은 저학력, 저소득층, 여성, 청년층이나 노년층에서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적 위험으로 분류될 수 있는 실직가능성, 일-가족 갈등이나 가족해체 및 일상생활의 위험, 경제적인 생계의 위험 및 생활수준의 변화와 같은 새로운 사회적 위험은 기존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일치하지는 않으며, 새로운 위험의 담지자가 된 여성이나 전문·관리·기술직과 같은 고학력자들이 종사하는 직업군, 은퇴 및 실업자에게서 높게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사회적 위험은 생애주기 상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일상의 생활 세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회적 위험은 보편화되고 있지만, 사회적 위험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은 미약한 상황이다. 물론 1997년 IMF경제위기 이후 사회안전망 구축에 대한 사회적 요구로 인해 복지정책을 확대해 가고 있으나, 삶의 불안 속에 놓인 국민들이 체감할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할 수 있다. 앞으로 고용가능성과 실직가능성, 일가족 양립과 돌봄 등 새로운 사회적 위험은 우리 사회의 정책적 의제로 그 중요성을 더해갈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의제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전략은 친복지동맹의 중요한 전략이 될 것이다.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복지급여가 보편주의를 표방할수록, 질적 수준이 높을수록 친복지 성향은 높아질 것이고, 공공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가 민간 부문에 고용된 자보다 친복지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남성보다 여성이 복지서비스 수급자가 될 가능성이 높고, 공공부문 고용 가능성이 높게 나타나 여성의 친복지 성향을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제도의 구축과 충분한 복지급여와 질 높은 복지서비스, 좋은 공공부문의 일자리 창출은, 복지정책을 통해 친복지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복지제도는 주로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사회보험은 기본적으로 노동시장 지위를 반영하기 때문에, 노동시장 지위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여성들은 복지수급자로서의 지위를 남성보다 덜 향유할 가능성이 있다. 2010년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49.4%로 10년 동안 낮은 수준으로 계속 정체되고 있다. 2009년 8월 통계청에서 실시한 경제활동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65.6%이고, 비정규직 노동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을 넘어서 53.5%에 달한다. 이와 함께 여성 노동자의 37.6%가 즉, 10명 중 4명이 저임금 노동자이다. 여성의 절반이 노동시장으로부터 배제되어 있고, 그 중 70%가 비정규직 노동자인 상황은 사회보험 수급자로서의 여성의 지위가 낮음을 보여준다. 사회서비스 수준 역시 낮은 상황에서, 여성의 복지수급자로서의 친복지 성향을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회복지서비스의 미발달은 여성들이 공공부문 일자리에 종사할 가능성도 떨어뜨린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공공부문 사회복지서비스 일자리에서 서비스 제공자로서 친복지 성향을 갖는다는 논리구조보다는 오히려 사적 영역에서 무급으로 어린 자녀와 노인·장애인에게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로서 돌봄을 사회화하고 지원하는 복지국가 실현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갖는다는 논리구조가 훨씬 더 설득력을 갖는다. 이러한 사실은 여성을 복지국가 동맹의 주체로, 지지 세력으로 만들기 위한 복지국가 전략 속에 여성의 노동자로서의 지위 강화, 보편적 사회서비스의 확대, 공공부문의 좋은 일자리 창출 등이 포함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위/아래로부터의 여성 주체

 

그렇다면, 새로운 위험과 불안을 공동으로 경험하고 있는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은 친복지동맹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대다수 노동자, 시민들이 삶을 위협받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위기이지만, 위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 위험의 담지자 중 하나인 여성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과정에서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제까지 한국의 여성운동은 국가와 정치구조를 활용해 여성친화적인 정책을 만들어 왔고, 여성운동이 제기한 부분들이 법적, 제도적 개혁의 형태로 수용되어 왔다. 1990년대 여성운동 단체들은 국가기구에 직접 참여하여 여성의 지위와 삶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입법과정에 참여했다. 1990년대, 2000년대에 걸쳐 이들의 노력에 의해 수많은 여성, 복지, 남녀평등에 관한 법률들이 제정되었고,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기존 여성운동이 중심이 되어 실시한 법제화와 제도화를 통해 형식적(법적) 젠더평등은 어느 정도 달성했다. 하지만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 간에 일정한 갭이 존재하듯이, 실질적 젠더평등은 여전히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현재 제기되고 있는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관한 이슈들, 여성의 새로운 이슈들을 받아 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젠더정치 전략을 수립하고자 할 때 아래로부터의 역동적인 주체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연대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사회 양극화에 따른 여성의 빈곤화의 심화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이주여성 문제와 지구화되고 있는 성매매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 등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 이성애와 동성애, 성매매와 성노동, 낙태, 대리모 문제, 난자매매와 불임시술 지원의 문제, 기혼여성과 비혼 여성, 노동계급 여성과 중산층 여성, 이주여성 등 여성의제의 경합 그 자체는 여성운동이 풀어가야 할 새로운 의제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최근 이제까지 늘 복지 대상, 복지 수혜자, 유권자 등 ‘객체(object)’로 존재해 온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복지에 대한 요구를 하는 정치적 행위 ‘주체(subject)’로 등장했다.

젠더정치의 필요성

 

이제까지 사회정책과 복지국가 논의에서 ‘여성’은 부가되는 존재였다. 그 결과, 형식적 평등은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실질적 평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 이슈가 부가되는 것을 넘어서서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논의에 젠더 관점이 통합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공사분리,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들이 배제되고 있는 문제, 불평등한 젠더관계의 문제와 삶의 문제가 정치적 의제가 되지 못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향후 복지국가 전략 속에 젠더평등을 포함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는 것 즉, 젠더정치(gender politics)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제도화된 정치(의회나 정당 등)를 넘어서는 삶의 정치를 내포해야 한다. 구체적인 시민의 삶 속에서 위협받고 있는 사회적 권리들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기본적인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노동에 대한 권리, 자녀 양육에 대한 권리 등이 실질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대안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둘째,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향후 복지국가 실현의 대안적 주체로 언급되는 이들은 단일하지 않다. 여성 내부에서도 계층, 인종, 문화적 배경에 따라 그들의 욕구는 상이하게 나타난다. 앞으로 복지동맹을 형성할 때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단일한 주체세력을 상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며, 다중화된 주체 세력 간의 수평적 연대에 기반해야 할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인정일 것이다. 그 후, 공통된 욕구와 이해관계를 도출해내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 아래에서, 여성을 복지국가 실현의 주체 혹은 동맹세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사회복지서비스의 확충을 통해 복지제도의 수급경험을 통해 여성을 포함한 많은 시민들을 친복지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보육, 교육, 의료 등 분야의 사회복지서비스를 확충하는 것은 사적 영역에서 여성들이 개별적으로 수행해 오던 역할 부담을 덜어주는 동시에,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을 통해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때 여러 연구들이 지적했듯이 제도는 보편적이어야 하고, 서비스의 질적 수준이 높아야 하며, 여성들에게 제공되는 일자리 역시 공공부문에서의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이어야 기존 가설대로 친복지적 태도를 보이고 복지국가의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기존의 노동운동, 시민운동, 여성운동, 여성노동운동 조직들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의 경험에 기반한 부모공동육아, 생협 등 풀뿌리 조직들, 그리고 촛불집회를 주도했던 인터넷 커뮤니티들까지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요구들을 활성화 하고, 이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요구들이 향후 한국 사회를 보다 인간적인 방향으로 추동해 갈 원동력임을 여러 경험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시민의 일상적인 요구들을 담아낼 수 있는 정치·정당제도의 혁신이 필요하다. 정당과 국회를 정쟁의 장이 아니라, 정책논쟁의 장으로 만들어내어야 앞으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비전과 복지국가 전략에 대한 국민들의 의견들을 제대로 받아 안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선거개혁을 통해 여성 대표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

월간 <복지동향> 2011년 07월호(제1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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