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법원개혁 2005-07-02   1776

법원, 경영권 세습 걱정되나 법적 문제없다?

[참여연대-한겨레 공동기획] 재벌 앞 작아지는 검찰 ④ 법원도 자유로울 수 없다

2월14일, 재계와 법조계의 눈길이 온통 서울중앙지법에 쏠렸다. 이날은 형사합의25부(재판장 이현승)가 수년을 끌어온 삼성 에버랜드 임원들의 배임 혐의에 대해 선고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유죄냐 무죄냐’에 따라 전환사채나 신주인수권부사채를 헐값에 넘기는 방식으로 부를 ‘세습’해온 재벌기업들의 고질적 병폐에 제동을 거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재판이었다. 그러나 판결문 초고까지 다 써놨다는 재판부는 이날 전격적으로 선고를 연기했다. 2주 전인 같은 달 2일에 이은 두번째 연기였다. 재판부는 “기초 사실관계를 추가심리하고 여러 법률문제를 깊이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연기의 이유를 설명했다.

변칙 증여 관련 재벌 손들어주는 판결 잇달아

“법 논리 치중 경제력 집중 폐해 눈감아” 비판

선고연기된 “에버랜드 사건” 결과 관심 집중

재판부의 연기 이유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 사건은 5년 전에 전국의 법대교수 43명이 무려 10여년 전에 있었던 일을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검찰은 고발 3년반 만에 기소했다. 법원 심리도 1년2개월을 끌어왔다. 게다가 재판 직후에는 담당 재판부가 모두 교체되기로 예정돼 있었다. 새 재판부가 다시 방대한 사건기록과 내용을 검토·심리해 선고를 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재판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참여연대는 “부담스러운 재판을 다음 재판부에 떠넘기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재판이 장기화되는 건 아닌지 유감스럽다”고 비판했다. 실제 이 사건은 5개월여가 지난 지금까지 결심조차 못하고 있다.

법원은 그동안 검찰이 사전에 대부분의 재벌사건을 알아서 정리해준 바람에, 상대적으로 ‘재벌 봐주기’ 혐의를 덜 받았다. 하지만 법원이라고 이런 혐의의 무풍지대는 아니다.

특히 지난해 대법원에서 내린 삼성 그룹 관련 판결은 미리 결론을 정해놓고 논리적으로 꿰맞췄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대법원은 지난해 6월 “1997년 삼성전자의 전환사채 발행은 무효”라며 참여연대가 낸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회사 지배권이양을 위해 이재용씨한테 전환사채를 헐값에 넘겼다는 의심이 들지만, 발행무효로 볼 만큼 중대한 흠결은 아니라는 이유였다. 대법원은 몇 달 뒤 삼성에스디에스가 “230억원의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이씨한테 증여한 것은 ‘부당지원 행위’가 아니다”라며 공정위를 상대로 낸 과징금부과 취소소송에서도 “공정거래를 해친 증거가 없다”고 삼성 쪽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은 비상장주식이나 사채를 저가발행해 변칙증여에 이용해온 재벌들의 관행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마련해줬다. 송옥렬 서울대 법대 교수는 “법원이 회사법이나 공정거래법상 사채를 통한 경영권세습이 가능하다는 법적 기준을 제시해준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전환사채발행 무효소송은 거래의 안정과 법적 안전성을 해칠 위험이 크다”거나, “공정거래법상의 부당지원행위는 단지 증여로 경제력 집중기반·여건이 조성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계열사에 투자하는 방식 등으로 공정경쟁을 저해할 때 성립한다”는 이유로 ‘엄격한’ 법해석을 강조했다. 재벌의 변칙증여에 몇몇 우려되는 면이 있지만, 법적으로 문제삼기는 곤란하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호영 한양대 법대 교수는 “법원이 재벌의 관행과 현실에 ‘눈을 감은 채’ 판결했다”며 “수십년에 걸쳐 경영 후계자에게 변칙적으로 부를 이전하는 행위 자체가 공정경쟁을 해치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실제 삼성, 현대, 엘지 등 내로라하는 재벌들은 지배구조 안정화를 위해 사채나 비상장주식을 변칙증여해 재판을 받고 있다. 전환사채 발행 무효소송을 맡았던 김진욱 변호사도 “전환사채를 처분하지 못하도록 가처분결정이 이미 내려져 있어, 거래할 대상 자체가 없는데 대법원이 ‘누구를 위한’ 거래의 안전성을 고려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변칙증여’에 대한 잇따른 판결들은 “변칙증여를 형사법이나 공정거래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법원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판사는 “증여받은 만큼 세금을 물리면 될 일 아니냐?”고 말했다. 대법원이 ‘과징금 부과는 부당하다’고 판결한 삼성에스디에스의 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사건에 대해, 행정법원이 증여세를 부과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문제는 이런 정도로는 기업들이 눈도 꿈쩍 않는다는 것이다. 삼성 관련 사건을 심리했던 한 부장판사는 “솔직히 삼성은 증여세나 과징금 소송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다”며 “이씨의 후계구도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에버랜드 사건만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면 ‘돈이야 얼마든지 내면 그만’이라는 게 그쪽의 솔직한 심정 아니겠냐?”고 말했다.

삼성 쪽이 그렇게 걱정한다는 에버랜드 사건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8~9월께 선고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법원은 이미 지배권 확보를 위해 계열사 주식을 비정상적으로 맞교환했던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이나, 전환사채 등을 헐값에 배정받은 유일반도체와 맥소프트뱅크 사건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린 상태이다. 과연 최고의 재벌기업이 관련한 사건에서도 같은 판결을 내릴까?

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인 차병직 변호사는 “재벌의 변칙증여나 경제력 집중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분위기에 걸맞게 법원도 ‘가치판단’의 기준을 바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형선고 받는 재벌총수 없다

‘경제발전 기여’ ‘경영상 판단’ 등 명분 집행유예

“사회적 책임 무거운 만큰 처벌도 엄해야” 지적

‘경제 우선’ 논리는 검찰 뿐 아니라 법원에서도 그대로 활보한다. 법원은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거나, “경영상의 판단”이라는 이유 등을 내세워 법정에 선 기업인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서울고법 형사6부는 지난달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에게 집행유예형을 선고해 ‘실형’의 족쇄를 풀어줬다. “대부분의 손해를 원상회복시키거나 보전절차를 밟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최씨는 1조9천억원대의 분식회계를 지시하고 해외계열사에 1114억원의 손해를 떠넘긴 혐의(배임)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유·무죄 판단이 1심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형량은 ‘뚝’ 떨어졌다. 재판부는 “이른바 ‘과거의 잘못’이더라도 경영의 공정성을 해치는 범죄는 엄중한 제재가 필요하다. 계열사를 지배주주의 사유물로 여긴 나머지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분식회계를 통해 경제체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린 행위를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고 꾸짖었으나, 이는 대폭 감형을 위한 ‘너스레’에 불과했다.

앞서 법원은 불법정치자금 10억원을 건넨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항소심에서도 “엄청난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한생명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이유를 들어 벌금형을 선고했다.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5년 동안 보험사 임원이 될 수 없는 관련 규정을 감안한 판결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재벌 총수가 아닌 기업 임원들에게도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기는 마찬가지다. 김동진 현대자동차 부회장, 이학수 삼성 부회장 등 불법대선자금에 연루돼 법정에 선 주요 기업인들에게 법원은 “정치인의 요구에 따라 수동적으로 돈을 건넸을 뿐”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형을 선고했다. 그나마 이들은 5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특별사면됐다.

‘과거의 업적’도 법원이 기업인들의 잘못을 덮어주기 위해 동원하는 논리이다. 김성필 전 성원토건 회장은 4200억원의 사기대출과 200억원의 횡령, 3년 동안이나 도피했다는 등의 불리한 조건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외환위기 전까지 서민을 위한 임대아파트를 건설하고, 유치원 목욕탕 등 공익시설을 기부했다”는 이유로 항소심에서 형량을 절반이나 감형받았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보통 형사사건과 똑같은 잣대로 기업인들의 경영판단을 단죄할 수 있는지를 놓고 법원 안에서도 엇갈린 의견이 존재한다”며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기업인이 차지하고 있는 책임과 의무를 생각할 때, 법원이 가벼운 형량을 선고하기보다 이들을 엄하게 다스리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한겨레 황예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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