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개혁 2006-04-03   1426

[배심제 경험기 1] “준비할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국민참여 형사재판’, 즉 배심재판에 대한 시민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 4월 12일 열리는 모의배심재판 방청을 돕기위해 모의배심재판에 먼저 참여한 경험이 있는 두 분의 경험기를 소개합니다.

이 글을 쓰신 이귀보 님은 작년 12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실시한 제2차 국민참여모의형사재판(모의배심재판)의 리허설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한 분입니다. 제2차 모의재판의 리허설은 작년 11월 24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귀보 님은 참여연대 간사 경험이 있으신 현재 40대 후반의 주부이시며, 법률관련 직역에 종사한 경험은 없는 분입니다. 편집자 주

깊어가는 어느 가을밤 자정께, 20대 후반의 한 택시기사가 단란주점 앞에서 20대 중반 여성을 태우고 가다가 목적지 근처에 정차한 뒤, 잠들어 있던 여성손님을 성폭행하려다 잠에서 깬 여성이 반항하자 폭행하여 상해를 입히고 핸드백을 훔친 혐의(강간치상 및 절도)를 받고 있으나 택시기사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모의재판 리허설 당일에 들은 사건 내용이었다.

작년 말 부산에서 예정된 제2차 모의배심재판을 앞둔 리허설에 중년 아줌마 배심원이 필요하다며 배심원 참여 제의를 받았다. 모의재판 배심원? 호기심이 발동해 선선히 응해 놓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서양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법정 장면과 같은 것일까? 괜히 엉뚱한 얘기로 망신만 사는 건 아닐까? 아니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맹하니 있다가 오는 건 아닐까? 배심원 제도 도입이라… 이는 우리나라 사법제도 틀을 바꿀 정도로 굉장한 일일거야. 그래서 이런 모의재판으로 그 가능성을 떠보려는 중요한 행사일 텐데. 괜히 간다고 했나?

언젠가 뭔가 모의재판이 있었다는 뉴스만 얼핏 기억날 뿐 전혀 생각나는 그림이 없었다.

“뭘 준비해야 하나요?”

역할에 충실하고자(실은 망신이라도 면할까 싶어 ^^) 다루는 사건에 대해 미리 공부라도 해 갈까 싶어 물었더니, “없습니다” 다. 아니 미리 알면 오히려 안 될 것 같은 뉘앙스다. 필요한 건 평범한 시민으로서 건강하게 생각하고 상식선에서 판단하는 거란다.

그래 한번 가보지 뭐, 생뚱맞게 임성훈 씨가 진행하는 ‘솔로몬의 지혜’에 나오는 배심원들이 떠오르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때 이른 점심을 한술 뜨고, 모의재판 장소에 가니 입구에 좌석 배치도가 붙어있다. 판사, 검사, 변호사, 피고, 증인, 배심원1, 배심원2,… 아마 ‘배심원4’였을 거다, 내게 붙여진 이름이. 두 시간 잡고 나선 길이 막히는 데가 없어 좀 일찍 간 탓일까. 커다란 방에 혼자다. 할 일도 없고 긴장도 되어 슬그머니 일어나 창에 쳐진 롤스크린을 들추었다. 어머! 바로 아래가 조계사 마당이네, 저기가 안국빌딩이고,,, 안국빌딩 신관3층…ㅎㅎ 아직도 입에 붙어 절로 나오네, 내려다보이는 인사동, 안국동 모습이 아름답고 정겹다. 마음이 좀 편해진다.

당일 재판과정에서 기록한 것들은 모두 회수해간 까닭에 기억에 의존해 보면, 배심원에게 누누이 강조한 것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증거에 따라 판단해 달라’는 주문이었다고 기억한다.

거기엔 어떤 선입견이나 주관적 경험이나 편향적 지식으로 예단하는 건 금물이란다. 롤스가 얘기한 ‘무지의 베일’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 듣는 사건에 대해 검사와 변호사의 주장을 꼼꼼하게 들으며 양쪽에서 내미는 증거와 진술에 집중해 모순이 있나 살펴서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판결을 내리는 것이 배심원이 할 일이었다.

재판이 시작되고, 사건을 들으면서 이거 큰일 났구나 싶었다. 강도치상 및 절도 형사사건이란다. 이런 무시무시한 사건을 내가 판결을 해야 하다니, 머리끝이 서는 듯했다.

숨을 죽이고 부지런히 받아 적었다. 넋 놓고 듣다보면 상대방 감정에 빠져 낭패를 볼 것 같아 피고나 피해자는 가능한 외면했는데, 오히려 눈을 마주치며 진실을 말하는지 살펴보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생각이 복잡했다. 시간, 장소, 목격자, 증거물 등등. 서로 주장이 부딪치는 부분이 무엇일까, 처음엔 머릿속이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어지러웠으나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뭔가 가닥이 잡히는 듯했다.

양쪽의 진술과 주장이 끝난 후, 판사는 배심원단에게 앞에서 얘기했듯이 합리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증거에 의해 판결을 내려 줄 것(아마 무죄추정의 원칙이지 싶다)과 그러기 위해 허심탄회하게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토론할 것을 주문하고 배심원단만 남겨 두고 모두 퇴장했다.

사실 이런 일이 생소해서 어색한지라 서로 누군가 말 꺼내기만 바랐지만, 그 자리에 뽑혀온(?) 책임감도 다들 있는지라 이내 자신의 생각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아가며 얘기하다보니 신기하게도 의견이 좁혀지고 있었다.

검사 측의 증거가 피고를 유죄라 할 만큼 확실하지 않고 허술하다는 것이다. 피고가 무죄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지만 그렇다고 부실한 증거로써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별다른 이견 없이 의견이 일치하는 바람에 오히려 모두들 당황스러운 듯했다. 다시 살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뭔가 치열하고 긴 공방을 예상했던 것일까?

다시 재판장과 관련자들이 입장하고 배심원단 대표는 재판장에게 무죄를 전달했다.

건물을 나서니 깜깜한 저녁 찬 바람이 남은 열기를 순식간에 앗아가 버린다.

lee.jpg이렇게 호기심에 시작한 나의 배심원 참가기는 조금은 아쉽게 끝을 맺었다.

이게 만약 진짜 재판이었다면 그 판결에 후회는 없을까?

우리사회에서 배심원제도가 가능할까?

피고가 인정할 수 있는 배심원단은 어떻게 꾸릴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건전한 상식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하며 살고 있을까?

건전한 상식과 합리적인 판단이 무엇일까?

사회 변화에 나도 영향을 주고받음을 새삼 느끼며, 누구에게라도 권하고 싶다.

강추 모의재판!!! 한번 가 보지 않으실래요?

이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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