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상훈 정치학자

일상의 삶에서도 자신의 몫 이상을 챙기는 사람들이 있듯, 정치에서도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이들이 늘 문제다. 그들은 두려움을 동원해 과욕을 실현한다. 적폐 세력이 발흥한다거나, 종북 세력에게 자유가 위협당하고 있다거나, 친일 잔재의 청산 없이 민족의 미래가 없다거나, 이러다 경제도 나라도 망한다는 식의 공포 담론이 그 예다.
사회가 적대와 증오로 분열되어도 상관하지 않는 그들은 자신만 옳을 뿐 상대로부터 배울 의사가 없는 독단의 사도들이다. 권력을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이고, 협동의 문화나 신뢰의 가치를 파괴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진보 쪽에도 있고 보수 쪽에도 있다. 우리가 살아갈 이 사회를 삭막한 곳으로 만드는 이들이다.
분열된 대연정
필자에게 2016년의 촛불집회는 진보만이 아니라 중도는 물론 보수 시민의 상당수가 참여하고 지지했던 ‘시민 대연정’ 같았다. 뒤이은 대통령 탄핵은 야 3당과 집권당 내 상당수 의원이 참여한 ‘정치 대연정’에 가까웠다. 2017년의 조기 대선도 그랬다. 압도적 득표자 없이 40.08%에서 당선자가 나옴으로써 ‘온건 다당제’를 잘 이끌어 보라는 ‘시민 평결’ 같았다. 대통령 탄핵을 함께 이끌었던 4당이 폭넓은 시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광범한 정치 연합을 형성해 앞 정권에서 있었던 문제를 함께 개선하는 공동통치co-governance를 제도화했어야 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는 그런 바람을 수용하는 것 같았다.
실제는 달랐다. 촛불 ‘대연정’은 촛불 ‘혁명’이 되었다. 다당제는 극단적인 양당제로 퇴락했다. 시민 대연정은 ‘문빠·태극기부대·이대남·극렬유투버’들로 난장판이 됐다. 박근혜 정권의 “좌익 세력 10년 적폐 청산”의 진보판이라 할 “적폐의 철저하고도 완전한 청산”이 제1호 국정 과제로 선포되었다. 검찰 권력은 윤석열을 통해 다시 동원되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역할은 조국 민정수석으로 이어졌다. 여야가 국정 동반자가 되는 일도 없었다. 대의 민주주의는 간접 민주주의로 폄훼되었다. 박근혜식 ‘국민 직접 정치론’의 진보판이라 할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국회와 정당을 우회한 ‘청와대 정부’가 등장했다. 여야는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시민사회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광화문집회와 서초동집회로 분단되었다. 이렇게 될 일이었을까?
혁명의 완수가 아닌 정치의 회복
시민 참여의 열정은 혁명의 방법보다 정치의 방법으로 구현되어야 했다. ‘촛불혁명의 완수’가 아니라 ‘정치의 회복’으로 나아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혁명도 정치도 승리를 추구한다. 하지만 혁명은 승리에서 만족하지 않고 패배자를 실패자로 만들 때까지 상대를 추궁한다. 정치에서의 승리가 패자와의 공존을 선택하는 반면, 혁명의 승자는 패자를 재기할 수 없게 만든다. 패자와의 공존과 경쟁은 정치를 활성화하지만, 패자를 청산해야 할 적폐로 몰면 정치가 들어서야 할 자리에 처벌과 복수의 열정이 들어선다. 촛불혁명을 완수하자는데, 적폐를 철저하고 완전하게 청산하자는데, 시민이 어떻게 대화와 타협, 조정이라는 정치의 미덕을 존중할 수 있겠는가.
일이 그렇게 돌아가니 진영이 다른 상대는 물론이고 같은 진영 안에서도 배신자를 찾아내 닦아 세우려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반대파를 토착왜구나 친일파의 후손으로 몰아붙이고자 하는 비이성적 대중운동의 출현도 막을 수 없었다.
촛불혁명, 촛불세상, 촛불민주주의 같이 뭔가 완전한 질서를 만들겠다는 헛된 약속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적폐의 철저하고도 완전한 청산을 국정 과제로 선포하는 무모한 일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불완전하더라도 정치의 미덕을 회복하고, 더 넓은 연대와 협력을 통해 비가역적 변화를 조금씩 일궈 갔어야 했다. 급진과 반동을 반복하는 일은 세상을 비인간적인 열정에 지배당하게 만든다. 동의와 타협을 통해 느리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사회,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며 협동의 가능성을 키우는 사회, 증오보다는 신뢰를 쌓아 갈 수 있는 사회, 이런 사회를 위한 정치가 훨씬 더 인간미 있는 미래를 만든다.
정치란 증오 없는 싸움
정치 없는 민주주의는 비극이다. 그 길의 끝은 국회나 정당의 조정자 역할이 사라진 거리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십자군 부대와 촛불을 죽창으로 만들려는 세력이 격돌하는 민주주의다. 그런 민주주의는 폭력에 관용적이고 인간의 존엄을 경시하는 어두운 시민성을 북돋는다.
정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정치가 늘 성공적인 것만도 아니지만, 정치란 하나의 옳은 교리만 존중하는 것이 아니기에 필요한 역할을 한다. 정치란 내가 옳다고 믿는 신조나 이념에 가까워서 소중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을 때도 정치는 소중하다. 정치란 우리가 서로 다르기에 불러들인 인간 활동이다. 우리가 같아질 수 있고 늘 일치할 수 있다면 정치는 없어도 될 일이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정치의 역할이 필요하다.
정치도 싸움의 한 종류라고 한다면 그것은 “증오 없는 싸움”이라고 정의해야 한다. 상대를 적으로 만드는 싸움은 전쟁이지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좋은 사회를 위해 누가 더 현명한 싸움을 선택하는지를 둘러싼 경쟁에 가깝다. 여야를 달리 지지하는 시민들을 서로 증오하게 만드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의견이 같을 수 없는 시민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여야는 지혜롭게 싸우면서 실질적 변화를 이어가는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런 일에서 보람을 찾는 이가 정치를 해야 시민도 살고 사회도 산다.
반反보수나 반反진보는 정치를 안 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보수도 진보와 얼굴 붉히지 않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도 보수를 경멸하지 않아야 일을 풀어갈 수 있다. 진정 정치적인 어떤 신조가 있다면 그것은 어렵기 짝이 없는 여러 사안을 두고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내려는 힘든 조정의 반복 속에 있다.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그것이 인생이고 또 민주주의다.
참을 수 없는 민주주의
정치의 미덕 없는 민주주의란 육신을 떠난 영혼처럼 허망하다. 지난 촛불집회 이후 10여 년 가까운 기간 동안 우리도 그 허망함을 경험했다. 모두가 화를 내는 사회, 모두가 억울해하는 사회, 서로의 과거를 두고 싸우느라 공동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는 사회, 그게 우리 모습이다. 왜 이렇게밖에 안 된 것일까?
늘 싸워야 하는 사회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모든 것을 걸고라도 싸워야 할 때가 있지만, 그게 일상일 수는 없다. 그런 위험한 일상을 살고 싶지 않아서 민주화 운동도 하고 촛불도 들었는데, 우리에게 늘 위기의식을 강박하고 거리로 나서라 하고 싸우라 하면 그건 뭔가 이상한 일이다. 집권하면 야당을 청산의 대상으로 삼고, 야당이 되면 나라를 빼앗긴 것처럼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일을 반복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상대가 적대와 공격을 멈춘다면, 그와 싸웠던 과거를 기억하지 않아야 정치는 일을 재개할 수 있다. 오래전 링컨이 말했듯.
“나는 당신이 그저 복수를 위한 것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귀하가 장래의 평화에 관련된 일을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든 야든, 진보든 보수든 다 지나치다. 그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건만, 멈출 줄을 모른다. 탄핵 정치도 민주주의라면,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권력 싸움을 위한 민주주의일 뿐, 나로서는 참을 수 없는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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