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00년 03월 2000-03-01   1376

공천제도 문제제기 ㅣ 상향식 공천제도는 먼나라 꿈인가?

을씨년스런 한기가 손목을 휘감아 냉랭한 기운이 도는 흐릿한 사무실에 한 장의 팩스가 슬며시 밀려들어왔다. ‘밀실․낙하산 공천 사례’–한나라당의 XX 지역구에 공천을 받은 이는 이회창 총재의 고향이 충남 예산이란 끈 하나 때문에 공천을 받았음. 그는 지역구에 살지도 않았고, 지역활동도 전혀 하지 않은 자로 이는 밀실․낙하산 공천의 전형적 사례임.

자필로 휘갈겨 쓴 이 한 장의 편지는 무명으로 참여연대 사무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팩스는 공천시민연대 사무실에 가면 수도 없이 쌓여 있다. 심지어 누구는 이래서 안되고, 누구는 이래서 부당하다며 항의전화 혹은 격려전화가 쇄도한다.

유권자들의 의식이 변해가고 있는 중일까? 공천시민연대(공동대표 박상증 외)가 발족한 뒤, 많은 사람들은 정치개혁의 회오리를 기대하며 그들의 활동을 주목하고 있다. 실제 4․13총선을 앞두고 400여 개가 넘는 시민단체들이 모여 정치권의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공천행태를 고발하는 것부터 낙천낙선운동을 본격화하는 것까지의 활동을 시도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일반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시민단체에 2억 원 이상의 후원금을 보낸 것도 처음이다. 지극히 평범한 유권자들이 정치개혁 시민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도움을 선언한 이유는 뭘까? 혹시 이제 이 진저리나는 구태 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조용한 시민정치혁명의 시대를 맞이하자는 주문은 아닌가.

눈물의 독설

한나라당 공천자 명단이 발표되던 지난 2월 18일 한나라당의 중앙당사. 그곳엔 고함과 몸싸움, 분노의 절규와 눈물의 호소가 빗물에 번진 수채화처럼 얼룩져 있었다. 임진출 의원 등의 공천탈락자들이 악에 바친 독설을 퍼부으며 당에서 심사한 공천자 결정에 승복할 수 없음을 성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며칠 뒤, 임진출 의원은 모든 연락을 두절한 채, 18일 너무 심하게 무리해서 병이 나 집에서 쉬고 있었고, 오세응 의원측은 이미 당에서 언론에 계속 흘렸던 바라 그렇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고, 무소속 출마 준비에 바쁘다고 말한다. 임진출 의원측도 어떤 형태로든 이번 선거에 반드시 출마할 것이며, 2월말경 구체적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임 의원측에 따르면, 그녀는 현실적으로 경주갑․을이 선거구획정위원회에 의해 경주로 통합됨에 따라 다른 지역보다 공천받기 어려웠기에 당내 여성의원이 필요한 이유와 당위성을 성명으로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펴왔지만 사실상 그런 내용은 당내 공천심사과정에서 그리 크게 반영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오세응 의원측은 이미 시민단체 낙천자리스트에도 올라 있었고, 지역 표밭 가꾸기에 전력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잘 살펴볼 것이 있다. 실제로 그들은 당의 공천심사과정이 잘못됐다고 아우성치고 있지만, 그 문제의 근본적 고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어찌 보면 ‘위로부터 공천을 못받았기 때문에 억울하오’ 수준일 뿐. 구체적으로 어디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졌는지에 대한 판단은 어쩌면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공천민주화를 고민하는 많은 정치학자나 시민운동가들은 아주 근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파고들고 있다.

헌법 · 정당법을 당헌 · 당규가 뒤집어?

공천무효확인소송과 공천효력정치가처분신청. 그들은 법률적으로 이렇게 대응하면서 각종 토론회를 통해서는 실제 우리나라 정당의 왜곡된 공천심사과정에 대해 지적했다.

우리나라 헌법 제8조 제2항은 “정당은 그 목적, 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하며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조직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정당법 제31조 제1항에는 “정당의 공직선거후보자의 추천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동조 제2항은 “정당의 공직선거후보자 추천에는 후보자를 추천할 공직선거의 선거구를 관할하는 해당 당부대표기관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하여야 하며, 그 구체적 절차는 당헌으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여기서부터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민주당의 경우, 당헌 제100조 제1항에는 “국회의원 후보자는 지구당 대의원대회에서 비밀투표로 선출하여 제청한 2인 이하의 추천후보자 중에서 총재가 당무위원회의 심사와 의결을 거쳐 추천한다”, 동조 제3항에서는 “당무위원회는 후보자에 대해 심사, 의결함에 있어 공신력있는 여론조사 결과 등 당원과 유권자의 의사가 객관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자료를 참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부칙 제5조에서 “제100조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경우 후보자는 총재가 당무위원회의 심사․의결을 거쳐 추천한다”고 돼 있어 실질적으로 당 총재의 독점권을 보장하는 셈이다.

이는 한나라당도 자민련도 비슷하게 당 총재 1인이 공천권을 독점하도록 만들어 두었다. 이처럼 헌법과 정당법에서 규정한 ‘상향식 공천제도’는 각 정당의 1인 보스에겐 공천독점권이 부여되면서 당헌이나 당규에 의해 왜곡되고만다. 이 부분에 대해 한국정당정치연구소 박상병 연구기획실장은 “한국 정치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크게 지역주의정치, 1인 보스정치, 부패정치를 연결하고 있는 ‘당 총재의 공천권 독점’이다. 따라서 실질적 한국 정당정치의 개혁을 원한다면 공천권 독점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 즉, 당원의 정비․정당조직의 효율화․정당자금의 공정한 배분 등이 이뤄질 수 있게 하려면 공천제도의 개혁이 무엇보다 우선시돼야 한다”고 한 토론회에서 밝혔다.

그러나 이런 지적에 대해 현실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는 한국정치의 현실을 외면한, 원칙에 불과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새천년민주당의 공천심사위원 김민석 의원은 민주당의 가장 중요한 공천심사기준으로 ‘여론조사와 민심’을 잡는다고 피력했다. 실제 한국의 정당정치가 아직까지는 당원이 직접 당비를 내고, 당원의 의사결정이 제대로 반영되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상향식 공천제도를 당장에 직접 대입하기는 곤란하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많은 정치학자나 시민운동가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현실 정당상황을 고려해야 하느냐, 이제 국민 대다수는 법률에 의거한 원칙을 원하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이태호 공천시민연대 정책기획국장은 “후보자 선정과정에 일반 유권자 또는 정당 지지자나 당원이 참여하여 일반선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후보자를 선정하는 미국식 예비선거제도를 도입하든지, 아니면 지역구 유권자의 추천을 받는 등 여러 가지 제도적 실례를 고려한 방법을 쓸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상 우선적으로 “한국공천제도의 근본적 문제점을 고치는 것은 당 보스의 공천권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앞으로 4․13 총선을 한달여를 앞두고 있다. 이 상황에서 유권자는 이미 정당이 나름대로 끝내버린 공천자에 대한 심판을 하는 수밖에 없다. 어물전에서 개중 신선한 생선을 고르는 심정으로.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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