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파병 2025-11-03   70303

✨베트남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지역 시민사회 방문단

정예은(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활동가)

올해는 베트남전 종전 50년, 한국 전투병 파병 60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0월 30일(목)부터 11월 3일(월)까지 3박 5일간 한국 시민사회 방문단(이하 방문단)이 베트남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지역을 방문했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시민평화포럼,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 참여연대, 평화를만드는여성회의 활동가들과 공공상생연대기금, 노무현재단, 참여연대 국제협력기금의 후원, 한베평화재단의 협력으로 꾸려진 이번 방문단 프로그램은 올해 베트남전 종전 50년, 한국 전투병 파병 60년을 맞아 가해국으로서의 진실과 책임을 제대로 마주하고, 한국 정부의 책임 있는 태도를 요구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과거를 닫고 미래로 향한다”는 말

베트남 전쟁 당시 130여 건의 한국군 학살로 1만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이 사실에 책임있게 응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한·베 정상회담에서 에둘러 사과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마음의 빚’, 문재인 대통령은 ‘불행한 역사 유감’ 정도의 언급을 했을 뿐 가해국 정부로서의 책임있는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베트남 정부가 선언한 “과거를 닫고 미래로 향하겠다”는 정책입장은 한국엔 편리한 핑곗거리가 됐다. 그러나 이 선언은 100여 년 간의 프랑스 식민 지배, 일본군에 의한 점령, 30년 전쟁 이후의 베트남이 과거의 고통에서 조금 벗어나겠다는 의미이지, 과거의 문제를 부정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 선언에서 사용한 ‘닫는다’는 뜻의 베트남어 단어 ‘켑(khep)’은 잠깐 문을 걸어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게다가 이 말은 잇따른 전쟁 후 상처받은 베트남 국민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지, 가해국에 면죄부를 주려는 발언이 아니었다. 

방문단은 이번 여행의 첫 일정으로 다낭 박물관에 방문해 다낭과 베트남의 개괄적인 역사를 살펴보고, 도안홍레 감독의 다큐멘터리 <평화로 가는 길>을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공적 역사에는 생략된, 피해자들의 작은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에서 원고 응우옌티탄은 “과거를 닫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하지만 내게는 닫을 수 없는 상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상처는 늘 동일한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응우옌티탄은 민간인 학살 이후, 한국인을 두려워하고 원망하기만 했다. 처음 한국 시민사회를 만나 얘기할 땐, 매번 울고 화를 냈다. 시민사회가 사과하고, 이들과 관계를 맺어가며 그녀는 한국인들을 덜 미워하게 됐다. 다큐멘터리 감독 도안홍레는 그것이 ‘평화’의 과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이해하며 그 또한 과거와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영원히 닫힌 과거는 없다. 상처는 닫히지 않고, 현재적으로 통증과 모양을 바꾸며 남아 있다. 이야기를 들으며 방문단의 여정도 ‘평화로 가는 길’이 되기를 바랐다.   

2025.10.31 미라이 학살 박물관 앞에서 (사진 = 참여연대)
2025.10.31 미라이 학살 박물관, 학살 당한 504명의 이름과 나이가 빼곡히 적혀있다 (사진=참여연대)

학살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일

베트남 전쟁 시기 일어난 민간인 학살 중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1968년 3월 16일, 미군은 송 미(Son My)의 미라이(My Lai) 마을 사람 504명을 학살했다. 종군기자 로버트 해벌(Robert Haeberle)이 기록한 밀라이 학살 사진은 미국 내 대대적인 반전운동에 불을 지폈고, 이후 학살 지휘관 한 명이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는 증거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학살이기도 한데, 그 덕에 미라이 학살 박물관이 설립되어 있다. 방문단은 박물관에 방문해 민간인 학살의 참혹함을, 그것을 기록한 베트남의 기억을 살펴보았다. 

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우리가 마주한 것은 커다란 회색 비문에 빼곡히 새겨진 이름들이었다. 사망자 504명의 이름과 나이가 모두 적혀있었다. 대다수는 노인과 여성, 어린이였다. 전시관에는 학살 이전 미라이 마을이 어떤 곳이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살던 곳인지를 보여주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문서는 미국에서 온 자료였지만, 현장에서 수집한 피해자들의 유품도 전시돼 있었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옷깃을 여미는 사진, 논길에 시체들이 늘어져 있는 사진 등은 학살의 잔인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관람 후 박물관장 끼에우 선생과 대화 시간을 가졌다. 그는 2017년부터 8년간 관장을 맡아 자료를 모으고, 전시 방식과 배치를 바꾸는 일을 하며 학살의 기억을 다시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수집과 기록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그는 미국 시민들이 미라이 학살이 보도된 1969년 12월 라이프지를 기부한 이야기를 해주며, 이 박물관을 운영하는 데에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고도 강조했다. 방문단의 질문에 봇물 쏟아내듯 답하고도 그는 아직 해줄 이야기가 많다는 듯 이런저런 자료를 꺼내왔다.  

이어 방문단은 꽝남성 빈호아 마을에 갔다. 그곳에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증오비’가 놓여 있다. 1966년 12월, 한국군은 43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남겨진 마을 주민들은 한국군이 떠난 자리에 증오의 마음을 박아두었다.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는 제목의 증오비에는 한국군이 당시 자행한 학살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 아이를 안고 한 손을 하늘로 뻗은 여성, 미라이 학살 박물관에도 있던 그 형상은 증오비에도 새겨져 있었다. 방문단은 그곳에 처음 참배했다. 권현우 활동가의 설명을 들으며 손에 쥔 흰 국화를 만지작거리던 방문단은 향을 피우고, 세 번 절을 한 뒤, 오래 묵념했다.      

응우옌티방은 빈호아 학살의 생존자다. 학살 당시 그녀는 두 살이었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겨우 살아남았다. 방문단은 족릉마을(빈호아 학살 지점 중 하나)에서 그를 만났다. 비가 오는 마을 안쪽 작은 위령비 앞, 경 읽는 소리를 들으며 짧은 인사를 나눴다. 그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는 위령비에 올 때마다 마음이 힘들다고 했다. 학살이 일어난 지 60년 가까이 되었지만,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 그날의 이야기는 그녀의 몸을 굳게 했다. 방문단도 어떤 말을 전해야 할지 몰라 머뭇댔다. 그럼에도 그녀는 방문단에게 고맙다고 말했고, 다정하게 인사해 주었다. 이 만남의 무게를 우리 모두 느꼈다. 

도안응이어도 이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당시 어머니의 피와 함께 흐르던 탄약이 눈에 들어가 그는 시각을 잃었고, 기타 연주와 노래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베평화재단과 관계를 맺어온 그는 한국인 방문객이 낯설지 않다는 듯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도안응이어와 함께 있는 동안 우리는 목소리만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었으므로, 계속해서 말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가 ‘가을의 호아쓰 꽃’을 불러주었고, 답가로 방문단은 ‘광야에서’를 불렀다. 사과와 연대의 마음을 담은 약속패를 전달하자, 그는 계속해서 그 패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패를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점자판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죄송스러웠다. 한국 시민사회와 함께한 지난 시간이 그에게 어떤 감각으로 남아있을지 궁금했다. 

2025.10.31 빈호아 마을 학살 피해 생존자 도안응이어 (사진 = 참여연대)

저항하며 상처 매만지기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운동은 1999년 <한겨레21>의 보도로 촉발됐다. 2000년 전후로 조직된 단체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은 사과와 진실규명 요구 중심으로 개진되며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운동은 여러 국면을 거치게 되고, 2015년 최초로 피해생존자가 한국에 방문하며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 활성화되었다. 이때 방문한 생존자가 퐁니 퐁녓 마을 응우옌티탄과 빈안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이다. 그들은 한국 시민사회와 함께하기 시작했고, 2018년 시민평화법정 활동에 이어 2019년 한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하기까지 이른다.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 오히려 더 지키고 싶은 기억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퐁니·퐁녓 학살은 대표적으로 알려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1968년 2월 12일 퐁니·퐁녓 마을에서 74명의 주민이 한국군에 의해 희생됐다. 이 마을의 피해생존자 응우옌티탄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고, 1심과 2심 모두에 승소했다. 그러나 국방부의 상고로 현재 대법원판결이 남아있는 상태다. 그의 행보 덕에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필자는, 더욱 그녀가 살던 마을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빈랑나무 사이를 걸어 들어가 만난 퐁니·퐁녓 위령비는 커다란 야유나무 아래에 있었다.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야 겨우 다 안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야유나무였다. 참배하려는데 비가 억수같이 내렸고 야유나무 줄기가 바람에 흔들렸다. 한국군이 방공호와 집에 있던 마을 사람들을 죽일 때 야유나무도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위령비 참배 후, 시신들이 나열되어 있던 1번 국도를 따라 응우옌티탄의 집에 갔다. 그녀의 가족과 이웃들은 물에 젖은 물건을 닦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물이 가슴팍까지 찼다고 했다. 겨우 정리된 자리를 방문단에 내어주며,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방문단의 질문과 이야기에 마음을 다해 답했다. 그러다 한 참가자가 한국 국방부의 ‘한국군이 아니라 베트콩이 학살 행위를 저지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응우옌티탄과 학살 목격자 응우옌득쩌이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몇 번을 이야기해야 하냐고, 법정에서도 모두 얘기했다고, 남베트남군은 그 학살을 다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반복된 증언과 반응의 부재를 그녀는 너무 많이 겪어야 했다. 괴롭지는 않았을까, 이야기하며 상처를 보듬을 수 있었을까. 그는 한국 시민사회를 만나 말하기 시작하며 너무 많은 변화와 새로운 우정이 생겼다며, 끝까지 함께 하자고 말했다. 

응우옌티탄의 가족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향한 곳은 하미 마을이었다. 1968년 2월 24일, 한국군은 하미마을 주민 135명의 삶을 앗아갔다. 하미마을 주민들은 한국군의 학살이 세 번에 걸쳐 일어났다고 말한다. 첫째, 총과 탄으로 자행한 민간인 학살, 둘째 시신을 탱크로 짓밟은 시신 훼손 학살, 셋째 참상을 기록 비문을 덮어버린 기억 학살. 하미마을의 위령비는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지원으로 지은 것인데, 주민들이 위령비 비문에 학살에 대한 내용을 담자 한국이 이에 반대하여 비문을 연꽃 그림으로 덮어버렸다는 사연이 있다. 방문 허가를 받지 못한 방문단은 멀리서 위령비를 보며, 언젠가는 연꽃 비문을 떼어내야겠다고 이야기 나눴다. 2013년 세상을 떠난 하미마을 학살 피해생존자 팜티호아의 묘지에 참배하고, 또 다른 응우옌티탄을 만났다. 

2025.11.1 퐁니퐁넛 학살 피해 생존자 응우옌티안과의 만남 (사진 = 참여연대)
2025.11.1 하미 학살 피해 생존자 응우옌티안과의 만남 (사진 = 참여연대)

하미마을 응우옌티탄은 한국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에 하미마을 학살 사건에 대한 조사 신청을 했다. 진화위는 해당 사건이 해외에서 일어난 외국인에 대한 사건이라며 조사를 거부했고, 응우옌티탄과 하미마을 주민들은 진화위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1,2심 모두 패소했지만, 상고한 상황이다. 지난 6월 방한한 그는 작고 차분하게 자신의 패소와 거절의 경험을 말했다. 증거가 없어 국가배상 소송을 못했지만, 당신이 증거라 했다. 그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보였다. 응우옌티탄은 지난 방한 때 본 용산 전쟁기념관의 글귀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표지판을 생각하면 특히 더 화가 난다고 말했다. 방문단은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책임을 통감하며 응답했다. 그녀의 투쟁 중 그 무엇 하나도 우연히, 쉽게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시간 속 베트남 전쟁

민간인학살 시민사회 방문단은 다양한 영역에서 시민운동을 해오고 있는 활동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장에 방문하며 참가자들은 자신의 운동, 삶의 시간, 기억 속 베트남 전쟁에 관해 이야기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 강경란 활동가는 단체 차원으로는 나비기금 지원, 베트남 나비기행 등으로 피해자와 함께 연대해왔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에 깊게 연대해 오지 못했음에 대한 사과와 후회의 마음을 전했다. 두 응우옌티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보면서는,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목소리를 내온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한국의 피해자들을 떠올리게 됐다며, 그들에게 계속해서 목소리 내 달라고, 곁에서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는 한국군 역사의 공식 기억에서 생략된 베트남전쟁 참전을 다시 소환해보게 되었다며, 국가 공식 기념 공간인 전쟁기념관 개선을 위해 애쓰겠다고 약속했다. 학생운동을 해온 참가자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 이후 광주항쟁을 진압했다는 연결을 생각하니 “내 운동의 시작에 베트남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재난참사피해자와 연대해온 이태호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은 세월호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와보고 싶다며,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의 삶들을 연결했다. 필자는 평생 학살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삶을 엿보며, 끝나지 않는 현재의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에 대해 생각했다. 24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한 허울뿐인 휴전, 학살을 지원하고 방관하고 은폐하는 국제사회, 올리브 나무를 끌어안고 탱크 앞에서 카메라를 든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이 응우옌티탄 복부의 상흔, 연꽃으로 덮인 비문, 위령비 곁을 지키던 야유나무와 호아쓰 나무, 두 손 모아 이야기하던 피해생존자들과 겹쳐졌다.  

이제 방문단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학살 피해자를 애도하고 국가의 잘못을 사과하며 진상규명에 함께 할 것을 약속했다. 우리는 죽은 자를 되살릴 수는 없지만, 죽은 몸들에 대한 기억을 지켜낼 수는 있다. 기억학살은 멈출 수 있다. 창밖으로 본 길옆의 무수한 묘지들을 기억한다. 길과 논밭이 물에 잠겼지만 결국에는 우리에게 길을 내주었던 것도. 그곳에는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권헌익)이 함께 있었을 것이다. 그 영들에 인사하고 기억의 자리를 내어준 우리는 어떤 응답을 하게 될까. 비를 맞으며 향을 피우던 방문단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자리 잡았을까.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을까. 우리는 함께 그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2025.10.31 퐁니퐁넛 학살 아유나무 아래 위령비 (사진 = 참여연대)
2025.10.31 빈호아 증오비 (사진 = 참여연대)

⭐️개요

  • 일시: 2025년 10월 30일(목) ~ 11월 3일(월) 
  • 장소: 베트남 중부 일대 (다낭, 호이안, 근처 마을 등 꽝남성 지역)
  • 공동주최 :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시민평화포럼,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 참여연대, 평화를만드는여성회 
  • 공동주관 : 시민평화포럼, 참여연대 
  • 공동후원 : 공공상생연대기금, 노무현재단, 참여연대 국제협력기금
  • 협력 : 한베평화재단

⭐️ 일정

날짜일정
10/30(목)– 다낭박물관 탐방 다큐 <평화로 가는 길> 상영회 및 도안홍레 감독과의 만남
10/31(금)– 밀라이학살 박물관 탐방, 피해생존자 팜탄꽁(전 박물관장)과의 만남
– 빈호아 증오비 참배 및 피해자 도안티언과의 만남 
– 족릉학살 위령비 참배, 피해생존자 응우옌티방과의 만남
– 피해생존자 도안응이어와의의 만남
11/1(토)– 퐁니 위령비 참배, 피해생존자 응우옌티탄, 유가족 응우옌득쩌이와의 만남 
– 하미 위령비 참배, 피해생존자 응우옌티탄과의 만남
11/2(일)– 꽝남성 피해 마을 (주이탄, 주이응이어, 빈즈엉, 투이보 마을) 방문
11/3(월)– 인천 도착

📍문의: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02-723-4250
📍보도자료 [원문보기/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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