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9일, 대한민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8년간의 배상 소송에서 122명의 미군 ‘위안부’가 승소했습니다. 그리고 2025년 9월 5일, 117명의 미군 ‘위안부’들은 미군을 대상으로 한 소송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에 이어 미군 ‘위안부’는 새로운 한국여성사를 쓰고 있습니다. 미군 ‘위안부’들은 국가폭력이 드리운 긴 그림자와 가부장제 성문화의 깊은 낙인, 사회 불평등과 차별의 벽을 뚫고 여성해방과 인간존엄성을 향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주한미군 성착취 진상규명 및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미군 ‘위안부’들의 진실을 향한 투쟁을 연속 기고합니다.
[연속기고①] 미군 ‘위안부’의 주한미군 소송을 응원하며
[연속기고②] 제국주의 일본의 성병 관리: ‘근대위생’이라는 이름의 폭력
[연속기고③] 기지촌 성병관리소에 대한 주한미군과 한국 정부의 책임
[연속기고④] 기지 주변 지역사회 운영의 또 다른 주체, 미군
[연속기고⑤] 카투사의 기억으로 읽는 미군 ‘위안부’ 문제
[연속기고⑥] 국가 안보와 동맹이라는 명목으로 ‘인권 유린’, ‘여성 학대’ 조장
[연속기고⑦]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미군 ‘위안부’를 말한다
한국의 미군 ‘위안부’, 진실을 향한 투쟁
제국주의 일본의 성병 관리: ‘근대위생’이라는 이름의 폭력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제1조 본령은 일본정치(日政) 이래의 악습을 배제하고 인도를 밝히기(彰明) 위하여 남녀평등의 민주주의적 견지에서 공창제도를 폐지하고 일절의 매춘행위를 금지함으로써 목적함
1947년 11월 14일, 미 군정청 법률 제7호로 ‘공창제 등 폐지령’이 공포되었다(시행은 1948년 2월 12일). 이로써 일본의 조선 침략과 함께 한반도에 자리 잡기 시작한 ‘공창제’가,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폐지되었다. 이후 성매매에 대한 한국의 정책은 금지주의로 일관되었다. 그러나, 과연 해방 후 한국은 성매매 금지주의 국가였을까.
‘청량리 588’이나 ‘대구 자갈마당’ 등의 집결지, 그리고 ‘파주 용주골’이나 ‘군산 아메리카 타운’ 등의 기지촌… 이러한 이름은 해방 후 태어나 살아온 한국 사람들의 기억에도 생생한 동시대의 공인 성매매 지역이다. 성매매 금지주의 정책의 담당자인 국가는 이들 지역을 단순히 묵인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리했다. 가장 강력한 수단은 강제 성병 검진이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과 함께 한반도에 자리 잡기 시작한 ‘강제 성병 검진 제도’는,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지속되었다. 그 대상은 성매매 ‘의심’ 여성이었다. 군인들이 드나드는 지역의 여성들일수록 더욱 엄격한 성병 검진의 대상이 되었으며,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일본이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일본군 ‘위안부’가 그 정점에 있었다.
제국 일본을 위한 군사위생, 관리되는 여성의 몸
15세기 말 유럽에서 처음 발병하고 확산하기 시작한 성병이 중국을 거쳐 조선과 일본에 들어온 것은 16세기 초였다. 그러나 성병이 정치·사회적으로 집중 관심과 통제의 대상이 된 시기는 근대 위생학이 발달하는 19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감염경로의 도덕성 문제와 빠른 전염 속도, 그리고 치료의 어려움과 그 후유증 차원에서 성병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협하는 질병으로 인식되었다.
일본에서 성병 검사가 1860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나가사키에서 러시아 병사를 상대한 일본인 여성이 대상이었다. 최초의 성병 검사가 이루어진 업소는 ‘마도로스 휴식소(マタロス休息所)’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영국군은 성병 검사 방법을 일본 전역에 퍼뜨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1866년 영국에서 전염병법(Contagious Diseases Acts)을 개정하면서 영국의 모든 병영 소재지에 있는 성매매 여성에게 성병 검사를 실시하도록 했다.
일본의 개항지인 요코하마도 영국의 병영 소재지 중 하나였다. 1867년 영국 해군 군의관인 조지 브루스 뉴턴(George Bruce Newton)이 일본에 파견되어 1868년 요코하마에 일본 최초의 성병 전문병원을 설치했다. 뉴턴은 이 병원에서 이뤄지는 성병 검사가 영국 군대뿐 아니라 일본 군대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일본 외무성을 설득했다.
메이지 시기(1868~1912년) 서구적 근대를 추종했던 일본의 통치자와 의학자들은 서구와 같이 부국강병을 기초로 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서구에서 형성된 과학적 위생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제국의 입장에서 국민 각자의 몸은 전쟁 승리를 위한 군사적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일본은 군사 위생(Military Hygiene)에 주력하여 군사력을 높이려 하였는데, 그 결과 러일전쟁 시기에는 질병으로 사망한 병사의 수가 이전에 비해 큰 폭으로 줄어드는 성과를 보였다고 한다.
일본군의 군의관은 일본군의 위생과 환경에 대해 총체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군대 내 전염병을 예방하고 환자와 부상자를 치료하였으며, 병사들의 일상적인 생활 습관과 오락 생활까지 관장했다. 군의관의 일상적인 업무는 전장에서 효과적으로 ‘싸우는 기계’로서 병사의 몸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후지메 유키(오사카대 교수)는 “근대 공창제는 군대 위안과 성병 관리를 기축으로 하는 국가 관리 체계”라고 정의한 바 있다.
한편, 1872년 마리아 루스 호 사건을 거치면서 서구 열강으로부터 일본 예창기의 노예 상태에 대해 비판 받은 일본 정부는 같은 해 10월 ‘예창기해방령’을 공포했다. 쿨리(苦力)라고 불리던 청나라 노동자를 싣고 마카오에서 페루로 향하던 마리아 루스 호가 수리를 위해 일본 요코하마 항에 입항했는데, 쿨리 한 명이 탈출하여 영국 군함으로 도망쳤다. 이 문제를 놓고 요코하마 재판소에서 재판을 한 일본은 쿨리의 상황이 국제법 위반인 노예와 같다 하여 풀어줄 것을 명령했다. 패소한 페루는 일본에도 노예 매매와 같은 예창기 제도가 있다고 항의했고,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형식적이나마 해결하지 않을 수 없어 ‘예창기해방령’을 공포한 것이다.
그러나 ‘예창기’는 ‘해방’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그다음 해인 1873년의 도쿄의 성매매 관리 정책을 시작으로 수차례 관련 법령을 개정하면서 근대 성매매 관리 정책을 만들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중점을 둔 것은 예창기, 작부, 여급 등 접객업(接客業) 종사자들의 경찰 등록과 이를 기초로 한 강제 성병 검진이었다.
식민자들과 함께 조선으로, 병사 따라 전장으로 넘어간 성병 검진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형성된 일본인 개항장에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 남성을 위한 성매매 집결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부산의 나카고메루(中米樓)라는 업소는 일본 요시와라에 본점을 두고 있었는데, 이곳의 단골인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가 뒤를 봐주었다. 그는 강화도조약 당시 일본의 전권대신이었다. 그리고 1881년 일본의 개항장인 부산과 원산에 성병 관리 법령이 제정되었다.
조선인 여성에 대한 성병 검사가 시작된 것은, 통감부 하의 대한제국 위생경찰이 탄생한 직후인 1906년 2월이었다. 검사의 방식은 “일본인의 주장으로 기계를 가지고 하문(下門, 성기)을 검사”하는 것이었는데 “이 일이 처음이라 계집들이 놀라고 두려워 얼굴빛을 잃고(驚惶失色) 우는 자가 많았다” 한다(‘창부 조사’, <제국신문> 1906.2.8.). <대한매일신보>는 성병 검사의 방식이 “인류의 대우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비판했다(1906.2.16.). 검진 대상이 된 여성들은 크게 반발하였으며, 가게를 폐쇄하거나 기생업으로 바꾸거나 도망가거나 자살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1910년 조선이 강점되면서 위생경찰의 권한은 더욱 커졌다. 성매매 관리 제도가 조선 전역에서 일원화되는 것은 1916년의 일이다. 조선에 일본군의 상주사단이 창설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이해 3월 31일 경무총감부는 가시자시키(貸座敷, 합법 성매매 업소), 요리점 및 음식점, 예창기, 작부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고 각 도마다 달랐던 관련 법령을 통일했다. 이로써 조선총독부는 “성병 검사(檢黴, 검미)의 기초를 확립”하고 “조선의 검미 사무에 신 기원을 이룩하기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938년 전시체제가 시작되면서 일제는 시국에 어울리지 않는 접객업을 폐업, 또는 전업(轉業, 업종 변경)시키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접객업자의 쇠락을 강제하기까지 악화”된 상황에서, 합법 성매매 업소만큼은 “별유천지”로 “흑자 홍수”였다. 병사의 이용이 늘면서 상당한 성업을 보인 것이다.
반면, 기존의 정치적 세력권을 넘어, 일본군이 새롭게 진출한 곳에는 ‘위안소’가 개설되었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위안소’의 개설 목적은 병사에 대한 성병 예방과 ‘성적 위안’, 그리고 일반 여성에 대한 강간 방지를 포함한 전쟁터의 치안 유지였다.
1938년 초 상하이파견군의 병참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군의관 아소 테츠오(麻生徹男)는 군특무부의 호출을 받았다. 곧 개설되는 ‘육군 오락소’를 위해 상하이의 어느 소학교 건물에 도착하여 대기 중인 여성 100여 명의 신체검사를 하라는 명령이었다. 대략 조선인 80명, 일본인 20명이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소 테츠오는 1939년 6월 ‘화류병의 적극적 예방’이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하였다. 병사의 건강을 위해 ‘위안부’가 전장으로 가는 마지막 항구에서, 그리고 군용 위안소에서 군의 성병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1944년 7월 사이판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된 일본 해군의 군의관은 해군의 성병 관리 프로그램 덕분에 해군 병사들의 성병 발생 정도가 낮다고 믿었다. ‘위안부’는 5일마다 검진받았으며, 질병이 발견되면 치료를 위해 즉시 격리됐다. 사병들은 성병에 걸리면, 강등되거나 물가에 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들을 감염시킨 여성이 누구인지 확실해지면, 그녀는 벌금을 내야 했다. 장교는 성병에 걸리더라도 처벌받지 않았다.
군의 성병 관리란 당사자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면담할 때, 반드시 듣게 되는 이야기가 ‘성병’에 관한 것이다. ‘여공’이나 ‘간호부’, 또는 식당 등에 ‘허드렛일’ 정도를 하는 줄 알고 따라갔다가,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의 정체를 감지하는 것은, 주로 강제 성병 검진을 처음 당할 때였다.
‘위안부’라는 말을 미리 들었다 하더라도, 생경한 그 말의 뜻을 비로소 실감하는 순간도 성병 검진 때였다. 그 순간에 관한 피해자의 이야기는 주로 몸의 괴로움과 마음의 수치심, 그리고 공포심과 절망감이 어우러져 구성되고는 한다. 이야기 중에는 자신을 검진했던 군의관이 밤에 찾아왔다는 내용이 많다. 그리고 대부분 폭행이 동반된 강간이 이루어졌다. 심한 성병에 걸려 고생하거나 삶을 놓아버린 동료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의 성병 관련 기억
일본 군의관이 우리를 검사했다. 군의관은 내게 아랫도리 옷을 전부 벗고 나무판 위에 올라가서 다리를 벌리라고 했다. 생전 다른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본 적이 없는 나는 너무나 놀라고 무서웠다. 이게 무슨 일인가 알지 못했다. (…) 군의관은 강제로 내 옷을 벗기고 아래를 검사했다. (…) 그 첫날밤에 방에서 쉬고 있는데, 그날 낮에 우리를 검사한 군의관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1941년 즈음 중국 광둥)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를 하러 병원에 갔다. 병원은 군 병원이었고 일본인 군의관 한 명과 일본인 간호부 두 명이 있었다. (…) 병에 걸려 입원하면 주인은 펄펄 뛰고 난리가 났다. 이렇게 한 달, 두 달 동안을 병원에 있으면서 어떻게 빚을 갚으려고 그러느냐고 야단이었다. 빚을 갚지 못하면 기한이 자꾸 늦어졌다. (1936-1942년, 팔라우)
사용하지 않으려는 군인에게는 내가 나쁜 병이 있으니 옮지 않으려면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에 병에 걸리면 무슨 대수냐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덤비는 사람이 많았다. 이럴 때 나는 성병에 걸릴까 봐 환장할 지경이었다.(1938년, 상하이)
위안소의 작은 방에는 세면기가 있었다. 크레졸과 과망간산칼륨을 희석시켜 일을 끝낸 다음 소독했다. 옆 위안소에 있는 19살 여성이 크레졸 원액을 화장실에서 마시고 자살했다.(1938년, 중국 우창 ‘세계관’ 위안소)
진료실에는 문이 달려 있지 않았다. 우리를 더욱 참혹하고 황당하게 한 것은 다른 일본인 남성들이 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 이런 검진은 강간만큼이나 끔찍했다.(1944년, 인도네시아 스마랑)
미군이 축섬의 조선인 여성들을 돌려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박정미(충북대 교수)가 검토했듯이, 미군 또한 성병 관리에 골몰했다. 미군은 제1, 2차 세계대전기 성병으로 인한 병력 손실을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민간인 여성을 가혹하게 통제했다. 미군은 일본군과 달리 성병 예방을 위해 성매매를 금지했다는 인식도 있었으나, 야전사령관들 상당수는 이를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일본과 부딪힌 전쟁터에서, 미군은 일본군이 패전으로 물러난 자리에 남은 ‘위안부’를 발견했다. 그리고 미군 병사가 성병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중부 태평양 지역의 많은 섬들 가운데 하나인 축(Chuuk)은 과거 오랫동안 ‘트럭’, ‘트루크’, ‘도락쿠’라고 불려 왔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축섬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주요한 군사기지로 활용했고, 일본군 ‘위안부’도 배치했다. 1944년 2월 미군은 대대적인 공습으로 일본군을 궤멸시켰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축섬을 점령했다.
그 후 축섬에 머물렀던 이들을 귀환시켰는데, 이에 관해 보고한 미군의 작전일지에 귀환자에 포함된 조선인 여성들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다. ‘위안부’로 끌려왔다가 전쟁이 끝나고 현지에 남은 이들이었다. 기록은 ‘의료 활동’이라는 소제목 하에 작성되었고, “대부분 위안부였던 조선인 여성에 대한 철수(evacuation)는 미군 병사들 사이에 성병의 가능성을 낮췄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여성들은 조선에 돌아가는 것은 두려워했다. 1946년 3월 2일 자 뉴욕타임스는 이 여성들이 축섬에 남기를 원했다는 미군 장교의 말을 전했다. 일본군의 ‘위안부’로 있었다는 이유로 다른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바다에 빠트릴까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교는 결국 돌려보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작전 일지의 성병 우려 내용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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