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설정 : 6.15시대?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관계를 묘사하는 수사(修辭)가 남북한에서 공유되고 있다. 이른바 ‘6.15시대’가 그것이다. 6.15시대란 2000년 남북한 정상회담 이후의 남북관계가 이전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함축하는 시기설정이다. 즉 2000년 6.15는 8.15와 더불어 남북한이 함께 기념하고 (재)해석하는 한반도 ‘달력정치’의 한 계기로 기능하는 것이다. 6.15와 8.15 기념행사는 2002년 10월 미국이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부터 시작된 제2차 ‘핵위기’ 속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2005년 12월에는 남북한과 외국동포가 6.15를 기념하기 위해 6.15공동선언실천민족공동위원회(이하 6.15위원회)라는 ‘합법적’ 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비슷한 역할을 맡았던 1990년 11월 조직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은 남한에서 불법적인 ‘이적단체’로 간주되어 왔다.
시민사회가 남북한, 외국동포를 아우르는 합법적 민간기구의 출현을 주도적으로 나서고, 정부는 6.15 이후 남북한장관급회담과 경제회담을 정례화하는 등 서로의 이익을 공유하는 남북관계가 ‘제도화’ 단계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남한의 통일부에서는,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협상이 주요 골자인 2005년 6자회담의 9.19공동성명을 두고 ‘남북한 관계의 양적 발전과 제도화로의 진입은 질적 전환’이라고 묘사하면서 ‘제2의 6.15시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남한의 사회운동세력은 더욱 적극적으로 새로운 단계이자 역사적 실험으로서 6.15시대의 담론을 생산하기도 한다. 계간 <창작과비평>의 편집인이며 6.15위원회 남한 측 위원장인 백낙청은 6.15시대를 “통일시대의 들머리” 로 규정하며 임박한 “1단계 통일”을 언급하기도 한다. 2000년 6.15공동선언을 계기로 남한의 통일운동이 “민족재통합운동”으로 변모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통일부, <제2의 6.15시대를 열며> (서울: 통일부, 2005); <통일백서> (서울: 통일부, 2006); 백낙청, “6·15시대의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 세계평화축전 도라산강연회, 2005년 9월11일. “민족재통합운동”의 시각은 “6·15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사무처장인 정현곤의 “2000년대 민간통일운동과 남북관계,” 김세진·이재호 20주기 심포지엄, <반전반핵 평화운동의 현황과 미래>, 2006년 4월29일 참조. “6·15위원회” 공동규약 1조1항에는 “6·15위원회”를 “6·15공동선언을 실천하여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이룩하려는 정당, 종교, 단체, 인사들을 폭넓게 망라하기 위한 상설적인 통일운동 연대조직”으로 정의하고 있다.
6.15시대에 대한 북한의 설명과 해석은 보다 구체적이다. 북한의 공식문헌은 6.15시대를 “자주통일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그 내용은 “<우리 민족끼리>리념을 구현하는 자주통일시대”, “민족대단합의 지름길을 열어 놓은 민족공조시대”, “선군정치의 위력으로 전진하는 통일운동의 시대” 등이다. 북한은 2005년 1월 <로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의 공동사설에서 제시한 이른바 ‘3대 공조(민족자주, 반전평화, 통일애국)’를 6.15공동선언의 이행을 보여주는 것이라 간주하고 있다. 민족자주공조에서는 “우리 민족 제일주의”와 “외세와의 공조 배격”을, 반전평화공조에서는 북한과 미국의 불가침조약과 미군철수를, 통일애국공조에서는 남한의 국가보안법의 철폐와 “통일반대당”인 한나라당의 해체를 요구하고 있다. 강충희·원영수, 《6.15자주통일시대》 (평양: 평양출판사, 2005); 강충희, 《조국통일 3대공조》(평양: 평양출판사, 2005); 송국현, 《우리 민족끼리》 (평양: 평양출판사, 2002).
남북한의 공식적인 6.15담론에서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남한이 새로운 단계의 교류와 협력에 주목하고 있다면, 북한은 외세를 배격하는 민족공조와 6.15 지지세력과의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남한은 6.15시대의 주체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비정치군사적 분야의 협력을 통해 점진적으로 정치경제적 통합을 지향해 가는 (신)기능주의적 접근을, 북한은 민족 대 외세, 6.15 지지세력 대 반대세력을 구분하면서 주체를 명확히 설정하는 통일전선적 접근을 각기 선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남북한이 공유하는 6.15시대가 파열음을 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대립국면으로 치달을 경우, ‘6.15시대’는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 2006년 7월 현재 미국은 핵문제와 더불어 북한의 인권, 마약생산, 위폐제조 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북한 체제의 전환을 유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6.15담론을 설파하는 이들은 남북한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미국을 압박해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지만, 백낙청, “미의 대북 압박, 남학의 국민적 반발이 해결책,” PRESSian, 2006년 4월21일; 좌담, “제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현 교착상태 타개해야,” PRESSian, 2006년 3월28일. 남북한이 미국을 포함한 주변국가의 명시적 또는 암묵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관계를 축으로 한반도문제를 돌파할 ‘의지’와 ‘역량’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6.15시대는 역사적 실험장”이라는 지적이 더욱 적절한 듯싶다. 유재건, “역사적 실험으로서의 6·15시대,” 《창작과비평》, 제34권 1호 (2006). 6.15시대는 한편으로 남북한이 통일방안으로 남한의 연합제안과 낮은 단계이지만 북한의 연방제안은 공통점이 있다고 합의하면서 시작된 통일시대이고, 따라서 남북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 시대의 구분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남북한의 상이한 해석 그리고 평가, 6.15 이후의 남북관계의 향방을 둘러싼 남한 내부의 진보 대 보수의 대립과 진보 대 진보의 대립을 고려할 때, 진보 대 진보의 대립은 진보적 학자로 분류되는 백낙청과 최장집의 논쟁으로 표현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한 처방에 있어 백낙청과 최장집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백낙청은 두 문제를 분단체제와 연계하여 사고하려 한다. 반면 최장집은 분단체제 극복 이전의 단계로서 남한사회 내부에서의 민주주의의 진전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논쟁은, 1980년대 한국 진보적 운동권 내부의 민족해방노선 대 민중민주노선의 대립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백낙청,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서울: 창비, 2005);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서울: 후마니타스, 2005). 6.15시대는 6.15를 활용하여 새로운 한반도질서를 구성하려는 정치사회세력의 소망이 투영된 담론임을 부인할 수 없다. ‘6.15시대’의 국제적 승인 또한 한반도 문제의 국제적 성격을 고려할 때, ‘6.15시대’라는 담론으로 미래의 집합적 기억을 새롭게 구성하려는 정치사회세력들의 피해갈 수 없는 과제다.
이 글의 목적은 남북관계의 역사와 이론의 고찰로 남북관계의 시기구분을 시도하고, 이 시기구분을 기초로 한 남북관계의 새로운 단계 진입을 추동할 수 있는 집합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6.15시대’라는 시기구분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남북관계의 역사에서 그 정당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즉 ‘6.15시대’가 소망의 수사가 아니라 적대적 공존관계로 묘사되던 남북한 관계의 질적 전환으로 정의되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서로를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구조적 변화’ 와 그것을 추동하는 ‘집합적 실천’ 이 있어야 한다. 이 글의 잠정적 결론은 남북한 국가정체성 변화로 형성될 수 있었던 ‘6.15시대’가 남북한이 서로를 친구로 여기는 단계로 진입했다 할 수 있는 시기구분이 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남북한의 적대적 관계를 막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평화국가(peace state)’로 변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평화국가 만들기를 통해 남북한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하는 근대국가적 정체성을 넘어서야 한다. 남북한이 한반도 주민의 넉넉함(sufficiency)과 남북한은 물론 주변국가와의 친선과 평화를 추구하는 평화국가적 정체성—‘부민화호(富民和好)’의 국가—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집합적 실천이야말로 남북관계의 근본적 변환을 추동하는 힘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결론으로는 6.15담론을 평화국가담론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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