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광장의 진보로 가는 길
부동산, 취업, 교육, 양극화, 저출산, 고령화, 그리고 북핵
2006년은 참으로 안 되는 것은 많이 쌓인 반면 된 것은 거의 없는 속상한 해로 기억될 판이다. 더구나 새해로 넘겨 준, 이 안 된 숙제들 중에는 그동안 될 것으로 얘기되던 것들이 참 많아 답답하다.
현 정권의 약속대로라면 집 문제는 벌써 해결되었어야 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이나 야당인 한나라당이 각종 선거에서 공약했던 일자리만 나왔어도 대학 졸업생들은 일자리를 골라갈 수 있었다. 서울대와 교육부의 합작으로 논술이 입시의 새로운 변수로 돌출되면서 이제 와서 새삼 대학 들어갈 걱정이 하나 더 늘게 되었다. 그리고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따른 경제 활력 저하, 가까운 미래에 청소년 인구가 급감하리라는 전망이 드디어 전 사회에 걸쳐 체감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구가 줄어들어 한 사람당 돌아올 재화의 몫이 늘어나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으련만, 도리어 양극화라는 괴물이 출현하여 그 작아지는 인구들 중 상당수가 빈곤선으로 몰락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북한은 자멸적 핵실험을 감행했다. 부시의 미국이 하도 북한의 목을 조여 한반도에서 평화의 길은 멀구나 하는 생각을 해오던 차였지만 그래도 북한이 제 발등 찍는 일만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조바심이 있었는데, 결국 국제적으로는 황당하고도 측은한 시선을 받으면서 자기들끼리는 떡 벌어지게 축하 잔치를 벌이는 진풍경을 보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한 시민사회 진영 그리고 ‘진보’ 정당에서도 북한 핵실험을 두둔하는 견해가 나타났다. 우리는 민족이 뭔지, 과연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지 혼돈의 시기를 살고 있다. 이제 정말 보수도, 진보도 모두 새로워지지 않으면 전망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다. 오래된 문제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켜켜이 쌓이면서 가슴들은 서늘하게 식어가고 고통은 조금씩 뼈를 쪼듯이 몸 안에 파고드는데, 분명히 저마다 이런 저런 이슈들을 둘러싸고 많은 항의와 분규가 발생하고 있으나, 사람들이 군사독재에 항거할 때처럼 빽빽이 손에 손잡고 역사의 저 너른 광장에 나서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관심도 이전 같지가 않다. 그래서 어느 신문이 사자성어로 멋들어지게 비유한 것처럼, “구름은 빽빽이 뭉치는데 비는 내리지 않는다(密雲不雨).”
하지만 이 비유는 현재 우리가 느끼는 답답함을 그런대로 잘 전하면서도 당면한 문제의 성격은 아주 피상적으로 짚은 것 같다. 주택(부동산), 취업(고용), 교육, 양극화, 고령화 그리고 북핵 문제들이 과연 예전처럼 집단적 동원을 통해 투쟁 전선을 형성하여 공동의 적대자를 타도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혁명적이고도 전복적인 방식으로 일거에 풀릴 수 있는 문제들인가? 우리가 지금 당면한 문제들은 과연 “비 한 번 내리면 깨끗이 흩어질 구름(一雨散雲)”같은 성격의 문제들인가?
우리 모두가 말려든, 적이 보이지 않는 시장의 시대
우리에게 닥친 이 문제들에는 예전에 겪지 못 했던 참으로 독특한 성격이 하나 있다. 이 문제들이 사회 전반적 의의와 국가적 비중을 가진 문제로 발전하는 과정에 시민 전체가 ‘문제의 당사자’로 말려들어 갔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 때문에 상당수 사람들은 그 사람으로 인해 더 많이 혹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엄청난 이익과 성공을 거두었고 훨씬 많은 사람들은 치명적인 손해와 좌절을 맛보고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목숨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방적인 수혜자나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이는 없다. 포스트 개발 독재, 시장사회로 가는 길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좇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 이것은 이 시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삶의 양식이 되고 있다. 이익을 위해 잘못을 저지르고, 경쟁하고, 미워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그것을 혐오하면서도 그렇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문제는 계속 커져 간다. 이제 이익을 추구한다는 공동의 대의(?)로 이 모든 문제가 기인하고 촉발되기에, 또한 그것을 뛰어 넘는 대안이 만만찮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투쟁 전선은 형성되지 않는다. “부자되세요”, “일등하세요”, “빨리하세요” 하는 선동이 난무하면서 누구나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마당에 거기에서 부자가 못되고 일등 못하고 빨리 가지 못한 삶들이, 부자이고 일등 하고 빨리 간 사람들, 이 승자들을 어떻게 원망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지만 누구를 붙잡아 적(敵)이나 원수로 몰아부칠 수는 없다. 시장의 시대, 세계화의 시대는 승자는 우등생, 패자는 열등생으로 치부되고 승인되는 무서운 시대다.
우리는 참으로 이상한 시대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빨리 알아채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에 패배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우리 국가는 점점 부강해지고 있다. 2006년 대한민국은 총 무역액 3천억 달러를 넘어 섰는데 이것은 전 세계 국가에서 11위에 해당하는 규모다. 그리고 외환보유고는 전 세계에서 5위이다. 첨단 기술과 아이디어에 대한 특허권은 10위권이고 의료 기술은 나날이 진보하고 있다. 사람 살릴 수 있는 능력과 재화는 점점 더 많이 가지면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점점 더 줄어들게 되리라는 전망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나라는 부유해지는데 백성은 빈곤해진다(國富民貧).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은 강해지는데 사람을 살리는 데 쓸 실력은 약해진다(力强用弱). 아는 것은 많아지는데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든다(識增業減).
이제 문제를 풀 때 눈에 보이는 적을 염두에 두고 문제를 풀려고 하면 해법이 잘 보이지 않는 시대가 왔다. 우리 시대가 고민하는 문제들이란 대부분 부지불식간에 우리 모두가 그 속에 말려들었고, 그래서 적이 우리 안에도 있는 그런 성격을 지녔다. 문제를 풀 능력과 물적 기반은 현존하는 데 우리는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문제되는 권력과 제도, 문제되는 사람, 문제되는 우리 자신이 있다. 그런데 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말없이 사라진다. 지고나면 말을 할 수 없다. 이기지 않으면 죽게 되거나 스스로 죽어야 한다. 말하면서 저항하려고 하면 패배자의 늪 속에 한없이 빠져들 뿐이다.
그래서 북한의 핵실험도 남의 일로 도외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한민국 안에서 진 사람들의 모습처럼 대한민국 바깥에서도 재연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한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북한은 그런 우리와 손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점점 더 파멸로 빠져든다. 대한민국을 적으로 아는 한 그들에게 살아남을 기회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대한민국이 그들을 적으로 아는 한 대한민국이 보유한 국가적 능력이 별로 의미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변화를 통한 접근 : 평화국가의 구상, 평화의 각성
2006년 8월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는 <이제 ‘평화국가’를 이야기하자>라는 주제로 발족 3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평화국가’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기한 이 심포지엄에서 <한반도 분단단체제와 평화국가 만들기>라는 발제를 한 구갑우 교수는 과거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 국가 사회주의 체제의 역사를 재반성하면서 “냉전체제 해체의 원인은 군사적 패배나 경제적 몰락이 아니라 정당성-이데올로기적, 도덕적, 문화적 능력-의 붕괴였다”는 분석을 제기한다. 그런데 그가 이 테제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체제 붕괴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탈냉전의 조성에서 관념 변화의 중요성, 즉 자기 체제의 유지를 위해 고수해 왔던 “적(敵)의 정체성”을 변화시키거나 폐기하고 이를 평화국가로 만듦으로써 냉전시대 남북한 적대적 공생 관계의 기반인 기존의 안보국가 담론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남한이 군비를 증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핵문제를 남북한의 공조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한을 평화국가화하고 남북한의 상호작용을 통해 북한 또한 평화국가의 길을 갈 수 있을 때, 북한 핵문제의 궁극적 해결이 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한반도의 평화(통일) 과정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 가능할 때다. 이 승인은 평화(통일)의 한반도가 주변국가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지 않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의 구상은 남한은 북한을, 북한은 남한을, 서로 적이 아니라 동반자로 인식하게 만듦으로써 단지 적대관계를 해소하거나 유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각의 자기 발전과 한반도 차원의 민족 진화의 필수조건으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남북한은 적이 아니라 단지 서로 풀어야 할 문제당사자일 뿐이다. 우리가 볼 때 이 구갑우 구상은 과거 독일이 탈냉전을 주도하면서 채용하였던 “접근을 통한 변화”(Verwandelung durch Annährung)를 정확하게 거꾸로 뒤집은 것, 즉 “변화를 통한 접근”(Annährung durch Verwandelung)을 권유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구갑우 구상과 정확하게 같은 맥락과 견지에서 참여연대의 이태호 협동처장은 평화국가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개념적 규정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평화국가는 발전된 시민국가이며, 다양한 사회적 행위자의 참여로 공동체에 닥친 위협을 판단 해결하고, 공동체 안팎에 존재하는 폭력의 근원을 해소하고 갈등을 예방하며, 이로써 구성원으로 하여금 안전하고도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하게 하는 사회이며, 정체”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행위자의 다양성이다. 본질적으로 안보문제의 민주화를 수반하고, 국방 치안 등에 대한 문민통제를 실현할 평화국가의 행위자는 안보 관료나 통치자만이 아닌 사회구성원, 즉 시민 그 자신이다. 안보 행위자로서 시민을 적극 규정하는 것은 안보 영역에서의 국가 독점의 해체를 요구하는 것이며, 위협, 폭력, 안전에 대한 시민 주권의 회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구갑우, 이태호 두 사람이 평화국가의 내부문제에 치중하고 있다면, 국제문제조사연구소의 조성렬 기획처장은 대외 관계의 맥락에서 “중급평화국가”의 구상을 제기한다. 이 때 중급이란 강대국은 아니면서 약소국 수준은 훨씬 벗어난 국력을 가진 국가군을 이르는데, 누구나 동의할 수 있듯이, 대한민국은 명백히 이 중급국가의 반열에 들어간다. 이런 중급국가가 평화국가로서 활동한다는 것에 관해 조성렬 박사는 “자국의 이익만 추구하고 대미 추종적이라는 부정적인 국가이미지를 쇄신”하고 “새롭게 ‘평화국가’의 이미지에 걸맞는 국제적인 역할”로서 “인간안보”에의 적극적 참여, 유엔 차원에서의 “국제분쟁의 방지와 평화유지활동, 그리고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한 평화창출활동” 등을 들고 있다.
이런 평화국가 구상이 아직은 대단히 이상적인 구상으로 여겨질 것은 분명하다. ‘창비 계열’이라는 별도의 명칭으로 불리면서 학계에서 동아시아 담론을 주도하는 연세대학교 사학과의 백영서 교수는 중국과 일본을 맞대고 있는 한반도 전체의 국제적 현실을 엄혹하게 대비시키면서 평화국가 구상이 대한민국 안팎에서 부딪칠 한계를 예리하게 부각시킨다. 그에 따르면, “이 구상은 근본적인 과제에 대한 주의 환기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정책을 산출해나가려면, 만만치 않은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특히 구상의 요체인 남한의 선(先)군축론에 있어서 그 적정 수준에 대해 남한 내부에서 합의를 얻기도, 또 한미동맹의 틀 안에서 조정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남한이 먼저 ‘평화국가’가 되고 남북한의 상호작용을 통해 북한 또한 평화국가로 전환해야 한다는 단계설정에서 초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평화체제가 분단영구화로 귀결되지 않도록 통일의 전망 속에서 평화의 제도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백 교수는 6.15선언에서 합의된 대로 남북이 지속적인 화해와 교류를 축적하여 ‘국가 연합 혹은 낮은 단계의 연방’에 도달하는 것, 즉 “남과 북이 함께 (평화국가라기보다는) ‘평화적 안보국가’로 전환하는 것이 최선의 실현 가능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관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한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동북아 주변 국가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연관을 갖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창비의 분단체제론과 ‘변혁적 중도주의’를 잇고 있다고 할 그의 평화적 안보국가의 길은 “ ‘현재진행중인’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정이 동북아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와 통합에도 기여할 수 있는 만큼 주변국가들이 평화적 안보국가로 전환하는 데 용이”하고 “따라서 남한만의 평화국가 만들기보다 더 믿음직한 방안”이라고 강조된다.
우리는 평화국가 구상과 평화적 안보국가 구상 사이에 중요한 견해 차이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이 ‘진보 대 진보’의 견해 차이는 계속 토론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 시대 진보 담론을 더욱 단련시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양자에 공통된 것이 있다는 것도 놓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들 담론의 방점이 안보 또는 남북 대결이 아니라 평화 그 자체, 그것도 현실적 효력이 있는 평화에 찍혀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평화에 관해 갖고 있는 관념의 철학적 건전성이다. <시민과 세계>의 공동편집인인 홍윤기 교수의 글은 흔히 우리가 염원하는 평화가 실은 우리 주변에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절실해 보이는 평화라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부재하는 평화”(absent peace)를 갖고 우리가 평화를 얘기하고 바라고 추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거가 어디에서 찾아지는가를 되묻는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홍 교수는 우선 우리 주변에서 통용되는 평화관념들을 그것이 통용되는 층위, 각 층위에서의 형태, 그리고 무엇보다 평화 여부를 판가름하는 평가 문제 등의 맥락에서 다면적으로 분석하여 “평화 상태의 입체적 존재론”을 요약한 다음, 그것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비평화 상태, 즉 전쟁, 폭력, 생명과의 관계를 통해 평화의 보다 근본적인 모습을 드러내려고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아주 놀랍게도 평화는 그것의 대립상태인 것들과 생명의 자기실현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적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즉 평화와 똑같이 전쟁이나 폭력, 나아가 군사주의가 추구하는 것 모두가 실질적으로는 인간 또는 유기체의 생명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평화와 폭력, 평화와 비평화는 다같은 (인간의) 생명 활동이며 그 소질로서 인간 능력 안에 내재적으로 잠재한다.” 그래서 결정적인 것은 폭력이나 전쟁을 추구하는 자와 평화를 추구하는 자가 공유하는 ‘생명 실현에의 욕구’를 매개로 서로 소통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궁극적 평화는 결코 적을 상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평화적 수단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길은 본질적으로, 비평화 세력과도 평화적 인간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그들에게 확신시킬 때 비로소 실현가능하다.”
한반도 주민의 생명의 가능성, 삶의 안전과 평화를 가장 치명적으로 훼손하고 지금까지의 모든 의사소통을 일거에 단절시키고 나선 듯이 보였던 북핵 사태에 직면하여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에서 개최한 토론회를 옮긴 <참여사회포럼>은 평화국가만들기 주제기획의 연장선상에 있는 토론이다. 참석자들은 “바로 우리도 피폭 피해자였다.”라는 새로운 소통의 단서를 발견하고 단지 북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핵을 문제삼는 국제연대의 절실함을 토로한다. 이 포럼에서는 안보국가, 선군(先軍)정치, 그리고 핵무장을 통한 안보라는 시대에 뒤쳐진 낡은 사고를 넘어서, 평화에 대한 시민적 각성과 남북한 평화국가로 가는 길에서 적을 만들지 않는 해법의 한 지평을 보여 준다.
우리의 살림살이 : 시민경제, 시민생활의 바탕,
공공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데 갈수록 능력을 아무리 많이 요구하더라도 당장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살림살이만큼 급한 것은 없을 것이다. 과거 같았으면 전 국민을 뒤집히게 만들었을 북핵 사태도 지금 이 순간의 대한민국 시민들의 관심사에서 우선순위가 크게 밀린다. “참여 정부에 참여가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한미FTA 착수 과정은 이제 “참여정부에 정부가 없다”는 기묘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아주 추상적으로 상정되었던 한미간의 이해관계는 인간 광우병을 몰고 올 위험과 공포를 결코 배제할 수 없는 미국산 쇠고기를 비롯한 각종 교역품들이 본격적으로 마찰음을 내기 시작하면서 이미 “저울은 기울어 판을 새로 짜야 할지도 모르지만”(이해영), 적어도 경제에서 ‘정부’를 아예 밀어낼 투자자-국가소송제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어코 막아야 한다(홍기빈, 송기호, 박상표).
그러나 미국의 강고한 국익 추구 앞에서 미국을 전적으로 적대시할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국력 차이에서만 생겨나는 문제가 아니다. 미국을 적대시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적의 이미지에 따라 미국에 폭력적 타격을 가하려고 했던 ‘9.11을 구실로’ “미국은 모든 것을 얻었다. 이라크를 통제하기 위해 대량살상무기(WMD)를 꾸며내고 테러를 유인했다. 그 후에 이란에 압력을 넣고 있다. 무슬림은 이런 미국의 행동에 대해서 테러로 대응했으나, 오히려 제국주의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무지파 찬드라).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살림의 주변, 그리고 시민사회운동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일이 더욱 절실해졌다. 정당이 취약한 상태에서 그리고 시장의 시대에 오히려 국민 생활의 구석구석을 장악해 들어가는 관료들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해지는데도 정책에 대한 책임성은 현저하게 약화되는 경향이 있다. 무책임 국가, 무책임 관료체제를 감시하고 시민적, 사회적 책임성을 높이는 새로운 권력감시운동을 펼쳐야 한다(이재근). 또 반환되는 용산 미군기지를 시민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그동안의 각종 언약들이 실행 과정에서 어떻게 교묘하게 변질되고 변색되는가를 살피고, 오랜 오욕의 군사 기지 괴물을 생명의 숲으로 가꾸는 기획은 당장 닥친 시민운동의 현안이다(홍성태).
우리는 오늘 전환기의 시민사회운동을 둘러싸고 수차례 주고 받았던 박원석, 이재영 두 분 사이의 논쟁을 어렵사리 지면으로 모셔 왔다. 민주노총은 공허하고 무력한 대결노선을 추구하다가 비정규직에게 최대한의 차선책을 가져다주는 데 오히려 실패하고도 책임을 지는 모습이나 유력한 보완책을 내놓지 않는다. 연대주의로 거듭나지 않으면 노동운동은 전망을 갖기 어렵다(박원석). 한편 시민운동은 ‘거버넌스’ 라는 명목 아래 참여 없는 참여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대거 유입되어 참석자 머릿수를 채워주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밑바닥 민중들의 삶에 구체적 이익이나 희망을 가져다준 것은 없다. 이들은 ‘개혁 엘리트 카르텔’로 고착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 “거버넌스(협치協治)보다는 솔리대리티(연대連帶)”가 요구된다(이재영). 흥미롭게도 상대 진영의 빈틈을 찌르고 있는 이 논쟁에서 우리는 두 사람 모두 연대가 살 길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음을 주목한다. 그렇다고 했을 때 본질적인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살림의 길로 갈 수 있는 공동체 차원의 상생 협력과 보편적 복지연대의 바탕, 즉 공공성의 확보이며, 그런 공공성의 틀 위에서 이루어지는 시장 경쟁이라는 것이다.
공공성의 개념은 원래는 국가 공무원에게 요구되는 대국민 복무 자세에서 유래한다. 공적인 일, 공적 이익은 국가 공무원만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라는 낡은 사고다. 또 시장의 시대에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사익 추구 활동을 저절로 공익이 되게 만들어 준다는 시장 숭배주의가 지배한다. 이 사고는 사적 영역을 자유의 영역으로 볼 뿐 ‘사적 권력’은 숨겨놓고 있다. 그러나 이제 공공성은 국가중심적, 시장중심적 사고를 넘어 시민적 공공성, 즉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들 사이의 의사소통과 상생 협력, 연대의 논리로 그 근본 토대를 바꾸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공공성을 넘어 사회경제적 공공성으로 그 지평을 확대하고 전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인 공화주의 개념을 경제학적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단초를 보여준 리차드 대거의 구상은 주목할 만하다. ‘시장’을 배경으로 한 경제활동에서 재산 소유자의 소유권이나 노동에서의 효율성은 분명히 옹호되어야 하겠지만, ‘시민’ 생활의 공공적, 자치적 가치와 관련하여 마찰이 일어날 경우 시장보다는 시민을 위하는 쪽으로 경제활동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시민경제 원칙은 경제의 근본적 근거가 이른바 현대 경제에서 경제적 합리성의 핵심으로 신봉되는 이윤이나 효율성보다는 살림살이(livelyhood)의 윤택함에 있다는 우리 상식의 보다 정교한 정식화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런 시민의 살림살이가 우선시되는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경쟁이 아니라 ‘공정경쟁’이다. 이럼으로써 우리는 경제적 이윤이나 효율성에서 약간의 감소를 감수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공동체의 살림살이는 제대로 부양할 수 있고, 진정한 삶의 풍요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능력, 우리의 의지,
그리고 ‘모두를 위한 나라’의 연대 문화 바탕
바로 이런 공동체 연대의 정신이 경제적 고려를 뛰어넘어 결과적으로는 경제적 성과까지도 거둔 스웨덴 모델(최연혁)은 복지나 분배가 단순히 경제의 마인드로만 결정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2006년 9월 17일 총선에서 스웨덴 사민당이 보수우파 연립 세력에게 패배하자 국내외에서 스웨덴 복지 및 분배 모델이 파탄했다는 찬탄이 요란했다. 그러나 바로 한 달 뒤인 10월 17일 마침 한국에 체류 중이던 쇠데르턴 대학 정치학과의 최연혁 교수는 참여사회연구소가 주최한 참여사회 토론에서 스웨덴 현지의 정반대 분위기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스웨덴 모델에 대한 논의에서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은 단순히 스웨덴 모델을 사회복지와 경제사회 모델에 국한해 접근할 때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라는 데 있다. 특히 국내의 논의에서 스웨덴 모델을 ‘높은 세금과 보편적 복지를 통한 분배의 정치’ 정도로 이해할 경우 선거의 결과를 고부담-재분배를 바탕으로 한 복지제도의 실패로 심판하는 결론을 짓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스웨덴은 높은 세율의 사회복지제도를 유지해 오면서도 일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달성한 1988년 이후 17년 만인 2005년에 3만9694 달러를 기록했다. … 다시 말해서 스웨덴 모델은 아직까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고 있는 모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최근 국제정치와 경제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입증해 보인 것 같이 고부담-고혜택의 사회복지모델로도 성장과 분배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모델”인 스웨덴 모델이 한국에도 정착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에 대해서 최연혁 교수는 참으로 비경제적인 대답을 했다. 즉, “경제적인 측면만 고려하면 복지 모델은 백발백중 실패한다. 문제는 정신이다.” 다시 말해 복지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국민의 삶에 필수적이라는 국가적 합의 아래 모든 정파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정책 경쟁을 통할 때 비로소 장기적으로 안정적으로 정착하면서 동시에 국제적 난관이 닥쳐왔을 때도 이겨낼 수 있는 근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웨덴에 ‘스웨덴 정신’이라는 것과 같은 국가적 정신문화가 강조되느냐는 물음에 최 교수는 그런 말은 없지만 ‘스웨덴 스타일’(Swedish style)이라는 말은 있다고 응답했다.
이제 적어도 진정 풍요로운 삶과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는 거의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 질 높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서로가 문제 당사자임을 인정하면서 우리에게 닥친 문제상황을 다같이 투시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냉전안보국가와 핵 위험을 넘어 평화의 국가로, 개발독재와 시장국가를 넘어 공공의 국가로 가는 길, 그리하여 다시 광장의 시민적 진보로 가는 길은 최우선적으로,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경제의 비경제적인 토대, 즉 우리를 이 땅에서 더불어 사는 자로서 묶어줄 수 있는 연대문화의 바탕, 어떤 ‘양지의 아리랑’의 에토스를 요구한다. 여전히 연약한 우리의 민주주의는 정치 경제 뿐만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연대문화전통의 비판적 계승과 성숙 없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또한 지속가능한 민주주의와 광장의 진보는 무엇보다 사람이 희망이라는 생각, 사람의 능력 신장을 위해 투자하는 사회적 책임 국가를 요구한다. 그렇게 무엇보다 사람의 능력 신장의 권리를 최우선 순위로 삼아,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고 살리는 것이 곧 경제도 살리고 나라도 살리는 길, ‘모두를 위한 나라’를 만드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버리고 죽이는 ‘평등 없는 자유’주의, 줏대 없는 허약한 자유주의가 지배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20년, 오늘 우리들의 대한민국의 백년대계를 위한 새로운 대안과 희망을 여는 초석이다.
2007년 1월
공동편집인 이병천·홍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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