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A는 medical savings accounts 의 약자로 우리 나라 말로는 '의료저축구좌' 정도가 된다. 굳이 정의를 하자면, 개인이나 가족의 의료비 지출로만 사용하도록 만든 비과세 저축구좌라 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는 싱가포르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미국, 중국, 말레이시아에서 시범사업이나 도입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제도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세계은행이 구조조정차관(SAL-Ⅱ) 협상안에서 도입 검토를 제안한 바 있고, 전경련의 공식 및 비공식 조직을 통하여 우리 나라 건강보험제도의 개편 방안으로 제시된 바 있다.
제안자들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 하기는 하지만, 감기 등과 같은 경한 질병 치료비는 개인 소유의 의료저축구좌에서 지불하고, 암과 같은 중한 질병 치료비는 건강보험에서 지불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중한 질병에 대한 보험 기능이 없이 의료저축구좌만 두는 제도는 대체로 고려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개인적금통장 하나만으로 모든 의료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의료제도가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한 질병에서의 사회보험 기능을 같이 고려하기 때문에, 의료저축제도라 함은 의료저축구좌를 중심으로 보험급여 구조를 개편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의료저축제도는 건강보험의 해결사(?)
의료저축제도는 건강보험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갖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 건강보험은, (1) 보험자(보험공단) 입장에서는 보험진료비 증가에 따른 재원조달이 당장 큰 문제이고, (2) 피보험자 입장에서는 재난성 질환에 대비하지 못하여 가계파탄을 초래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소액질병에 대해서는 의료저축구좌를, 고액질병에 대한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경우, 이 두 가지 문제점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의료비가 많이 드는 소액진료비를 줄이면서, 보험기능이 정작 필요한 고액진료비에 대한 보장성을 높인다는 논리이다. 특히, 앞으로 우리 나라의 노인의료비 증가를 고려할 때, 개인저축 형태의 의료비 조달기전이 필요하다는 논리도 한 몫 거든다.
그러나, 의료저축구좌는 사회보험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의료비 조달 방법이다.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보험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사람의 보험료를 모아 특정 인(A)의 치료비를 마련하는 제도로서 수직(횡)적인 위험분산 방법인 반면, 의료저축구좌는 개인별로 치료비를 저축하는 수평(종)적인 위험분산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소득이 많아 의료저축구좌의 적립금이 많은(수직 막대 폭이 넓은) 사람(B)은 별 걱정이 없겠지만, 소득이 낮아 의료저축구좌 적립금이 적거나(E), 만성질병으로 의료기관을 자주 방문해야 하는 사람들(D)은, 부족한 치료비를 개인적으로 마련해야만 한다. 젊었을 때 의료저축구좌 적립금이 바닥이 난 사람(C)은, 심각한 증상이 없는 한 의료이용 자체를 회피할 가능성이 높다.
즉, 의료저축구좌는 사회보험의 위험분산 방법을 바꿈으로써, 소득재분배 기능을 희생시키고, 개인 책임을 강화시킨다. 사회보험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질병 발생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나누자는 '상부상조' 제도라고 한다면, 의료저축제도는 개인이 일생동안 겪을 질병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 각자 저축을 하자는 '개인 책임' 제도이다. 경제적 약자에게는 불평등의 제도인 셈이다.
의료비 절감과 도덕적 해이 방지라는 잘못된 가정
그럼에도, 정부나 기업에서 의료저축구좌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이유는, 의료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정부는 재정 절감을 노리고 있고, 기업은 사회보험료 부담을 덜려고 한다. 의료이용자 각자가 자신의 의료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의료이용(모럴해저드)을 줄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가정이다. 의료저축구좌는 수요자(환자)측의 모럴해저드를 방지함으로써 의료비를 절감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의료서비스의 소비 결정은 제공자(의료기관, 의사 등)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러므로 수요자측을 통한 모럴해저드 방지 방법은 대체로 효과가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공공의료의 확충이나 보수지불제도의 개편 등과 같은 의료제공자 측면의 구조 개혁이 전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수요자를 대상으로 한 의료비 절감 방안이 성공할는지는 의문이다. 이 점에서, 의료저축제도를 실시하는 싱가포르의 경우, 전체 의료기관의 80%가 공공의료기관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차이'를 넘어 '사회적 연대'로
결론적으로, 의료저축제도는 의료남용을 핑계로 사회보험제도를 공격하는 세련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의료저축제도는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서의 위험분산 방법을 한 개인 또는 한 가족단위의 일생에 걸친 위험분산 방법으로 바꿈으로써, 사회보험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무력화시킨다. 모럴해저드를 방지하기 위해 소득재분배를 희생시키고, 가족보호 기능을 온존시키면서, 사회적 보호와 사회적 연대를 희생시킨다. 세계은행과 전경련에서 주목하는 이유는, 의료저축제도가 갖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요소 때문이다.
시민사회단체의 반대로 일단 내년 도입은 연기되었지만, 의료저축제도의 세련된 논리구조와 의료비 절감에 대한 매력적 요소로 인하여, 앞으로 지속적으로 정부와 기업의 지원 속에 의료저축제도에 대한 도입 논의가 불거질 것이다.
결국, 의료저축제도를 둘러싼 논의는 사회보험의 기본적인 정신인 '사회적 연대'가 우리 사회에서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될 전망이다. 즉, 다양한 차이를 갖고 살아가는 동시대의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사는' 방식의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하나의 시험대라고 할 수 있다.
월간 <복지동향> 2001년 03월호(제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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