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4 2014-05-10   874

[칼럼] 세월호 참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까 두려워진다

세월호 참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까 두려워진다.

윤홍식 ㅣ 인하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서울시청 광장에 마련된 분향소로 향하던 날, 비는 참 구슬프게 내렸고, 길게 늘어선 시민들의 숙연한 뒷모습은 기다리는 이의 마음을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분양을 위해 두 손으로 맞잡은 창백한 하얀 국화처럼, 나와 시민들의 마음과 몸짓은 창백했고, 세상은 온통 잿빛으로만 보였다. 돌아오기를 염원하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소망과 추모의 벽에 아로새긴 시민들의 간절함을 읽어 내리면서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 슬픔, 미안함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또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세월호 유족들은 몇 일째 특검도입과 청문회 개최를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얼마나 답답하고 기가 막힐까?

불현듯 우리가 정말 세월호 참사를 슬퍼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아니 우리에게 슬퍼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묻는다. 경제성장을 위해 인권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았던 독재정권을, 공과(功過)는 구분해야한다는 점잖은 논리로 찬양하는 정치인, 지식인, 시민들이 있는 사회에서, 어쩌면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가 치러야할 소소한 비용일지도 모른다. 독재에 의해 소리 없이 잡혀가고, 고문 받고,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과 가족들의 슬픔과 통곡은 “경제성장”이라는 집단적 환각장치에 의해 잊혀 지기를 강요받았고, 정당화되었다. 독재정권시기 이룩한 경제성장은 절대다수를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했기 때문에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했다고 강변하는 사회에서, 그 소수의 희생을 대가로 먹는 밥술에 대한 어떤 정당한 평가도, 치열한 반성도 없다. 단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는 사회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정한 슬픔과 반성은 가능하지 않다. 인권을 유린하고도, 민주주의를 억압하고도 경제가 성장하면 된다는 것을 보고, 배운 사람들이 아니던가. 나라님도 한일인데, 이들에게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그까짓 소소한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 무엇이 대수이겠는가. 인권유린과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이룬 경제성장과 비교하면 세월호 승무원들과 선주가 무시한 규정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누구를 위한 대의인지도 모를 경제성장을 위해 시민들의 희생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소소한 원칙들은 그저 요식행위일 뿐이다.

마이클 샌델이 이야기한 포드사의 핀토라는 소형차 이야기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다. 포드사는 연료탱크가 쉽게 폭발하는 핀토차의 결함으로 인한 시민의 죽음과 부상으로 인해 자신들이 치러야하는 경제적 비용은 4,950만 달러였다. 반면 핀토차에 안전장치를 설치할 경우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할 수는 있지만) 자신들이 부담해야하는 비용은 1억 3,750만 달러였다. 결국 포드사는 핀토차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지극히 천박한 공리주의와 너무나 똑 같지 아니한가.

이런 일들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누가 이윤추구를 제일로 하는 기업인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국가 최고지도자들이 나서서 그 들의 매출이 곧 경제성장이고, 국가의 발전이며, 일자리 창출이고, 시민들의 먹 걸이를 마련하는 길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상찬하는 사회에서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선장과 일부 선원들의 행태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신들 이외에는 그 누구도 자신들과 가족들의 안위를 책임지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면, 한국이라는 국가는 그들의 부모형제와 자녀들을 그들처럼 보살필 수 있을까? 죽음오로 내몰리는 학생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젖은 돈을 말리던 선장의 모습에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치미는 것은 바로 그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스스로 살길을 찾아 전쟁 같은 삶을 살아야하는 사회의 당연한 결과이다. 부모의 능력에 따라 아이들의 성적과 대학입시가 결정되고 노동시장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에서, 최소한의 기본적인 복지도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나와 내 가족을 제외하고 다른 누군가의 안위를 염려하는 것은 사치이다. 선장과 일부 선원들은 타고 날 때부터 이기적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다음에야, 그들의 행위는 바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고, 경제성장을 선택함으로써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좌초시킨 한국 사회의 자화상인 것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안전문화를 강화하고, 권력 감시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전문화를 강화하고, 권력 감시를 강화한다고 해도, 기업과 부자들만을 위한 경제성장 제일주의의 패러다임이 패기 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우리는 단지 투명한 자본주의에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뒤로하고, 가시적 결과만을 최고로 치고, 어떻게든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연이어 벌어진 서울지하철 2호선 전동차의 충돌은 우리사회 곳곳이 침몰하는 세월호와 같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희생양을 찾고,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도대체 국가와 정부는 어디에 있으며 왜 존재하는 것일까?

누군가 북유럽 사람들에게 물었다. 국가란 당신들에게 무엇이냐고? 그리고 누군가 한국인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에게 국가란 무엇이냐고? 한국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잊을 것이고, 우리는 또 세월호 참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까 두려워진다.

월간 <복지동향> 2014년 05월호(제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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