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ㅣ영남대 휴먼서비스학과 교수
영국은 이전까지 복지국가 발전 과정에서 독특한 ‘제도적 선도성’을 보여왔다. 구빈법 시대부터 기존 복지제도의 틀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며 새로운 원리와 운영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역사적 단절과 새로운 복지 체제로의 도약을 이루어내는 특징을 보였다(문진영, 2004). 이러한 변화는 집권당의 정치사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다. 베버리지 보고서를 기반으로 한 현대 복지국가의 성립은 에틀리 노동당 정부에 의해 이루어졌고, 1979년 대처(Thatcher)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거쳐, 1997년 블레어(Blair)의 ‘제3의 길’에 이르기까지 영국은 시대적 전환기마다 새로운 복지국가의 패러다임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최근 10여 년간 영국의 모습은 그러한 선도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2010년 이후 보수당 정부는 뚜렷한 비전이나 체계적 전략이 부재한 채 긴축정책으로만 일관하면서 “역대 최악의 유산”을 남겨왔다(Eaton, 2024). 공공서비스는 붕괴 직전이며, GDP 대비 국가부채는 1960년대 초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국민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NHS), 교육, 국방, 친환경 에너지 전환 등 모든 영역에서 막대한 지출 압박에 직면해 있다. 더구나 소득 증가율 측면에서 역대 최악의 의회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Clegg and Corlett, 2024).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Gordon Brown)이 이끈 신노동당(New Labour) 정부의 실각을 부른 금융위기와 브렉시트(Brexit), 코로나19의 혼란 끝에 2024년 12월, 키어 스타머(Keir Starmer)가 이끄는 노동당은 13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긴 시간 동안 혼란의 시기를 겪었던 노동당이 마침내 집권에 성공하면서, 스타머 노동당이 약속한 “국가 재건의 10년”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 그리고 이것이 영국 복지국가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다시 주목되는 시점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보수당 정부가 남긴 유산을 살펴보고, 노동당의 실패와 재기 과정을 짚어본 후, 스타머의 정치사상과 주요 정책을 검토함으로써 영국 복지국가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긴축과 브렉시트: 13년간의 보수당 정부가 남긴 유산
2010년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 출범 이후, 영국은 급격한 긴축정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재정적자 해소를 명분으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무책임의 시대가 긴축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고 선언하며, 재무장관 조지 오즈번은 각 부처 예산의 최대 40% 삭감을 요구했다(Helm et al., 2023). 이는 단순한 예산 삭감을 넘어 영국 복지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구조적 변화였다.
긴축정책의 가장 큰 피해는 공공서비스의 질적 저하로 나타났다. 영국의 자랑이자 무상 의료체계의 상징인 NHS의 위기가 대표적인데, 2023년 기준 수술 대기자 수가 750만 명을 넘어섰고,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주택 공급은 1920년대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특히 2023년에는 147개 공립학교 건물이 붕괴 위험에 처해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으며, 잉글랜드 최대 지방자치단체 중 하나인 버밍엄 시의회가 사실상 파산을 선언했다(Helm et al., 2023). 2010년 이후 중앙정부의 지방정부 지원금이 40% 이상 감소하면서, 많은 지방정부가 기본적인 공공서비스 제공조차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Taylor-Gooby(2013)는 보수당의 긴축정책이 복지국가에 대한 ‘이중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분석한다. 첫 번째 위기는 즉각적인 지출 삭감으로, 이는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첫째, 정치적으로 민감한 보편적 서비스(NHS, 교육, 연금)는 상대적으로 보호된 반면, 저소득층을 위한 재분배적 급여는 크게 삭감되었다. 둘째, 지방정부 예산이 5년간 30%나 삭감되면서, 노인 돌봄, 장애인 지원, 아동보호 등 취약계층을 위한 사회서비스가 크게 축소되었다. 두 번째 위기는 장기적 차원의 것으로, 고령화와 의료 기술 발전 등으로 인한 복지 수요 증가에 대응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다.
2016년 브렉시트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EU 단일시장 탈퇴로 인한 경제성장 둔화는 GDP를 4% 감소시켰고, 이는 공공서비스 투자 여력을 더욱 제한했다(Helm et al., 2023). 조셉 라운트리 재단(Joseph Rowntree Foundation, 2024)에 따르면, 2021/22년 기준 영국 인구의 22%(1,440만 명)가 빈곤 상태에 있으며, 이는 1970년대에 비해 50% 증가한 수치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극심한 빈곤이 증가하여 600만 명이 이에 해당하며, 이는 20년 전보다 150만 명이 더 많은 수준이다. 특히 2022년에는 약 400만 명(그중 100만 명은 아동)이 식사나 난방을 위해 자선단체에 의존해야 하는 궁핍 상태를 경험했다.
Wamsley(2024)는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예산 삭감을 넘어 영국 복지국가의 근본적인 성격을 변화시켰다고 분석한다. 2019년까지 사회보장 급여는 1948년 현대 영국 복지국가 설립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2012년 도입된 유니버설 크레딧은 ‘복지의 재상품화’를 가속했다. 이는 복지 수급자들을 강제로 노동시장에 진입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특히 장애인, 한부모 가정 등 전통적으로 노동시장 참여가 어려운 계층까지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내몰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수급 자격 심사 강화, 급여 제재 확대 등 강제적 조치를 통해 이루어졌다.
레졸루션 재단(Resolution Foundation)의 전망은 더욱 비관적이다(Clegg and Corlett, 2024). 현재의 복지정책이 지속될 경우 2024~2025년부터 2029~2030년 사이 실질 중위소득의 연평균 성장률은 0.4%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며, 빈곤율은 2029~2030년까지 23%로 상승하여 2000~200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아동 빈곤율은 32%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측되어, 1990년대 이후 최고치가 될 것으로 우려된다. 더욱이 파키스탄계(51%)와 방글라데시계(53%) 가구 등 소수인종 가구의 경우 빈곤율이 특히 높아, 인종 간 불평등도 심화되고 있다.
13년간의 보수당 정부는 긴축정책과 브렉시트라는 이중의 위기를 통해 영국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특히 GDP 대비 국가부채가 1960년대 초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스타머 노동당 정부는 심각한 재정적 제약 속에서 이러한 위기를 해결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Eaton, 2024). 이는 1945년 베버리지 보고서를 통해 현대 복지국가의 모델을 제시했던 영국이 이제는 그 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당의 실패와 재기: 코빈의 실험과 스타머의 현실주의
이렇게 오랜 긴축정책이 진행되는 동안 노동당은 세 번 연거푸 선거의 패배를 반복했다. 2015년 총선부터 영국 노동당에게는 충격적인 패배였다. 당시 당 대표 에드 밀리밴드는 보수당의 긴축정책에 대한 불만이 높았던 상황에서 승리를 확신했으나, 두 가지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Lambert, 2021). 하나는 스코틀랜드에서의 몰락으로, 2010년 41석이었던 의석이 단 1석으로 줄어들었다. 다른 하나는 반이민, 반EU를 내세운 영국독립당(UK Independence Party, UKIP)의 부상으로 잉글랜드 북부의 노동계급 지지 기반이 크게 흔들린 것이었다. 당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급진 좌파 제레미 코빈이 예기치 않게 당 대표가 되었다. 원래 의원들은 ‘균형’을 위해 그를 후보 명단에 올렸을 뿐, 당선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밀리밴드가 도입한 새로운 당원 투표제도 하에서, 수만 명의 새로운 젊은 당원들이 가입하며 코빈을 지지했다(Lambert, 2021). 이는 2010년대 초반의 반긴축 운동, 학생 운동 등이 만들어낸 새로운 좌파 정치의 결실이었다. 특히 소셜 미디어와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 조직화는 기존 노동당의 관료적 구조를 우회하며 젊은 세대의 열정적 참여를 이끌어냈다(Forrester, 2021).
2017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철도와 에너지 기업의 국유화, 대학 등록금 폐지, NHS에 대한 대규모 투자 등 1980년대 이후 가장 급진적인 정책을 내세웠음에도, 40%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1997년 토니 블레어의 승리 이후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보수당의 테레사 메이가 매우 부실한 선거 운동을 펼쳤고, 브렉시트를 둘러싼 노동당 내부의 깊은 균열이 아직 표면화되지 않았던 시기의 일시적인 성과에 그친 것이었다.
브렉시트 문제는 결국 코빈 지도부의 치명적 약점이 되었다. 2019년 3월, 메이의 브렉시트 협상안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두 번째 국민투표를 요구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당은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친EU 성향이 강한 도시 지역 지지자들과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북부 노동계급 지역 간의 간극을 코빈은 해결하지 못했다. 여기에 당내 반유대주의 논란에 대한 미숙한 대응이 겹치면서 지도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2019년 총선은 노동당의 역사적 패배로 귀결되었다. 무료 광대역 인터넷 제공부터 노인 돌봄 무상화까지, 너무 많은 정책이 충분한 설명 없이 제시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브렉시트에 대한 모호한 입장과 전통적 노동계급과의 소통 부재는 치명적이었다. 옛 산업도시들에서 노동당의 오랜 지지기반이 무너지며, 이른바 ‘붉은 벽(Red Wall)’으로 불리던 북부 잉글랜드의 많은 선거구가 보수당으로 넘어갔다(Proctor, 2019).
키어 스타머는 이러한 실패의 교훈을 바탕으로 노동당의 재건을 시작했다. 노동계급 출신으로 인권변호사가 되어 검찰총장까지 지낸 그의 이력은 전문성과 신뢰성을 상징했다. 처음에는 “사회주의의 도덕적 명분”을 강조하며 좌파들을 안심시켰지만, 점차 실용주의적 노선으로 선회하며 중도층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코빈 시기의 급진적 정책들을 수정하고 당내 극좌 세력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내부 반발도 있었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당의 선거 경쟁력 강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전환은 2024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13년 만에 정권을 탈환하는 토대가 되었다.
스타머의 정치사상: 공정과 기회의 새로운 사회계약
키어 스타머의 노동당 정부는 대처리즘이나 제3의 길과 같은 새로운 사회정책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이를 진단해 보기 위해서 김보영(2009)이 제시한 정치사상 분석틀을 적용해 보았다. 이 분석틀은 시대적 도전, 사상적 목표, 정치철학, 주체의 역할, 시민권 등의 요소들을 통해 특정 시기 정치사상의 특징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 분석은 스타머의 페이비언 소사이어티 저작인 “앞에 놓인 길(The Road Ahead)”(Starmar, 2021), 2024년 노동당 선거 강령 “변화(Change)”(The Labour Party, 2024), 그리고 뉴스테이츠먼(The New Statesman), 가디언(The Guardian) 등 주요 언론의 분석 기사들을 주요 자료로 활용했다.
먼저 스타머와 노동당은 영국이 직면한 시대적 도전을 세 가지 차원에서 진단했다. 첫째, 보수당 정부의 12년이 영국 사회에 전례 없는 혼란과 공공서비스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NHS의 대기 시간이 사상 최장을 기록했고, 실질 임금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했으며, 70만 명의 아동이 추가로 빈곤에 빠졌다고 분석했다. 둘째, 브렉시트가 영국 사회의 깊은 분열을 드러냈다고 보았다. 도시와 지방, 젊은 세대와 고령층,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간의 간극이 더욱 벌어졌다고 진단했다. 셋째, 기후변화와 기술변화라는 구조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국가들이 친환경 산업 육성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동안, 영국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스타머는 ‘기여 사회(contributory society)’라는 새로운 비전을 목표로 제시했다. 이는 단순한 복지국가의 재건이 아닌, 노동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모든 시민의 기여가 존중받는 새로운 사회계약이라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핵심 목표를 주창했다. 첫째, 노동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노동권 보장과 근로조건 향상을 내걸었다. 둘째, 공정한 기회의 보장이다. 교육과 직업훈련 시스템을 개혁하여 배경과 관계없이 모든 젊은이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셋째, 생활 수준의 전반적 향상이다. 의료, 교육, 에너지 등 공공서비스 강화를 통해 모든 시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겠다고 공약했다.
스타머의 정치철학이 ‘일의 존엄성’과 공동체주의적 가치관에 기반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시장 만능주의와 능력주의적 엘리트주의를 넘어서고자 한다는 것이다. 특히 모든 종류의 노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철학을 강조하며, 이는 블레어의 ‘제3의 길’이 간과했던 노동의 본질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시에 코빈 시기의 급진적 재분배나 보편적 기본소득과 같은 탈 노동 접근과도 거리를 두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노동을 통한 사회 기여와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는 호혜적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비전 실현을 위한 주체들의 역할도 명확히 제시했다. 정부는 단순한 관리자가 아닌 적극적 투자자이자 리더로서, 미션 중심의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경제와 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기후변화 대응이나 산업 전환과 같은 장기적 과제에서 정부의 전략적 역할을 강조했다. 기업은 정부의 파트너로서, 지역사회에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번영에 기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기업에게 안정적인 정책 환경과 인프라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시민은 성실한 노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그에 상응하는 존중과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권에 대해 스타머는 권리와 책임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시민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를 배려하고 사회에 기여할 책임이 있다고 역설했다. 이는 코로나19 위기 동안 보여준 시민들의 연대와 희생정신을 새로운 시민권의 모델로 제시한 것이다. 국가는 시민에게 공정한 기회와 대가, 그리고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스타머는 “민족주의(nationalism)가 아닌 애국심(patriotism)”이라는 표현을 통해, 분열이 아닌 통합을 추구하는 시민권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브렉시트 이후 심화된 사회적 분열을 치유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민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하고자 하는 비전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타머 노동당의 핵심 전략과 정책: 공공주도 투자와 생활 수준 향상
스타머 노동당의 핵심 전략은 국가의 주도적인 투자를 통한 경제 성장과 생활 수준 향상이다. 신노동당이 교육과 훈련 등 ‘사회 투자’를 통한 내생적 성장 이론(endogenous growth theory)에 기반한 간접적 성장전략을 추구했다면, 스타머의 전략은 보다 직접적인 공공투자에 기반을 둔 성장전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투자 전략은 단순한 경제성장을 넘어 다중적 목표를 추구한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2030년까지 65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연간 17억 파운드(약 2조 8천억 원)를 GB 에너지(Great British Energy) 설립에 투자하고, 11억 파운드(약 1조 8천억 원)를 주택 에너지 효율 개선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5년간 150만 호 건설을 통해 주거 위기 해결과 건설 부문 일자리 창출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The Labour Party, 2024).
동시에 ‘근로자를 위한 뉴딜’을 통해 고용 첫날부터의 노동권 보장, 제로아워 계약1 폐지, 단체교섭권 확대, 해고 후 재고용 관행 금지 등 노동자의 권리 보장과 처우 개선을 핵심 전략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블레어 시기 노동당이 “영국 노동법을 서구 세계에서 가장 노동조합을 제한하는 법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던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접근이다(Eaton, 2024).
이러한 전략에 대해서는 규모의 적절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노동당의 녹색 투자 규모(237억 파운드, 약 39조 5천억 원)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3,750억 달러, 약 500조 원)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이며, 150만 호 주택 건설 목표는 1969년 이후 달성된 적 없는 수준이라는 지적이 있다(BBC, 2024).
그 외 주요 정책을 살펴보면 의료, 돌봄, 교육 등의 부분에서 공공 재원 확보를 통한 공적 서비스 강화를 제시하고 있다(The Labour Party, 2024). 먼저 공공 재원 확보를 위해 80억 파운드(약 13조 3천억 원) 규모의 증세를 계획하고 있다. 비거주자 세금 지위 변경, 탈세 단속 강화, 사립학교 부가가치세 부과, 에너지 기업 초과이윤세 등이 주요 내용이다. 확보된 재원은 녹색 투자(40억 파운드, 약 6조 7천억 원), NHS 수술 확대, 정신건강 인력, 전문 교사, 초등학교 아침 급식 클럽 등에 투입될 예정이다.
NHS 개혁과 관련해서는 주당 4만 건(연간 200만 건)의 추가 진료 제공을 목표로 주말 서비스 확대와 민간 부문 활용을 제시했다. 이는 현재 수준에서 2% 증가에 해당하는 규모지만, 대기 시간을 정상화하는 데 충분할 수 있다고 평가된다. 재원은 비거주자 세금 제도 단속을 통해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돌봄 서비스는 ‘먼저 집에서(home first)’ 원칙에 기반한 국가 돌봄서비스(National Care Service) 구축을 제안했다. 이는 국가 표준에 따른 품질 관리, 돌봄 노동자를 위한 공정임금 협약, 요양원 거주자 가족의 면회권 보장 등을 포함한다. 또한 2025년 10월부터 시행 예정인 개인 돌봄 비용 상한제(8만 6천 파운드, 약 1억 4천만 원)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교육 부문에서는 사립학교 수업료에 20% 부가가치세를 부과하여 확보한 재원으로 6,500명의 교사를 추가 채용하겠다고 제안했다. 특히 수학과 물리학 등 핵심 과목의 교사 확보에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정책들에 대해서는 실현 가능성과 구체성 측면에서 여러 우려가 제기된다. 세수 확보는 학부모들의 반응이나 에너지 기업들의 대응에 따라 불확실할 수 있으며, 일부 사립학교는 공립으로 전환해야 할 수도 있다. NHS 추가 진료 계획은 “놀라울 정도로 세부 사항이 결여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응급 서비스 수요 증가와 퇴원 지연 문제 등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불명확하다. 돌봄 서비스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재원 조달 방안이 제시되지 않았고, 교사 확보 정책도 업무량 문제와 2010년 이후 12% 하락한 실질 임금 등 구조적 문제 해결 없이는 달성이 어려울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BBC, 2024).
스타머 노동당의 도전과 과제: 정체성의 모색과 복지국가의 미래
지금까지 2024년 영국 총선에서 승리한 키어 스타머의 노동당이 제시하는 새로운 정책 방향을 살펴보았다. 스타머의 노동당은 1997년부터 2010년까지 집권했던 블레어와 브라운의 ‘신노동당’ 노선이나,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당을 이끌었던 제레미 코빈의 좌파 노선과는 차별화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통한 경제성장, 노동자의 권리 강화, 시민들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Eaton, 2024).
2024년 총선은 보수당 12년 집권 동안 누적된 문제들에 대한 국민적 심판의 성격을 띠었다. 브렉시트 이후 심화된 사회적 갈등, 의료・교육 등 공공서비스의 악화, 물가 상승으로 인한 생활고 등이 주요 쟁점이었다. 이번 선거를 통해 구성된 의회는 335명의 초선 의원을 포함해 역대 최대 규모의 여성 의원(242명)과 소수인종 출신 의원(13%) 비율을 기록하며 영국 사회의 다양성을 더 잘 반영하게 되었다(McNulty, 2024).
그러나 집권 100일을 맞이한 스타머 정부는 여러 난관에 봉착했다. 정부 수석 보좌관 임명을 둘러싼 논란, 겨울철 에너지 가격 급등에 대한 미흡한 대응, 복지혜택 축소 논란 등으로 초기 혼란을 겪었다(Kuenssberg, 2024). 더욱 근본적으로는 정부의 정체성과 방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내각에서부터 “우리는 항상 코빈이 아니었고, 그 다음엔 보수당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The Guardian, 2024). 이는 스타머 노동당이 전통적 노동당의 국가 주도적 접근과 신노동당의 시장 친화적 정책 사이에서 여전히 모호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국영 에너지 회사 설립, 철도 국유화, 노동자 권리 강화 등 전통적 노동당의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건전성 강조와 점진적 개혁을 통해 중도층을 끌어안으려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스타머 정부의 성공 여부는 이러한 모호성을 어떻게 구체적인 정책으로 전환하고 일관된 방향성을 통합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특히 국가 주도 투자를 통한 경제성장, NHS와 교육 등 공공서비스 개혁, 생활비 위기 해결 등 핵심 공약들의 실질적 이행과 가시적 성과 창출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스타머 노동당 정부의 성패는 단순히 정책의 성공적 이행을 넘어, 또다시 영국이 21세기 복지국가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느냐를 판가름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시장 만능주의도, 가부장적인 국가 개입도 아닌, 기후 위기에도 대응할 수 있는 조화로운 성장과 분배의 새로운 경로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 영국 노동당이 마주한 진정한 도전이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실험이 될 것이다.
| 미주 |
- 제로아워 계약(Zero-Hour Contract)은 정해진 노동시간 없이 임시직 계약을 한 뒤 일한 만큼만 시급을 받는 노동 계약을 의미한다. ↩︎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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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복지동향> 2025년 01월호(제3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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