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8일 의료보호법 개정안이 입법예고되었다. 새로이 제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때를 같이 하는 의료보호법 개정은 전과는 다른 특별한 의의를 갖고 있다.
지난해 제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헌법이 국민들에게 부여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법으로서, 현 정권 출범이후 사회복지 분야에서 가장 개혁적인 입법이었다는 점에 이의가 없다. 특히 이 법은 시민단체의 오랜 투쟁의 결과로 제정되었다는 점에서 우연의 산물이라고 볼 수 없다. 다른 측면으로 생각한다면 시민단체는 이 법의 실천 과정을 끝까지 참여하여 책임져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기도 하다.
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하면 국가가 정하는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국가의 자선 사업의 "대상"이 아니라, 국민복지기본선을 획득하기 위한 "수급권자"인 것이다. 다만, 기초생활보장법의 여러 급여 중에서 의료급여는 내용이 다소 복잡하여 이 법에서 그 내용을 모두 담지 못하고 "따로 법률이 정하는 바"를 따르도록 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그 동안 여러 차례 있었던 의료보호법 개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시민단체는 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직후부터 의료보호법의 근원적인 변화를 기대해 마지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의료보호법의 개정 과정에서 기존의 법과 동일선상에서 행정 절차의 변경이나 일부의 문구 수정만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새로 입법 예고된 의료보호법은 다음과 같은 근원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 종별 구분의 문제이다. 기존의 생활보호법과 의료보호법에서는 생활보호대상자를 1종과 2종으로 구분하였다. 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하면 최저 생계비 이하의 소득자에 대해서 법률이 정하는 급여를 국가가 보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의료보호법에서는 여전히 대상에 따라 급여 범위를 달리 하도록 되어 있어 종별구분의 여지가 남아 있다.
둘째, 종별 구분과 맥을 같이하는 본인부담금의 문제이다. 입법예고된 의료보호법안에는 여전히 본인부담금이 남아 있다.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쳐서 국가가 생계비를 지급하는 빈곤층이 병에 걸렸을 때 본인이 의료비를 부담하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다.
한편 생각하면 의료보호법과 관련하여 정부의 이러한 의도의 배경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여러 가지 자료에 근거하여 볼 때 종별 구분을 폐지하고 본인부담금 전체를 철폐할 경우 의료보호기금에서 지출해야 할 진료비가 폭등할 것이 우려되지 않는 바가 아니다. 전문가에 따라 다르지만 1999년 현재 1조를 넘어선 진료비가 본인부담금을 철폐할 경우 많게는 7천억원 가까이 진료비 상승이 우려되기도 한다. 또한 아무리 적게 추산해도 1천억 정도의 진료비 상승은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여기서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우리가 지금 걱정하여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최저 생계비를 벌지 못하는 빈곤층이 병에 걸렸을 때 지나치게 의료이용을 많이 할 것이 두려워서 본인부담금을 물게 한다는 것은 중산층 이상의 의료보험환자에 대하여 본인부담금을 물게 하는 것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일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본인부담금을 물게 하면 결국 필수적인 최소한의 의료이용을 못하고 계속 질병을 안고 살면서 장애인이 되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미 법적으로 본인부담금을 물지 않도록 되어 있는 현재의 의료보호 1종 환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본인부담금을 내고 있다는 사실은 의료계에서는 공개적인 비밀이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게다가 병에까지 걸렸다. 그래서 서럽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이를 개인이 "뒤집어 쓰고" 결국 돈이 없어서 질병을 고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묵과해도 좋은가?
이러한 논점을 강조하게 되면 항상 제기되는 반론은 의료보호환자의 불필요한 의료이용과 이른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문제이다. 의료기관의 현실에서 보면 별다른 병도 없이 입원을 하게 해달라고 애걸하는 의료보호 환자를 쉽게 볼 수 있다. 또 특별한 병이 있어서 입원을 했더라도 퇴원을 하도록 권유하면 여기 저기 아픈 곳이 생긴다. 검사를 하면 별 일 없기 때문에 다시 퇴원을 권유하지만 환자는 쉽게 가려하지 않는다. 특히 겨울에 심하다. 이런 환자는 의사 입장에서 얄밉기까지 하다. 어떤 병원에는 아예 블랙리스트가 있어서 그 환자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입원을 하려 하면 무슨 일을 동원해서라도 막는다.
이러한 현실은 병원 경영이 그래도 좋은 편인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병상을 채우지 못하는 등 경영난에 허덕이는 병원은 이러한 의료보호 환자와 결탁을 쉽게 한다. 본인부담금 없는 환자는 입원을 시켜주어서 고맙고, 텅텅 비는 병상을 그래도 국가에서 주는 의료보호비용이라도 챙길 수 있는 병원은 병원대로 이익이다. 한마디로 이러한 비효율의 현실을 보면 의료보호환자의 본인부담금을 폐지하자는 것이 매우 철없는 주장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이러한 환자들은 정말로 게으르고 남을 속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일까? 아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 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그야 말로 병원이 아니면 갈 곳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는 이른바 "진짜 가난한" 사람이다. 이런 환자들이 입원하면 퇴원을 시키고 싶어도 보낼 곳이 없다. 환자들도 물론 세끼 밥과 따뜻한 건물 안에 있는 것이 그래도 거리에 나 앉는 것보다야 나은 것이다. 그렇게 퇴원하라고 구박받고 세균이 득시글거리기도 하지만,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병원인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인부담금을 부과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해결책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갈 곳 없는 환자에 대해서 갈 곳을 마련해 주면 된다. 병원은 전 세계를 막론하고 자원의 투입량과 소모량이 가장 많은 기관이다. 특별히 병이 없지만 기능상태가 저하되어 의사가 아닌 가족처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사람은 병원이 아닌 요양시설로 보내고, 이도 저도 필요 없이 그저 세끼 밥과 따뜻한 울타리가 필요한 사람은 주거시설을 마련해 주면 될 것이다. 이러한 요양시설과 주거시설은 병원에 비하여 초기투자비용과 운영비용 모두가 절대적으로 낮다. 전체 의료비의 폭증이 걱정된다면 이미 과잉 공급되어 있는 의료기관을 요양시설과 주거시설로 기능 전환을 유도하여 총량이 증가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공급을 확충하면 될 것이다.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서비스를 병원에서 해결하려는 것이 의료비가 폭증하게 되는 원인이다. 물론 이러한 서비스를 반드시 의료보호기금에서 해결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도 빈곤층에 대한 서비스를 의료와 복지로 명확하게 구분하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 반면 빈곤층에 대하여 의료와 복지가 협력하여 접근하지 않는 나라도 없다. 이제 우리도 의료보호 진료비가 폭증하는 상황이기에 개별 주무부서의 협소한 입장에서 한걸음 물러서서 총체적인 시각에서 걱정하고, 전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원적인 사고를 해야할 시점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 개정될 의료보호법에서는 본인부담금을 가능하면 그대로 고수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저소득층에 대한 보건의료복지서비스의 제공체계를 보다 근원적으로 개혁하는 내용을 담보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기초생활보장법의 기본 정신을 살려 본인부담금과 종별 구분을 철폐하더라도 거시적인 효율성을 제고하여 진료비의 증가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빈곤과 불건강은 서로 악순환의 고리를 반복한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질병이 많고, 가난하지 않더라도 질병에 걸리면 가난해 진다. 더욱이 우리 나라와 같이 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조차 불완전한 경우, 의료보호는 이러한 빈곤과 질병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다.
경제 위기 이후의 새로운 빈곤층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고용상태의 불안정, 지속적인 구조조정, 이러한 현상이 이제는 경제구조의 특성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마당에 누구도 더 이상 빈곤이 어느 한 개인의 무지나 게으름의 산물이라고 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빈곤층의 질병 문제를 자기 문제라고 생각해 보자. 아픈 것도 서러운데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해, 가계는 파탄에 이르고 개인은 장애인이 되고 그리고 죽어갈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것을 방치해도 좋을 것인가. 이것은 바로 사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야만이 아닌가?
새로 개정될 의료보호법에서는 반드시 종별구분이 철폐되고 본인부담금은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 정부가 처음부터 천명한 생산적 복지와 최근의 소득 분배 개선을 위한 선언은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을 보장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의료이용을 보장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건강보장을 위한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야 할 것이다. 새로운 법에는 질병에 대한 치료 뿐 아니라, 특히 빈곤층에이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질병예방에서 재활에 이르는 폭넓은 보건의료서비스를 보장하여야 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빈곤층의 건강대책에 대한 마스터플랜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월간 <복지동향> 2000년 05월호(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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