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의약분업 시행 과정에서 정부의 의약분업 제도 설계 잘못과 과도한 수가인상으로 촉발된 건강보험의 재정 위기는 급기야 사회보험으로서의 건강보험의 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있는 민간보험과 의료저축제도 도입에 관한 논의로 확대되고 있다. 더구나 정부가 올해 5월 말에 발표한 소위 '건강보험 재정 건전화 방안'의 재정 절감효과가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담배 부담금 인상으로 건강보험의 재정을 충당하려는 계획이 야당과 시민사회단체의 반대로 표류하면서 정부는 건강보험의 재정 위기를 의료저축제도 도입 등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0년 7월 1일, 의료보험 통합으로, 사회연대성에 기초한 건강보험이 출범된 지 겨우 1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우리는 건강보험제도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새로운 제도에 대한 논란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면 정부가 도입하려 하고 있는 의료저축제도는 과연 어떤 제도이며, 이 제도를 도입하면 과연 건강보험 재정 위기의 극복을 포함한 건강보험의 여러 문제가 해결 가능한지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의료저축제도란 '개인이나 가족이 소득의 일부를 강제로 저축하도록 하고 저축된 돈을 의료비에만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의료저축제도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현재 정부에서는 이를 '소액진료비'의 지불에 주로 사용하려 하고 있다. 의료저축제도에 사용되는 구좌는 개인 소유이며, 다만 이 구좌의 돈은 의료비 이외에는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재산권 활용의 제한은 있지만 본인이 사망하였을 경우 이를 상속할 수 있는 등 사회보험과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의료저축제도의 문제점
의료저축제도는 사회보험인 건강보험과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게 되며, 의료저축제도가 근거하고 있는 가정과 건강보험 재정 및 의료제도에 대한 효과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소득재분배 기능과 사회적 연대성의 원리가 상실된다.
의료저축제도는 의료보장의 '원칙적인 측면'에서 사회보험으로서의 건강보험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사회보험의 기본적인 원칙은 '능력(소득 또는 재산)에 따라 부담'하고 '필요에 따라 의료이용'을 하는 것이다. 능력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보험료를 부담함으로써 소위 사회계층간 소득재분배(이를 수직적 소득재분배라 한다)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자영자의 소득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영자 내부와 피용자 내부에서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은 존재한다. 의료저축제도에서는 능력에 따른 부담이라는 이런 원칙이 없어지고, 부담능력과 상관없이 '일정한' 보험료를 부담하게 되어 공평한 보험료 부담이 불가능하게 된다. 또한 전 사회 구성원이 상부상조하는 사회보험의 '사회적 연대성'의 원칙이 사라지고, 건강은 결국 개인이나 가족이 책임지는 것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게 될 것이다. 이런 인식은 건강보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복지제도에도 파급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이제 걸음마를 내디딘 우리 나라 사회보장제도를 현저히 후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건강보험 재정위기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의료저축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근거는 이 제도가 의료비 지출을 줄일 수 있다는데 있다. 그리고 의료지 지출 감소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의료저축제도에서는 개인이 불필요한 의료이용을 '스스로 줄여서'(즉, 의료수요자의 모랄해저드를 없앰으로써) 의료비를 절감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먼저 우리 나라에서 과연 수요자의 모랄해저드가 존재하는 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소비자에 의해 유발된 불필요한 이용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몸이 아파도 '과도한' 본인부담금과 '불편한' 의료제도 때문에 꼭 필요한 의료서비스도 이용하지 못하는 미충족 수요(unmet need)가 더 큰 문제이다.
더구나 의료저축제도는 의료공급자의 모랄해저드(즉, 공급자에 의한 과잉의료서비스 제공)를 막지 못한다.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싱가포르는 의료기관의 80%가 공공의료기관으로 우리 나라와 비교할 때 공급자의 모랄해저드문제가 상대적으로 적다. 이에 반해 민간기관이 80% 이상이며, 또한 행위별수가제로 인해 공급자 간 경쟁이 치열하여 과도한 의료서비스 제공이 문제가 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소비자의 모랄해저드를 줄이기 위한 의료저축제의 도입은 잘못된 정책 선택이다. 오히려 공급자의 모럴해저드를 줄이기 위한 의료공급제도의 개혁(예를 들어 포괄수가제나 총액예산제 등 진료비지불제도의 개편, 주치의제도 등 일차의료 제도 개혁 등)이 보다 시급하고 필요한 정책이다.
의료저축제도는 의료서비스에 대한 국민의 접근도를 떨어뜨리며 특히 저소득층의 의료 접근도를 선택적으로 억제할 것이다. 이는 조기에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중한 병으로 키울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이 제도가 단기적으로 재정 절감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이것도 의문이지만) 중장기적으로 의료비의 증가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이 제도는 환자가 자신의 증상이 '가벼운' 병인지 아니면 '중한' 병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환자는 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결국 질병의 위중도는 의사가 판단을 해주어야 하는데 의료저축제도는 '가벼운' 증상에 대해 의사의 접근을 막게 되므로 '가벼운' 증상을 가진 '중한' 병의 치료를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의료저축제도의 재정 절감 효과가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의료저축제도를 1984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싱가포르에서도 의료비 증가 억제효과가 확실하지 않으며, 더구나 의료저축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우리 나라 사회보험의 재정위기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의료비 억제효과도 의심스럽고, 단기적인 건강보험 재정 위기 해결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으며, 사회보험제도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제도를 시급히 도입해야 하는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사회보험과 의료저축제도간 양극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만약 사회보험과 의료저축제도 중 한 제도를 선택하게 된다면 건강한 사람은 의료저축제도를 선호할 것이다. 병에 잘 걸리지 않는 젊고, 부유한 사람의 경우 의료저축제도를 선택하는 것이, 자신이 낸 보험료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보다 면세혜택을 받으면서 자신의 개인구좌에 의료비를 적립하는 것이 훨씬 낫게 된다. 건강한 부자가 의료저축제도로 빠져나가면 건강보험은 저소득층만을 위한 의료제도가 될 것이며, 건강보험 재정은 매우 빈약해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사회보험의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의원을 중심으로 한 일차의료가 더욱 위축될 것이다.
우리 나라 의료제도는 대형병원 위주로 이루어져 일차의료의 역할과 기능이 제한되어 있다. 만약 소액진료비만 의료저축제도를 통해서 지불하게 되면 이는 결국 의원을 이용할 때 소요되는 재정을 전액 본인 또는 가족이 부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환자는 의원급 의료기관의 의료이용을 억제하고, 사회보험의 적용을 받아서 상대적으로 진료비가 적게 드는 병원급 의료기관 이용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의료비 절감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뜩이나 취약한 우리 나라 일차의료기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의료저축제도는 가족의 범위를 뛰어 넘는 사회적 연대의 경험이 적은 우리 나라의 정서에 호소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도의 여러 원칙이 사회보험의 원칙에 배치되며, 새로운 제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사회보험을 강화하고 개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에 비해 더 낫다는 근거가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이 제도의 도입이 의료제도 전반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고려할 때 현 시점에서 건강보험 재정 위기 극복과 건강보험 개혁의 대안으로 의료저축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그 근거와 타당성이 취약하다.
건강보험의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수가재조정 등의 단기대안과 함께,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방안과 의료제도의 형평성과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한 중장기 방안으로 진료비지불제도의 개편과 주치의제도 등 1차의료 강화를 통한 의료전달체계의 확립 등이 보다 시급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월간 <복지동향> 2001년 10월호(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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