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1. 복지국가 담론; 배경과 의미
‘복지’가 전 사회적인 화두가 되고 있다. ‘복지’에 대한 높은 관심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어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이래 국가복지를 크게 늘리면서부터 한국 사회에서 ‘복지’는 줄곧 정치와 사회운동의 관심과 토론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현재 나타나는 ‘복지’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복지정책의 수혜대상을 늘리거나 물질적 급부를 일부 늘리는 ‘복지정책의 확대’ 수준을 넘어 공동체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원리와 시스템의 근본적 개혁의 문제를 포함하는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고 있다. 아울러 어떤 프로그램이 중심인가에 따라 복지국가의 성격과 그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질과 유형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어떤 복지국가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양적 확대에 치중했던 과거의 논의와 다른 특징이다.
복지국가가 정치적 화두로 부상하게 된 표면적 계기는 지난 6·2 지방선거의 친환경무상급식 정책의 성공과 그 뒤를 이은 논쟁들, 유력한 미래권력으로 떠오른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의 복지국가 비전 표방, 수권의 경험을 가진 야당인 민주당의 경쟁적인 ‘3+1 무상복지 정책 시리즈’ 발표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시장만능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전 세계적 실패와 파탄으로 삶의 불안과 위기가 더할 나위 없이 증폭되어 있는 경제사회 현실이 그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그로인해 소극적인 차원으로는 위기로부터의 보호막을 필요로 하는 경제사회적 심리가 사회저변에 폭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적극적으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중의 막연하지만 강한 열망이 작동하고 있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강부자-고소영 특권층 중심의 정책에 대한 대중의 광범위한 반대와 저항까지 결부되어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이며,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이 표출되는 것이다. 요컨대 현재 나타나는 ‘복지국가’에 대한 관심과 주목은 단지 정치세력의 정치 전략과 언술을 통해 외화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경제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른 대중의 욕구와 심리, 인식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관심이 선거를 앞두고 나타나는 일회성 여론으로 사그라지지는 않을 것이며,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의 전횡과 범람에 짓눌려왔던 한국 사회 가치지형의 근본적 변화의 계기로 작용할 것이 예상된다.
2. 복지국가 담론; 결함과 한계
복지국가 실현과 관련된 다양한 주장과 논쟁들이 제기되고 있다. 복지국가 담론과 정책논쟁이 확산되는 최근의 흐름의 긍정성을 인정하면서도 몇 가지 문제점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복지국가의 목표가 그간 한국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던 복지정책들의 산술적 집합 즉 ‘복지확대’로 외화 되거나 표현되는 경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민주당이 제시한 3+1 정책의 경우 진일보한 가치와 정책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를 경제사회체제 운영원리의 전환, 즉 패러다임 전환의 의미가 아닌, 물질적 복지를 늘리는 정책의 문제로 치환할 염려가 있다. 복지국가 비전이 시스템 전환 차원으로 추진되는 것이 아닌 정책의 산술적 집합으로 이해될 경우 전략지도와 비전이 없는 단속적인 정책 추진과 그를 둘러싼 논란에 그칠 가능성이 크며, 정책선정과 자원배분의 우선순위 경쟁을 일으켜 사회연대를 증진시키기 보다는 사회연대를 소모시킬 수 있는 위험성도 있다.
둘째, 복지국가 담론은 유행하는 반면,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운동은 왜소하다. 최근 복지국가 담론은 주로 씽크탱크, 전문가 그리고 정치권이 중심이 된 하향식 논의를 통해 전파되었고, 6.2 지방선거 친환경무상급식 정책 논쟁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문제는 복지국가라는 목표가 정작 신자유주의 국가운영 전략의 최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영세자영업자 등 각계각층 대중의 정치적 목표가 되거나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목적의식적인 대중운동으로 진화하지 못한 채 담론과 논쟁의 영역에만 머무르는 교착상태를 보이고 있는 점이다. 그로인해 보편주의 복지국가라는 거시적 담론은 확산되고 있지만, 정작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운동이라고 할 만한 움직임은 일부에 그치고 있다.
셋째, 신자유주의 국가운영전략의 결과로 심각한 생존의 위기에 봉착한 계층과 집단이 존재하지만, 이들의 생존권 해결과제와 복지국가의 전망이 다소는 분리되어 있다. 현재 복지국가의 내용과 콘텐츠는 주로 5대 사회문제라 일컫는 일자리, 보육과 교육, 의료, 주거, 노후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문제해결의 대안과 방식도 주로는 국가의 재정투여를 통한 일자리 보장과 소득보장, 사회서비스 확충으로 제시되고 있다. 물론 5대 사회불안의 문제는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한 사회구성원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삶의 보편적인 문제들이며 보편주의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임에 틀림없다. 그렇다하더라도 당장 폐업과 도산,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중소상공인이나 영세자영자들의 생존권이나 전방위적 FTA로 존립의 근거를 잃어가고 있는 농어민의 생존권의 문제, 무분별한 재개발로 인해 삶과 일의 터전으로부터 밀려나 주거유민이 되버린 재개발 지역 서민들의 문제, 전통적인 생산영역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노동에 종사함으로 인해 통계로도 잡히지 않는 유목적인 노동자들의 생존권의 문제는 복지국가 운동의 중심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넷째, 복지국가 실현 방안을 ‘증세’라는 재정수단의 문제로 성급히 협애화시키는 일부 경향으로 인해 보수진영의 ‘포퓰리즘’, ‘세금폭탄’ 프레임에 휘둘리고 있다. 한국의 경제구조와 노동시장 그리고 사회보장의 현실은 복지지출 증대에 대한 강한 압력을 만들고 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그 돈은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가? 누가 복지지출을 부담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직면한다. 공공서비스의 비용이 공적 재원인 세금으로 충당된다는 점에서 ‘복지는 세금’이라는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또한 보편주의 복지국가가 특정계층의 일방적인 양보나 희생을 요구하는 것도 반대로 특정계층의 이익만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구성원 모두의 부담을 전제로 복지를 확대하자는 접근방식도 원칙적으로 옳다. 그러나 복지의 체감도가 낮고, 조세정의의 실현정도마저 낮은 한국의 실정에서 ‘더 많이 세금을 걷어서 더 많이 복지에 지출하자’는 논리가 국민들의 정치적 동의를 획득하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자칫 서두르다 강한 저항에 부딪혀 복지국가 논의 전체의 진전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재원분담에 관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 정치적 목적에 따라 너무 앞선 ‘증세’ 주장을 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 그리 타당한 접근이 아니다.
3. 복지국가 전략
최근 ‘복지국가 전략’이라는 표현이 많이 회자된다. 복지국가전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합의된 바 없으나, 그 대강을 정리하자면, ‘복지국가’라는 국가비전에 관한 담론, 정책과 프로그램, 주체 등을 하나로 묶은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복지국가전략’은 국가발전, 사회발전의 대안으로서 복지국가라는 가치와 원리를 확립하고 전파하는 전략이며, 누구를 주체로 할 것인가,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인가라는 주체형성 전략이자 계급계층, 세력 간의 동맹전략이다. 아울러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과 프로그램을 무엇으로 할 것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를 엮어 낼 것인가를 설계하는 정책구상이자 정치전략 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복지국가 전략’은 어떤 정태적인 상(象)을 전제로 한 것일 수 없으며, 사회발전의 역사적 과정의 바탕위에 경제사회구조와 사회적 요구라는 변화무쌍한 현실까지 결합시켜 반영해야 하는 복잡하면서도 다이내믹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선행한 복지국가들의 역사적 경험과 그로부터 공유되는 이론적, 정치적, 정책적인 자산을 갖고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구조, 계급계층의 역학이 반영된 고유한 복지국가 전략이 뚜렷하게 확립되어 있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복지국가는 이제 막 담론의 불꽃이 지펴져 정치적, 정책적 실천의 단계로 넘어가는 유년기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복지국가가 보편적 국가발전, 사회발전의 전망으로 부상하고 그를 둘러싼 담론, 정책 논의가 활성화된 것은 하루아침의 결과가 아니며, 이 또한 역사적 산물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긴 사회발전의 과정과 다양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 중에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민주정부의 집권기간은 한국의 복지국가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국가복지를 확대하고 제도적 복지의 기반을 마련한 점에서 복지국가 발전의 중요한 전기를 형성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주정부의 사회개혁조치는 민주화 이후의 새로운 시대정신과 대안 패러다임을 반영하는 일관된 전략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로인해 과거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국가운영 원리를 총체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깊숙이 받아들여 국정운영의 기조로 채택하는 모순을 자초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지만, 민주정부의 개혁이 정치적 민주화와 자유권의 보장을 넘어 사회적 시민권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지금 우리가 대면하는 현실은 사뭇 다를 것이다.
2008년의 금융위기로 확인된 신자유주의 전 세계적 실패와 성장과 경쟁에 사로잡힌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실패가 교차하는 현 시점은 사회발전의 또 다른 분수령임에 분명하다. 이 시점에 복지국가가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등장한 것은 새로운 희망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담론의 확산에 고무되어 확고한 정치적 승리로 나아갈 수 있는 방책을 갖지 못한다면, 지난 민주정부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으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그만큼 한국사회의 특권과 기득권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정치적 보수주의는 두텁고도 공고하다. 지금은 보편주의 복지국가 담론에 불을 지피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복지국가 운동이 정치적 승리로 나아가기 위한 전략과 계획을 세워야 한다.
4. 복지동맹과 연합정치
서구 복지국가 발전이 사민주의 정치운동을 포함한 노동운동의 권력자원을 기본으로 다른 정치세력과의 복잡한 대립, 동맹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던 점을 주목해 볼 때, 복지국가를 둘러싼 정치적 세력관계는 복지국가 전략구조의 핵심적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의 조직된 힘과 수권능력이 있는 사민주의 정당이라는 서구적 조건과 특성을 갖추지 못한 한국 상황에서 복지국가를 실현할 권력자원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는 전략의 핵심적 요소이며, 이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복지국가 실현은 ‘한편의 아름다운 꿈’에 그칠 수도 있다.
현재 제1야당인 민주당이 보편적 복지를 비전으로 내세웠지만, 본질적으로 자유주의 정당이고 복지국가전략을 핵심 정치노선으로 채택하고 있는 사민주의 경향의 진보정당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독자적 집권을 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점에서 복지국가의 정치적 전망을 낙관할 수많은 없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사민주의와 자유주의 세력 간의 연합, 이른바 복지동맹 전략의 불가피성이 제기된다. 또한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도 87년 다양한 계급, 계층이 독재정권 퇴진과 민주화를 내걸고 민주동맹을 이루어 정치적 민주화를 성취했던 것처럼, 복지국가의 실현이라는 공통의 가치와 정치적 목표를 갖는 제 2의 민주동맹으로서의 복지동맹을 이루어 사회적 민주화를 성취할 필요가 있다. MB 정권의 부자 특권층 위주의 권위주의 정치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과 저항의 여론을 2012년 정권교체로 현실화시키기 위해 복지라는 공통분모를 내세운 야권의 연대, 연합을 실현시켜야 할 현실적인 필요도 제기된다. 이 같은 다양한 필요와 논리에 근거를 두고 현재 ‘복지국가 단일정당론‘, 빅텐트 백만민란 등 ’야권대통합론‘, ’진보정당 통합론‘, ’범야권 연합정치와 선거연합‘ 등 다양한 복지동맹 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각각의 통합 및 연합론은 복지국가를 실현하기위한 나름의 전략적 고민과 진정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가타부타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정치세력이 저마다의 정치적 목표와 노선을 분명하게 정립하면서도 최소강령, 최대연합의 원칙에 부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몇 가지 문제를 짚어 볼 수 있다.
우선 민주당은 그간의 중도 개혁적 자유주의 노선으로부터 진보적 자유주의 또는 사회적 자유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을 더 분명하게 확립해야 한다. ‘3+1’과 같은 복지정책을 표방은 분명 긍정적이나 이것만으로 민주당의 정치노선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민주당 집권기간 동안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확대와 그로인한 민생의 구조적 불안이 초래된 점을 인식한다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포기와 보편적 복지정책의 확대, 적극적인 노동 보호와 민생의 보호를 보다 확고하게 표방해야 한다. 재벌 및 대기업 정책, 금융규제 정책,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한 노동보호 정책, 한미 FTA를 포함한 자유무역정책 등 민주당 집권시절 성장과 효율이라는 이름아래 보수적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정책들에 대해 어떤 입장과 태도를 취하는가가 주요한 판단의 근거가 될 것이다. 아울러 현실 정치지형에서 차지하는 제 1야당으로서의 기득권에 대해 보다 열린 자세로 임하는 태도변화도 필요하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은 보편주의 복지국가 실현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비교적 분명히 하고 있다고 평가되나, 수권능력과 정책능력, 대중정당으로 발전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좌파적 이상에 근거한 정책구호가 아닌 실현 가능한 진보의 정책 비전을 체계화하는 노력을 배가함으로써 능력을 입증하고 신뢰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념정당’, ‘운동권 정당’, ‘정파정당’의 한계도 극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인물과 정강정책, 정치언어, 정당운영 등 모든 면에서 과감한 쇄신이 필요하다. 최근 두 진보정당간의 통합이 논의되고 있으나 통합은 혁신을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통합을 넘어 국민 일반이 인정하고 기대를 갖게 만드는 새로운 ‘진보적 대중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한 총체적 혁신을 구상하고 실천해야 한다. 아울러 선명성을 내세우고 지키려는 소수파 의식에서 벗어나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실현을 위해 가치의 연대를 전제로 자유주의 정치세력과의 연대와 연합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난 6.2 지방선거의 선거연합의 성과로 어떤 정치세력도 2012년 총선, 대선에서의 선거연합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선거연합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지방선거에 비해 매우 제한된 의석을 두고 생사를 건 게임을 하게 되는 국회의원 총선의 성격상 권력의 분할과 양보가 어렵다는 것이다. 정치 세력 간 연합이 용이하지 않은 것은 소선거구제-단순다수대표제인 선거제도의 문제로부터 나오는 면이 크지만, 한나라당이 지배하는 국회에서 선거법이 바뀔 가능성도 현재로서는 희박하다. 현실에 분명 그런 문제가 있지만, 최소강령, 최대연합의 정신과 호혜성의 원칙에 입각해 연합의 현실적 방안을 찾기 위한 모색과 노력 그리고 사례의 축적은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계속되어야 한다.
5. 복지국가전략 사회연대운동 제안
복지동맹과 사회연대운동
지금까지 논의되는 복지국가 실현의 경로와 전략은 대체로 ‘선거’와 ‘조세’를 통한 이행전략이라 볼 수 있는데, 다소간의 도식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복지국가를 비전으로 내세운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운동을 하고, 이 세력이 집권하면 증세를 통한 재정확충으로 복지국가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략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며, 간명한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기득권이 강고한 한국 사회에서 복지국가를 내세운 정치세력이 집권한다하더라도 극심한 저항에 직면해 사회적 갈등과 계급대립만을 보이고 전혀 역사적 진전을 이뤄내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서 관건은 복지국가 동맹이라는 정치적 기획을 추동하고 뒷받침하는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야 복지국가 전략의 실현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정당이 갖는 영향력이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 복지동맹이 정치세력간의 연합과 재편의 문제로만 국한된다면 힘을 가질 수 없다. 때문에 다소 복잡하더라도 대중운동을 통해 복지국가 전략을 사민주의와 자유주의 연합 세력이 추진하도록 강력히 추동할 때 복지국가 전략의 정치적 실현가능성이 담보될 것이다. 또한 복지국가 논의가 첨예한 계급, 계층 간 대립과 갈등만 초래하다 좌초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동력을 갖고 추진되기 위해서는 대중운동의 주체가 공고하게 형성되어 반대 세력들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위해 정부가 적극적인 일자리 정책, 의료, 주거, 보육, 교육, 노후보장 등의 사회보장을 확대함으로써 사회임금 확대를 통한 가처분소득 증가를 지원하는 정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요컨대 복지국가 이행전략의 측면에서 정당의 역할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대중운동의 조직적인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다. 대중이 생활로부터 자신의 요구와 복지국가의 전망을 일치시킴으로써 변화의 주체적이며 실질적인 동력을 만들어 내는 복지국가 사회연대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때 복지동맹이 보다 확고해질 것이며, 복지국가의 실현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이에 참여연대는 민주노총, 한국노총을 포함한 노동조합과 각계각층의 대중조직, 시민사회단체, 지역단체, 풀뿌리단체에 복지국가 사회연대운동 추진에 관한 논의에 착수할 것을 제안한다.
복지국가 사회연대운동의 주체와 성격
서구의 경험과 달리 조직노동의 힘과 정치적 영향력이 취약한 반면 다양한 부문의 시민운동, 풀뿌리운동, 당사자운동이 활성화 되어 있고,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한국 상황에서 시민사회의 복지국가 전략의 중심은 다양한 계급, 계층, 부문, 지역 대중운동의 연대에 두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그럴 때도 조직노동의 이해관계와 역할을 높이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를 간과할시 자칫 ‘노동 없는 복지’,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는 전략상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사회연대운동을 주체와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노동과 시민의 연대
우선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사회연대운동의 중심축으로 한국판 ‘적-녹 동맹’인 ‘노동-시민 연대’를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 90년대 중반 민주노총의 사회개혁투쟁 선언이후 그와 같은 구상이 제기되고 부분적으로 시도된 바도 있으나, 공통의 정치적 목표와 의제를 설정하지 못한 채 사안별 연대에 그쳤다. 그러나 보편주의 복지국가라는 진보운동의 정치적 목표가 분명해지고 있고 전략적 주체형성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시점에서 노동-시민의 연대를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② 풀뿌리 시민의 연대
복지국가 실현을 위해 조직된 세력의 힘과 역할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나 그것만으로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 조직되어 있지는 않지만, 지난 촛불운동의 거대한 분출에서 목격했듯이 사회저변에 흐르고 있는 한 에너지로 존재하고 있는 사회변화를 향한 시민들의 자발적, 주체적 열정과 에너지를 모을 수 있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후퇴와 부자 특권층 정책에 분노하고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을 복지국가 실현이라는 정치적 목표로 최대한 모아내고 행동하게 만듦으로서 복지국가 사회연대운동이 단지 조직된 운동주체들의 제한적인 시도로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③ 생존권의 연대
노동-시민의 연대가 세력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복지국가 사회연대운동의 중심 성격은 생존권의 연대이다. 국가운영 원리와 사회경제 체제 전환의 의미로써 복지국가는 정치사회 담론으로서가 아니라 각계각층의 대중이 복지국가를 정치적 목표로 하는 실질적인 운동에 나설 때 실현가능하며, 그 출발점은 신자유주의 국가운영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주변화 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중소자영자 등의 생존권을 중심에 놓는 것이며, 생존권의 연대를 실현하는 것이다.
④ 보편주의 연대
복지국가 운동의 승리를 위해서는 저소득층은 물론 중산층까지를 복지국가라는 목표아래 하나로 묶는 사회연대가 폭넓게 형성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복지국가 사회연대운동은 사회적 약자나 저소득층 등 특정계층의 물질적 복지를 늘리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보장의 원리와 체계를 사회적 시민권에 기반을 두는 보편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보편주의 연대를 지향한다.
복지국가 사회연대운동의 주요의제
우리가 지향하는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상을 추상적으로라도 그려본다면,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대한민국 헌법이 명시한대로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한다. 이를 위해 국가의 사회보장체계는 보편주의 원리에 따라 설계되고 작동한다. 복지는 더 좋은 경제의 동반자가 되며, 기업의 생산과 노동자의 인간다운 생활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게 된다. 성장 없는 분배도, 분배 없는 성장도 용납되지 않는다. 좋은 일자리를 민간에서 뿐만 아니라 공공의 영역에서 창출하며 근로빈곤은 원천적으로 성립하지 않게 된다. 남녀 모두 돌봄 노동의 수행자로서의 역할을 공유하면서 돌봄 노동의 사회화를 통해 일-가정의 양립과 성평등 사회를 실현한다. 빈부의 차가 극심하게 드러나지도 않고 사회연대와 공동체적 양식이 시민정신으로 구현되어 지역사회에서부터 든든한 사회적 경제의 기초가 마련되게 된다.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존엄이 지켜지면서도 사회정의와 연대가 튼튼해지고 민주주의는 더욱 확대된다.
이 같은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지향할 때, 한국사회의 현 조건에서 복지국가 운동은 다음과 같은 방향의 의제를 지속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있다.
① 공정한 경제
경제구조와 노동시장의 양극화는 복지국가로 이행하는데 큰 걸림돌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구조적인 불균형과 양극화를 초래하는 핵심적인 문제는 ‘자원과 부(富) 편중과 대물림’으로 집약되는 ‘불공정성’에 있다.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공정한 경제’라는 조건위에서 작동가능하며, 국가는 이를 위한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대중소기업, 원하청간의 대표적인 불균형과 불공정은 제도적으로 시정되어야 하며, 이를 위한 규제는 필요악이 아닌 필요선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② 좋은 일자리
좋은 일자리는 최고의 복지이다. 노동시장 참여자의 절반이상이 비정규직이며, 경제활동인구의 30%가 자영업에 종사하고 그들 중 대다수가 영세자영업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2차적 재분배만으로 복지국가를 실현하겠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 1차 분배 영역의 불균형과 양극화 해소를 위해 ‘좋은 일자리’는 필수적이며, 복지국가의 핵심과제이다. 이를 위해 고용여력을 갖고 있는 공공부문과 대기업이 먼저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도록 하고, 고용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중소기업의 좋은 일자리를 위한 정부의 지원책이 마련되어야한다. 실직이 곧 빈곤으로 직행하지 않도록 고용안전망을 강화하고,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발동해야한다.
③ 노동에 대한 보호
우리 헌법은 노동 3권을 보장하고 있고, 노동조합의 헌법적 시민권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제도와 정책, 관행에 있어서는 노동에 대한 보호가 매우 취약하다. 복지국가 실현을 위해서는 노동에 대한 보호를 한층 강화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전략인 노동시장 유연화는 중단되어야 하며, 노동자들의 노동 3권은 공무원, 교사를 포함해 온전히 보장되어야 한다. OECD 최장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여기서 생긴 여력을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데 적극 활용해야 한다. 최저임금을 현실화함으로써 근로빈곤을 방지하고, 갈수록 커져가는 노동시장의 임금격차를 줄여야 한다.
④ 보편적 사회보장
사회보장은 개인이 경제활동과 노동시장에서의 자조능력만으로 한 사회에서 평균적인 삶의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국가가 정책을 통해 보장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사회보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수단에서 출발함으로 인해 지금까지 그 전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보편주의 복지국가 실현을 위해서는 복지가 경제적 약자를 지원하는 수단이 아닌 모든 시민이 적절한 수준의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시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 누구나 평균적인 삶의 수준은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가 사회임금을 적극 발동하고, 사회보장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 특히 보육, 교육, 주거, 의료, 노후의 불안이 심각하게 드리워져 있는 만큼 이를 해소하는 보편적 사회서비스 확대가 시급하다.
⑤ 공정한 재원부담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곧 그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누가 부담하는가의 문제이다. 가장 바람직한 원칙은 재원분담 또한 보편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지국가의 전통이 약하고, 오랜 기간 경제정의와 조세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한국의 상황에서 보편복지를 위한 보편적인 재원의 분담은 상대적 박탈감과 저항을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공정과세의 원칙에 입각해 재벌, 대기업 등에 대한 조세특혜를 없애고, 담세능력이 큰 계층이 보다 많은 부담을 지는 재원의 대안을 마련하고, 복지에 대한 체감을 높여가며 보편적인 재원분담의 방향으로 체계를 개편해 나가야 한다.
복지국가 사회연대운동의 정치기획
현대 민주주의와 정치의 운영은 국회의원총선, 대통령선거와 같은 대규모 선거를 통한 권력의 재생산과 교체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그런 점에서 대규모 선거가 몰려 있는 2012년은 복지국가 전략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정치적 분기점이며, 정치권을 포함해 전사회적으로 복지국가 담론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은 선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한국의 민주주의가 ‘경제성장’ 일변도의 목표나 가치를 중심으로 작동해 온 점에 비할 때, 2012년 권력재편 국면을 앞두고 복지국가 담론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한 전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정치적 결실을 거두지 못한다면, 이명박 정부를 통해 경험했듯, 또 다른 사회발전의 답보와 퇴행을 겪을 수도 있다.
때문에 복지국가 사회연대운동은 의제, 정책을 요구하는 소극적 수준의 운동에 그쳐서는 안 되며, 2012년 선거에 뛰어들어 정치적 승리를 만들어 내는데 적극 나서야 한다. 복지국가 정치동맹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각 정치세력이 공통의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고 표방하도록 추동해야 한다. 아울러 각 정당의 연대와 연합을 추동해야하며, 때로는 힘을 행사해 개입할 필요도 있다. 궁극적으로는 운동의 참여세력, 지지 세력을 표로 결집시켜 ‘비전을 향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대중운동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형성된 복지국가 사회연대운동을 일정 시점에 유권자운동의 내용과 방식으로 전환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총선과 대선에 대비해야 한다. 이는 또한 한국 사회에서 가치를 중심에 세운 ‘실체가 있는 시민정치운동’의 새로운 실험이 될 것이다.
월간 <복지동향> 2011년 4월호(제1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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