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여성들이 이룬 기적
‘2011 여성회의’
‘2011 여성회의’가 지난 4월 28∼30일 강원도 강릉시 한국여성수련원에서 ‘여성운동, 새로운 전환의 모색’을 주제로 열렸다. 여성회의는 한국여성재단(이사장 조형) 주최, 한국젠더네트워크 주관으로, 생명보험 사회공헌위원회와 교보생명의 후원으로 이뤄졌다. 이번 회의는 유엔 여성대회를 앞두고 열렸던 1975년, 1995년의 여성회의 이후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으로, 목표 인원 150명보다 36명 많은 186명의 여성활동가와 여성학자들이 참석했다.
이번 회의의 일차 목적은 법제도의 양성평등화와 여성들의 정치참여 증대를 견인했고 여성들의 소외와 차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온 중견 여성단체들의 성과를 기반으로, 향후 10년의 여성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소통의 장을 여는 것이었다. 그 배경에는 지난 4월 28일 개최된 개회식에서 조형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이 지적한 대로, 여성인권과 성평등의 제도화 이후 “운동의제가 정부의 정책의제로 바뀌었고, 여성단체들이 정부에 재정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 과거의 열기를 찾아보기 힘들고, 조직이 나이 들어가면서 젊은 후배와 예비 여성활동가들이 매력도 느끼지 못해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있다”는 현실이 있었다.
회의를 주관한 한국젠더네트워크에겐 기존 중견여성단체들과 그에 속하고 싶어 하지 않는 2030세대의 네트워크 운동그룹들,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82쿡’과 같은 소규모 이슈집단들, 지방 풀뿌리 여성조직들, 소수자인권운동그룹들을 연계하여 새로운 소통의 장을 만들려는 미션이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시야 제로의 현실에서, 회의 미션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재원과 인력부족으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중견조직의 리더들과 오리무중 속에서 이리저리 만난 다양한 군소집단의 여성활동가들의 반응은 거의 냉담하여, 여성회의 개최를 연기하거나 포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이러한 염려는 참가신청자들이 늘어나고 급기야 예정일보다 앞서 신청을 마감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기우임이 드러났다.
참석자들에게 회의를 마련한 취지와 기대, 그리고 향후 여성운동의 화두를 던지는 개회식으로 문을 열었다. 주최 측인 한국여성재단의 조형 이사장은 “이번 회의는 향후 여성운동의 방향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자리로서 마련됐으며, 이번 회의를 통해 단체들 간 이익과 정파를 넘어서서 여성활동가들 간의 소통이 가능한가?, 나아가서 여성운동 내부의 다양한 차이들을 확인하고, 페미니즘의 큰 틀 속에서 지속적으로 소통할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여성운동의 방향과 운동방식에 대해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진 박영숙 미래포럼 이사장의 축사는 여성운동의 전환방향을 제시한 획기적인 제안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롱테일 법칙(인터넷이 가져다준 유통혁명으로 인해 80%의 사소한 다수가 20%의 핵심적 소수보다 뛰어난 가치를 창출한다는 경제이론)’에 빗대어 “이 시대는 10대 촛불소녀, 유모차 부대 등 세상의 80%인 평범한 여성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며, “활동가가 아닌 평범한 이들과 소통하고 임파워하는 것이 바로 앞으로의 여성운동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번 회의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이들이 한데 모여 서로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고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기회”임을 강조한 장필화 이화리더십개발원 원장의 축사 또한 이번 회의의 의미를 음미하는 데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첫 프로그램으로는 참가자들이 처음 혹은 오랜만에 만난다는 점을 감안하여, 서로의 몸과 마음을 열고 함께 만나기 위한 그룹다이내믹스가 진행됐다. 집단적 문제해결이나 결정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집단 내부의 개인들을 이해하고 행동을 수정하는 과정을 칭하는 이 프로그램은 많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에 친밀감을 높일 수 있는 흥미롭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후에 이어진 비전토크는 20대부터 70대까지 세대별ㆍ영역별로 여덟 명의 ‘현역’ 여성활동가들이 나와 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부터 과정까지의 보람과 어려움 그리고 여성운동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도전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청중과 소통하는 시간이었다.
참가자들은 발표자들의 다양한 정체성과 고민, 비전들을 드러내는 지난 40년간의 여성운동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각자가 서로에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 빠진 이야기들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둘째 날 오전의 ‘2011년, 여성운동의 안부를 묻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한 가운데 서 있게 된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분석하고, 현재 주류 여성운동 현장의 고민들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신자유주의 경제 하의 생활정치와 여성운동’을 주제로 발표한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여성주의 정치는 신자유주의적 정치ㆍ경제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로, 북경대회 이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간 국가페미니즘의 한계와 시장페미니즘의 확장이 충분히 급진적인가를 반문했다.
그녀는 신자유주의 구도 하에서 진행된 노동유연화와 여성 삶의 질 하락, 국가의 사회서비스 포기와 돌봄노동의 위기, 돌봄의 상품화와 여성들의 저임금 문제 등을 언급하며, 싱글마더ㆍ비혼 여성ㆍ게이ㆍ레즈비언들을 정상가족과 대비시켜 ‘복지도둑’, ‘도덕적 타락집단’으로 만들고, 기독교주의와 연합하여 낙태반대운동을 전개하는 반페미니즘 담론 등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는 젠더구조를 제시했다. 그리고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여성이슈를 ‘연성화ㆍ사소화ㆍ개별화’시키는 시장페미니즘 담론과 여성정책의 전개과정에 개입하여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방식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어 패널토론 방식으로 진행된 “전환을 위한 실험, 위기 혹은 기회”는 지속가능한 여성운동을 위한 실험과 기회에 대해서 발제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오후 세션은 ‘여성운동 리‐디자인: 이슈부터 운동방식까지’라는 주제로 노동, 평화, 환경, 정치, 여성폭력, 섹슈얼리티 분과로 나눠 워킹그룹별 논의가 진행됐고 전체가 모여 그룹별 토의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였다.
특히, 둘째 날 밤에는 히옥스의 준비로 구성된 문화 팀이 밤 시간을 이끌었다. 가수 지현의 사회와 노래, 목소의 랩, 레드걸의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코너는 힘이 넘치면서 감동을 주는 진행과 스토리를 담은 노래, 랩, 퍼포먼스를 통해 젊은 문화활동가들의 에너지를 모두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지막 날, 참가자들은 평가회의에서 회의 전 과정을 통 틀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냈다.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면서도 때로는 신랄하게 반쪽의 성공에 그친 여성회의에 대한 평가와 향후 여성회의가 담아야 할 내용에 대해서 다양한 요구들을 제시했다. “운동 10년 했더니 몸 버리고, 마음도 버리고, 주머니엔 돈도 없고, 애들은 공부 못하게” 되어 버린 현실에서, 지속가능한 여성운동을 위해 여성회의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기대와 애정 어린 비판의 토론장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참가자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이번 회의는 여성운동의 전환을 요구하는 현실을 공동으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의 기회와 새로운 방향을 다각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공동의 합의나 행동계획을 도출할 수 있을 만큼 준비된 회의가 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못내 아쉬움이 남는 회의였다. 그러나 모든 시민단체들이 침체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해 대규모의 여성들이 함께 하며 힘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매일 자고 일어나면 평가가 달라지는 쉽지 않은 경험’을 선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회의는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참가자들의 사후 평가를 소개했다. 참가자들이 이번 회의가 성공이었다고 보는 측면은 참가자들 모두가 여성운동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수많은 여성주의자들을 만났으며, 여성운동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다음으로 미래의 여성운동은 80%의 평범한 다수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향이 설정돼야 하며, 이에 따라 여성운동의 거점을 이동해야 할 필요성에 확신을 가지게된 점도 중요하다. 그리고 비록 참가자들 모두가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을 공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줬으며, 모두가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만들기 위해 보다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재밌으면서도, 첨예한 갈등을 드러낸 진지한 소통을 통해 여성운동을 진전시킬 수 있는 여성회의의 필요성에 공감하게 됐다는 것이다.
3세대 여성들의 수다에 ‘페차쿠차’방식으로 맛을 낸 비전토크
4월 28일에 진행된 비전토크는 너무나 할 말이 많은 여성운동가들의 오랜 운동경험 이야기가 자칫 지루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발표자가 준비한 약 20장의 슬라이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페차쿠차’(일본어로 재잘댄다는 의미)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현숙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고문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여성운동은 “거버넌스(governance) 체제의 파트너로서 정책 결정에 참여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여성 NGO 학교를 제안했다.
최순영 부천여성노동자회 이사는 “어려웠지만 운동하기는 지금보다 쉬웠고 성취감도 컸던” 과거의 여성운동과 “문제는 많지만, 운동을 조직하기 어려운 오늘 의 현실”을 대조시키며 후배 여성활동가들의 어려운 운동 상황에 대해 깊은 동정과 공감을 표시해주었다.
이혜경 여성문화예술기획 이사장은 “우리 운동은 가장 주변으로 가야 하며, 또 널리 퍼져야 한다”며, “좋은 에너지로 우리 스스로를 타자에게 개방하자”고 말하고 이를 위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윤리성을 회복해야 함을 강조했다.
남윤인순 전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여성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이슈 발굴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기존 여성운동은 인권, 정치, 노동, 복지, 평화 등에 강점을 뒀는데 여기에 교육, 청년문화, 이주여성, 한부모 등과 연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 전 대표는 “연대하면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점과 “여성들이 정치에 적극 참여해 입법을 통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정갑희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70년대 여성노동의 문제들이 최근 비정규직 문제로 바뀌면서 나타나고 있는 이슈들은 여성운동의 확장을 요구하고 있다”며, 연구자들은 ‘섹슈얼리티와 감성, 경제의 연관성’을 이론적으로 구명하는 한편 “학교 바깥에서 활동가들과 어떻게 유기적인 연관을 맺을 수 있을지”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신현경 문화기획집단 ‘영희야 놀자’ 멤버는 90년대의 대학 내 여학생회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겪는 일상에 집중하여 전개했던 성정치 문화제, 여학생 잡지 발간, 졸업 이후 언니네네트워크 운동, 최근 영화만들기 사업들을 소개하며, ‘친구와 함께 하는 여성운동’을 꿈꾸며 함께 하는 부엌과 작업실’ 속에서 우리들이 보기를 원하는 바를 스스로 실천해가는 여성운동을 제시했다.
20대 초반의 대학생 잇지는 비싼 등록금 대출로 인해 졸업하자마자 수천만 원의 빚을 안고 살아야 하는 친구들, 학점과 취업 걱정으로 여성운동의 외침에 귀기울이지 않는 학우들을 탓할 수 없는 현실에서, 때로는 “과연 페미니스트로서 살 수 있을지?” 때로는 “어떤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할지?” 고민하는 자신을 드러내어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자아냈다.
조한혜정 교수는 젊은 세대를 향하여 “‘자기만의 방’을 넘어 서서 ‘우리들의 부엌ㆍ마을’을 찾는 친구들이 생겨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80%의 여성들이 관심을 갖는 문제를 놓치게 되면 그들이 우리에게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 여성운동은 주부들이 ‘자기만의 방’에서 나와 새로운 공공영역을 만들 수 있도록 연대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필자는 젠더네트워크의 운영위원으로서, 이번 회의의 기획과 조직을 총괄했으며 전체 사회를 진행했다.
월간 <복지동향> 2011년 05월호(제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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