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1 2011-05-27   1849

[동향2] 복지국가, 문제는 정치다

김기식│시민정치행동‘내가 꿈꾸는 나라’공동준비위원장

2010년 지방선거를 전후해 오늘날 한국 정치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화두는 ‘연합정치’와 더불어 ‘복지국가’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듯싶다. 심지어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까지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였다”며 한 발을 걸치고 나선 것은 비록 그것이 정치적 물타기를 위한 것이든, 아니든, 보수진영 조차 복지국가를 시대적 흐름으로 인정한 셈이란 점에서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보수진영도 그들이 의지해온 성장담론, 선진화담론이 갖는 정치 담론으로서 현재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복지국가는 국가 비전의 문제다. 그런데 대중적이기 어려운 국가 비전의 문제가 지금처럼 강력하고 대중적인 정치 화두로 작동하는 것은 개별정책을 넘어서 국가 비전에 대한 대중적 갈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는 산업화, 민주화 이후 국가 공동체 다수가 공유하는 가치와 비전을 상실한 지 오래다. 자신과 가족, 공동체에 대한 긍정적 희망을 갖지 못한 조건에서 공포와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중산층은 공포와 욕망이 혼재된 채 아노미적 현상, 자기분열적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웬만한 중산층, 고소득층조차 자식(교육), 일자리, 노후생활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렇게 공동체가 붕괴하고, 공포와 불안, 개인적 생존 논리와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계급, 계층적 갈등은 물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전방위적인 갈등이 사회적으로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모두가 피곤하고 불행해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산업화 이후 20년간의 비교적 성공적인 민주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이른바 민주정권 10년 동안 비정규직은 양산되고 양극화가 심화되는 등 서민의 삶은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됐다. IMF 경제위기 상황과 정치구조의 한계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민주정권은 국민들이 어려운 삶 속에서도 최소한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국민 대중은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느냐”며 과거의 성장신화에 기대어 이명박 보수 정권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헛된 것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속도의 성장률 회복, 일부 수출 대기업의 기록적인 순이익 증가는 서민들의 개선되지 않는 생활조건과 대비돼 역설적으로 국민들이 과거와 같이 성장 결과가 작게나마 서민에게도 시장을 통해 분배되는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성장신화가 깨진 것이다. 이제 국민들은 시장주의, 성장주의와는 다른, 국가의 적극적인 분배기능 제고를 요구하고 있다.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지지는 세계화, 양극화, 저출산 고령화의 조건에서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과 비전을 기대하는 국민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민주주의, 민생, 남북관계의 위기라는 이른바 3대 위기의 심화는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확산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평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국민이 지난 2007년 대선과 다른 방향을 선택하기란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복지국가론은 민주 진보진영이 이제 비로소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적극적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다행이다.

그러나 최근 벌어지는 복지국가 논쟁을 보며 아쉬움과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복지국가 실현은 정책을 넘어서 한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 문제다. GDP,성장률, 1인당 국민소득과 같은 외형적 총량지표가 아니라 국민 각자의 ‘행복추구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보다 중시하는 가치 지향의 전환 없이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정치적 정책쟁점이 됐던 무상급식, 4대강에 대한 국민의 태도는 별개 사안처럼 보이지만 제한된 국가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가치를 반영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복지국가는 정책논쟁보다는 가치논쟁을 통해 국민적 동의 기반을 형성하고, 공고화 될 수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복지국가는 단지 좋은 정책을 종합하거나 조합한다고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에스핑‐안데르센의 연구를 인용하여 복지국가를 사회민주주의 유형, 보수주의 혹은 조합주의 유형, 자유주의 유형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각 유형별 제도와 정책에 대한 비교분석에 기초해 정치적ㆍ이념적 성향에 따라 정책 방향을 논의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각 유형의 대표적인 국가들이 왜 그러한 유형의 복지국가가 됐는지, 그 배경과 요인을 이해하는 일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복지국가 유형에 영향을 미친 요인은 다양하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시대 도입된 근대 복지제도의 효시가 계급 갈등 상황에서 만들어진 정치적 산물이었듯이 복지국가 자체도 정치적 산물이며, 그 사회의 정치사회적 역관계에 따라 복지국가 유형이 결정됐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복지국가는 정책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치 수준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국에서 어떤 유형의 복지국가가 실현되느냐도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정치사회적 세력이 얼마나 강력하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폭 넓은 공감대를 얻고 있는 보편적 복지국가를 실현할 중심적 정치 주체가 미약하거나 부재한 상황이고 사회 세력도 마찬가지다. 서구와 같은 강력한 사민주의 정당도 부재하고, 노동조합의 힘도 미약하다. 복지국가를 진정으로 고민하는 세력에게 지금 요구되는 중심적 과제는 복지국가를 실현할 수 있는 다수화된 중심 주체를 형성하는 일이다. 중도자유주의 정당이 중심이 되고, 소수 진보정당이 연합해서 보편적 복지국가를 실현할 수 있다는 발상은 역사적 경험상 현실성이 없다. 현재의 정당 질서를 재편하여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세력이 정치적 동맹(복지국가 정치동맹)으로 다수화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실현할 수 있는 주체 형성은 정당 질서의 재편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난 2008년 촛불집회에서 확인했듯이 한국 사회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력하고 역동적인 대중적 정치동력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러한 동력이 정당 질서로 담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정치적 변화를 열망하고, 이를 위해 스스로 행동하는 시민조차 정당 당원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서구와 같은 계급적 대중정당모델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정당이 아닌 시민정치운동으로 이뤄졌다. 4.19, 5.18, 6.10이 그러했고, 정당 내부의 역동적인 변화 역시 2002년 노무현 신화에서 확인되듯이 노사모와 같은 비정당적 시민정치운동으로 가능했다. 정당 질서의 혁신과 시민정치의 활성화는 상호작용하며 한국 정치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동력이다. 정치 변화는 토대의 변화없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각 정당의 하부 토대인 당원구조는 고착화됐고, 확장성이 없다. 이런 점에서 정당으로 수렴되지 않는 대중적 정치동력을 세력화하는 비정당적 시민정치운동은 정치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최근 다양한 형태의 시민정치운동이 활성화되고 있다. 많은 경우는 정당 간 선거연합이나 정당 질서의 재편, 여러 형태의 정당 통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런 운동은 각각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며, 시민정치운동의 한 영역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시민정치운동이 전적으로 정당 혹은 정당 통합과정으로 수렴될 수 없으며, 돼서도 안 된다는 점도 분명하다. 정당 질서를 재편하는 것과 동시에 비정당적 시민정치 영역을 강화하는 것을 추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시민정치행동 ‘내가 꿈꾸는 나라’는 진보개혁진영의 혁신과 연대, 통합을 위해, 또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대안적 정치주체 형성을 위해 능동적 역할을 모색함과 동시에 시민이 정치 주체가 되는 일상적 시민정치의 활성화를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일상 공간에서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모아가는 ‘생활정치’, 이슈에 대한 관심과 의견을 공유하고 이에 기반을 두어 대중정치캠페인을 전개하는 다양한 온‐오프라인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공동체 정치’,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과 폭넓게 소통하는 ‘공론 정치’를 통해 정치적ㆍ사회적 흐름을 형성할 것이다. 또한 가상 국가로서 ‘내가 꿈꾸는 나라’의 ‘시민정부’와, 다양한 커뮤니티의 대표자인 ‘시민의원’들로 구성된 ‘시민의회’를 구성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이런 정부, 이런 의회, 이런 나라라면 정말 좋겠다는 행복한 상상을 함께 나누고, 그 희망과 긍정적 힘으로 정치와 나라를 바꾸어내는 정치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확인된 시민의 개별성ㆍ주체성에 주목하여 시민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각자가 ‘나’를 주어이자 주체로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역사적 국면에서 응축되어 표출된 시민 정치가 일상화될 때만 한국 정치와 복지국가의 미래가 열린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내가 꿈꾸는 나라 www.mycountry21.net).

월간 <복지동향> 2011년 05월호(제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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