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호] 주제기획_‘해방 60’년에 대한 하나의 해석:최장집 민주주의자의 퍼스펙티브에서

1. 문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1) ‘해방 60년’을 말한다는 것은 2차대전 종전과 더불어 시작된 냉전의 결과로 분단된 지난 60년의 역사와, 우리가 ‘한국’이라고 부르는 남한의 국가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자족적인 국가이자 주권국가로서 성장한 한국현대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오늘의 시점에서 전망해볼 만하고, 또 그래야만 할 만큼 짧지 않은 긴 시간이 흘렀음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오늘의 시점에서 정부는 정부대로, 학계는 학계대로, 시민운동은 시민운동대로, 언론이나 출판은 또 그것대로 해방 60년을 중요하게 여기고 논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그런데 정부가 주도하는 다양한 기념행사들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해방 60년을 앞세우고, 언론과 방송매체를 비롯하여 다채로운 이벤트성 행사도 많고, 적잖은 예산이 고구려사 연구나 식민지시대 연구에 주어지고, 과거사청산문제가 주요 정부정책으로 추진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현대사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과 제대로 대면하는 성찰적 이해나 관심, 연구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해체 또는 소멸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민주화로의 전환의 과정에서 운동의 역사적 기초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한국현대사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냉전반공주의와 보수적 산업화를 주도했던 권위주의가 해체된 민주화 이후의 시기에 왜 소멸되고 있는가? 이는 한국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특성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한다.

2) 최근 진행되고 있는 해방 60년을 주제로 한 행사나 논의들을 보면서, 대부분의 경우 ‘성찰 없는 현대사 이해’를 특징으로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아 오늘의 한국사회, 한국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한 회피 내지 문제의식의 결핍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최근년에 이르러 고구려사나 한일관계사와 같이 고대사나 조선후기에서 식민지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관한 것으로 대체된 것처럼 보인다. 대학의 역사학과에서조차 해방 이후의 한국사, 다시 말해 해방 60년사에 대한 교육이나 강의 자체가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 베네데토 크로체는 “연대기적 역사는 죽은 역사”이고 “역사는 당대의 역사” (contemporary history)라고 말했다. 독일관념론의 영향을 받은 그는 철학, 예술, 문화와 역사를 동일시하고, 현재를 한 사회의 문화발전의 가장 성숙한 단계로 상정하면서 그것의 실현 또는 표현을 역사라고 이해했다. 필자는 문화적 정신생활과 역사의 통일성, 그것의 발전적 과정으로서 역사를 생각하는 그의 관념철학적 역사관을 수용하지는 않지만,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는 준거가 아니라 현재가 역사를 말하는 준거라는 점에서 그 말은 현재에도 큰 의미를 갖는다. 한국에서는 적어도 대학의 역사교육을 중심으로 볼 때 고대사나 근대사는 존재할는지 모르지만 현대사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크로체의 정의로 본다면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3) 10년 전 종전 50주년을 맞은 1995년 일본에서는 그 의미를 둘러싼 한 집중적인 토론이 있었다. 이와나미서점이 출간하는 월간지 <세카이>(世界)는 한일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패전 50년과 해방 50년: 화해와 미래를 위하여”라는 주제의 특집호를 낸 바 있다. 두 나라가 종전에 대해 상극하는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것, 즉 일본은 종전을 패전으로 인식하고 한국은 종전을 해방으로 인식한다는 것으로부터 양국의 역사인식의 문제를 접근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이 종전 50년의 의미를 얼마나 잘 축약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일본의 종전을 패전으로, 한국에 있어서 종전을 해방으로 정의한 것으로부터 이미 논의의 방향과 범위, 이를 둘러싼 이성적 사고과정과 그 결과는 규정되었다. 이 정의는 한일관계의 특징적 단면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좋은 정의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이상의 것을 설명하는 데는 커다란 한계를 갖는다. 종전을 패전 50년으로 정의하는 것의 핵심은 체제의 연속성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그 정의는 전후 일본의 정치 및 사회 체제가 전전체제와 상당한 연속성을 갖는다는 사실과 더불어 전후 보수적인 정치 및 사회 체제가 구축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한국의 ‘해방 50년’은 전전과의 단절, 비연속성을 핵심으로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경우 그것은 해방 이후의 사태에 대해 무엇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분단과 남북한 대결구조는 통일된 민족국가건설의 실패 내지는 좌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통일된 민족국가의 복원에서 해방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일부는 일제식민지하의 독립운동세력들 사이에서의 어떤 컨센서스가 있었던 것으로 상정하는 이른바 ‘건국정신’이나 ‘건국이념’을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분단을 해방 이후 한국역사의 가장 중요한 일탈로 해석하면서 한국현대사를 ‘분단시대’로 정의하곤 한다. 건국이념을 강조하는 것이나 분단시대로 정의하는 것이 다른 점이 있다면, 건국이념을 통하여 문제를 보는 경우 통일된 국가의 정당성을 이론의 여지 없이 남한, 즉 한국을 중심으로 접근하지만, 분단시대라고 규정하는 경우 통일된 국가가 어떤 성격의 국가인가에 대해 분명히 규정하지 않는다는 정도일 뿐, 양자 모두 통일에 궁극적인 가치를 두며 통일된 국가를 완성된 민족국가로 상정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 점에서 양자 모두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반영한다 할 수 있다. 이들 민족주의적 역사관은 한국역사를 관통하여 면면히 흐르는 어떤 민족적 과제로부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규정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흐름이 단절된 것에서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부정적 문제의 근원을 찾고 역사의 복원을 강조하면서 이를 가로막는 일탈의 역사에 대한 청산을 개혁의 중심과제로 삼는다. 오늘날 과거사 청산문제가 민주정부의 최대 개혁사안으로 부각된 데는 이러한 역사관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를 민족주의적 이념과 규범, 그 가치의 연속성으로 이해할 때, 좌우 이데올로기적 투쟁과 양극화에서 전쟁으로 이어진 엄청난 폭력의 사태를 동반한 분단국가의 건설,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권위주의적 산업화의 경험과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 그 이후 남북한간 사회구조와 발전정도의 극심한 비대칭적 차이 등이 가져온 여러 문제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위기와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즉 분단 이전의 역사로의 복원을 강조하는 동안 분단의 과정과 분단된 조건하에서 이루어진 변화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훨씬 취약해졌다.

4) 앞에서 말했던 민주화 이후 이른바 ‘현대사의 해체’는 민족주의적 역사관 내지 역사이해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바꾸어 말하면 민족주의적 역사관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관념적으로 도식화된 관점을 통해서는, 한국사회의 변화된 현실을 토대로 현대사를 재구성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오늘의 문제를 보는 관점의 상실로 결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역사로부터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점 즉 오늘의 한국민주주의의 현상황과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로부터 과거를 되돌아보는 방법으로 현대사를 이해하고 싶다. 그러면서 지금은 사라져버렸지만 1980년대 민주화투쟁과정에서 한국의 현실 내부로부터 운동의 중심세력에 의해 제기되었고 운동의 이념적 기반으로 기능하였던 민중주의적 이념과 가치의 중요성을 불러들이고자 한다. 한국현대사 60년에 대한 관점은, 한국국가의 성격과 발전방향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그 중심에 포괄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현대사를 이해하는 문제는 컨센서스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불일치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를 둘러싸고 문제설정과 해답이 자동적으로 설정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방 6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면 먼저 해방 60년을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분단시대와 같은 민족주의적 문제정의가 충분치 않다면 이를 보완하기 위한 또 다른 관점과 접근이 발전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이 문제를 보는 필자의 견해를 말하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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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고려대학교 정외과 교수,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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