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개혁 2006-04-17   2709

[모의배심재판 방청기 1] “가르치려 들지마라”

아주 소중한 모의배심재판, 하지만 많이 남은 아쉬움

지난 4월 12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제3차 국민참여 형사모의재판을 진행하였다. 국민참여재판, 즉 배심제의 도입을 적극 주창하였던 참여연대는 20여명의 시민방청단을 꾸려 그날 모의재판을 방청하였다. 참여연대는 그날 방청을 했던 분들과 그날 모의재판을 기획했던 분들로부터 개인적인 방청기와 소감문을 부탁했으며, 그 중 몇 분들이 글을 보내왔다. 이 글들에 적힌 모의재판에 대한 평가는 참여연대의 공식입장이 아닌 방청한 시민들의 개인적 평가이다. 편집자 주

모의배심재판 방청기

[2] “배심재판, 잘 정착될 거 같아요” /김병필(대학생)

[3] “사법개혁의 장도, 배심제의 입법화에 달려있어” / 한상훈(연세대 법학교수, 사개추위 기획추진단)

[4]배심원을 향한 검사와 변호사의 치열한 설득전 / 이귀보(주부)

하나

미국의 배심재판은 그 출발부터 권력에 대한 저항의 정신을 담고 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당시 미국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배심재판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영국이 파견한 총독을 비난한 글을 출판하였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에 회부된 J. Zenger를 필두로 영국과 미대륙간의 통상은 언제나 영국적의 선박을 이용하도록 한 항해법을 위반한 자들에 대하여 미국에서 구성된 배심인단이 하나같이 무죄평결을 내리자 영국의회는 식민지 미대륙에 대하여 배심재판의 적용을 받지 아니하는 특별법원을 설치하였다. 이에 미국인들은 식민모국의 이러한 조치에 격렬히 항거하면서 독립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영국왕이 “수많은 사건에서 배심 재판을 받는 혜택을 박탈”하였다는 비난이 담겨 있음도 여기서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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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으로서의 배심재판은 미국 헌법의 제정과정에서도 반복 거론된다. 단일하고도 강력한 연방정부를 구성하고자 하는 연방파에 대하여 반연방파들은 지방정부의 자치를 보장하라는 반론을 편다. 이 과정에서 형사사건뿐 아니라 민사사건에 관하여서도 배심재판을 받을 권리를 헌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북부 상공업자들의 권력에 저항하는 남부 지주세력들의 자위책이기도 하였다. 미국 수정헌법 제5조와 제6조, 제7조에서 거듭되는 이 배심재판의 권리는 처음부터 국가의 사법권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해방적 관심을 담고 있는 것이다.

박경신 교수가 배심제를 소개하며 힘주어 강조했던 영화 「평결」의 한 대사는 이 점을 대변한다 : “판사나 변호사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들이 법을 만듭니다.”

식민모국인 영국에 대항하는 식민지 미국이, 그리고 다수자인 연방파에 저항하는 남부의 정치세력들이 배심제라는 이름으로 끝까지 지켜내고자 하였던 것은 다름아니라 바로 이렇게 그들 스스로가 만든 법에 의하여 지배가 이루어지는 「자기 지배」의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배심제도는, 사법의 민주화뿐 아니라 그와 더불어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그들의 법이 나의 생활과 사회를 지배하는 질곡의 통치체제를 거부함에 중점이 놓이게 된다. 나와 나의 동료들이 만들지 아니한 법 혹은 나와 나의 동료들이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동의하지 못하는 법에 의하여는 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나의 생명과 신체와 재산을 침해당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이 제도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배심제도는 사법의 민주화라는 덕목과 더불어 국가권력과 개개의 국민 사이에 위치하여 국가권력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켜내는 가장 굳건한 인권수호자로서 기능하는 덕목도 자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월 12일, 사개추위가 주관하였던 모의배심재판은 이 나라의 사법체계에 그들의 법만이 아니라 우리의 법도 있을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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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배심인단과 연예인 배심인단, 그리고 기자 배심인단의 세 트랙으로 구성되었던 배심재판은 언론사의 취재경쟁과 너무도 많이 몰린 방청객, 주책없는 정치인들의 인사치레 등으로 인하여 과도하게 어수선하였던 법정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요령(?)없는 재판장의 딱딱한 재판진행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팽팽한 긴장을 자아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리고 법적 정의를 향한 배심원들의 열정은 이 모의배심재판의 실질을 채워나갔던 추동력이었다. 생경한 법률용어와 생소한 소송절차조차도 가로 막지 못하였던 배심원들의 생생한 의식은 모의재판에서 흔히 나타나는 어색함과 그로 인한 비현실감까지도 압도하였다.

실제 배심원들의 얼굴을 직접 바라보지 못 하였기에 그들의 표정이나 눈빛은 간취할 수 없었지만, 검사가 공소요지를 진술할 때부터 피고인의 최후진술이 이루어질 때까지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그들의 자세에서 풍겨나오는, “우리가 법을 만든다”고 하는 의지 -혹은 실체적 진실의 아우라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결코 놓쳐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긴장감과 진지함을 놓쳐 버리게 하는 것은 “그들의 법”에 너무도 익숙해 있던 예의 법조인들이었다. 실제 그동안 배심제의 도입을 주장하면서도 계속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하게 남아 있었던 막연한 불안감-우리나라에서 배심제가 제대로 잘 운영될 것인가라는 불안감-의 실체를 오늘의 모의배심재판과정에서 간취한 셈이라고나 할까…….

흔히들 배심제의 도입에 반대하는 논리 중의 하나가 시민들의 법률적 무지라는 주장이었고 혹여 배심원들에 가해질 수도 있는 협박이나 매수 등의 평결왜곡문제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민들에게 가해지는 불신의 당·부당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불신을 야기하는 주된 인자가 법적 판단의 권한을 시민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는 법조집단의 권력의지였음을, 그래서 모든 재판의 진행을 비전문가인 시민으로서의 배심원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는 질곡의 현실이었음을 이 모의배심재판에서 명확히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모의배심재판의 구조이다. 실제 배심재판은 동료들의 눈높이에서 나의 행위 혹은 나의 권리를 심판받음을 본질로 한다. 나와 똑같은 생각과 감정과 지혜를 가진 나의 동료들에게 나의 사건을 설명하고 그들의 이해를 구하며 그들의 동의를 요청하는 것이 배심재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처리해 주기 위해서 법조인-검찰과 변호인이 존재하며 이 이해관계의 대립속에서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자가 재판관이다.

그래서 배심재판에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와 같은 눈높이에서 사건이 정리되고 법리가 구성되며 증거가 제출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난 모의배심재판에서는 이런 노력은 그 외관상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리 돋보이지 못하였다. 오히려 우리 법조가 그동안 익숙해 왔던 그 관료적 우월의식을 재확인하였다는 소극적 판단조차 가능할 지경이다. 이제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자.

먼저 어려운 법률용어가 남발되고 문어체의 작문을 낭독식으로 읽어나가는 것은 아직 배심재판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 법조의 한계 정도로 치부해 두기로 하자. 배심원과 눈을 맞추며 비언어적으로 의사소통함으로써 배심원과 공감을 이루어내고 이 과정에서 진실의 아우라를 서로 공유하는 기술은 아직은 우리 법조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판의 진행과정에서 무엇이 법률적으로 중요한 논점이며 무엇이 상대의 주장이 가지는 한계인지, 무엇을 신뢰하고 무엇을 의심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진술이 검찰측이든 변호인측이든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 그냥 일사천리식으로 변론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아주 심각히 검토해 보아야 할 사항이다.

실제 재판의 모두에 재판장은 배심인들에게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이 되었을 때에만 유죄평결을 내려야 한다고 설시하였다. 그러나 비전문가인 배심원의 입장에서 법률전문가들이 증거조사나 증인신문의 과정에서 제출하는 각종의 입증사실들에 대하여 스스로 “의심”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사람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맞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맞게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일 따름이다.

이런 비전문가들에게 “합리적 의심”을 하게 만드는 것은 그 증거의 신빙성, 신뢰성을 공격하는 상대법조인의 반론과 탄핵주장이다. 검찰의 주장에 대하여 변호인이 나서서 무엇이 “의심스러운 점”인지를 지적해 내어야 한다. 변호인의 입증에는 어떤 “의심점”이 있는지 검찰이 반론하여야 한다. 그리고 배심원은 이런 “의심스러운 점”들에 대한 주장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의심을 하고, 그 의심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이윽고 “합리적 의심의 여지”를 불식하게 된다.

그 예를 모의배심재판과정에서 최대의 논점이 되었던, 목을 조른 방법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자. 검찰측은 살인의 고의를 입증하기 위하여 수사경찰의 진술을 토대로 X자 모양으로 목을 졸랐다고 주장하며, 변호인측은 고의가 없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목을 일자 모양으로 졸랐을 뿐이며 수사경찰의 진술은 수사단계에서 이루어진 유도심문의 결과를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하지만, 변호인측의 주장처럼 유도심문이 이루어졌고 이에 피고인이 엉겁결에 대답한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해서 X자 모양으로 목을 졸랐다는 검찰의 주장이 탄핵되지 않으며 일자 모양으로 목 졸랐다는 변호인측의 주장이 입증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은 무엇을 더 의심해야 하며 무엇을 더 고민해야 하는지 전혀 정보를 얻지 못하였다. 분명 목은 졸렸고 그래서 질식사한 것 같기는 한데, 어떻게 하여 가녀린 여자가 일자 모양을 목을 “조를” 수가 있는 것인지, 소파 위에서 불안정한 자세로 목을 조르는 아내에 대하여 피해자는 왜 항거하지 못하였는지, 목을 조른 보자기에는 피해자의 체세포나 뒷 머리카락 같은 것은 묻어 있지 않는지, 법의학적 관점에서 수사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등등 계속되는 의문점들에 대한 쌍방의 문제제기는 지속되어야 했었다.

정당방위의 문제는 더욱 더 심한 공백으로 남아 있다. 가정폭력의 특성상 흔히 나타나는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증후군이 입증되어야 “비대결성 정당방위”의 법리가 설명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호인은 이 점에 대한 입증은 소홀히 한 채 단순히 가정폭력과 정당방위만을 직접 연결시키고자 노력하였고 검찰측은 이에 대한 어떠한 항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측이 상대방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함으로써 그 주장을 기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반박의 과정에서 배심원들이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배심재판에서의 변론이란 그 무엇보다도 배심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풀어주는 한편, 그들이 궁금해야 하는 것을 알려 주거나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검찰이든 변호인이든 철저하게 그 배심원들의 눈높이까지 자신의 눈을 맞추어 내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의 모의배심재판에서는 이런 노력이 그리 명료해 보이지 않는다.

실제 이 점은 배심인단의 평결을 “참조하여” 이루어진 재판장의 판결에서 잘 나타난다. 변론의 전 과정을 통하여 어떤 순간에도, 피해자인 남편이 피고인인 아내를 쓰러뜨리고 배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는 등 폭력을 행사하였던 국면과 아내가 남편을 소파에 밀어 붙이고 그 위에 올라 앉아 목을 조르는 국면이 법리상으로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한 바는 없었다. 엄밀히 보자면 전자의 순간은 남편의 아내 구타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이 때는 별다른 논거없이도 불법적 공격이라는 정당방위의 성립요건은 충족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후자의 순간은 남편의 폭력이 이미 중지된 상태이며 따라서 소위 “비대결”의 국면인 만큼, 정당방위가 성립하려면 별도의 법리나 증명이 있어야 하는 상태이다. 이에 재판장은 이러한 두 국면의 차이를 거론하면서 정당방위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배심재판의 경우 이런 구분은 배심원들이 하여야 하는 것이며 그 분별의 능력은 검찰측이나 변호인측의 문제제기에 의하여 촉발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아쉽게도 검찰측이든 변호인측이든 어느 측에 의해서도 그런 논점은 전혀 제기되지 못 한 채 변론은 종결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배심원은 무능한 배심원으로 치부될 위기에 처해지게 되었다.

과도한 억측일지는 모르지만 만에 하나 배심원들이 정당방위를 인정한 평결을 하였다면 틀림없이 재판장은 이런 논점을 들먹이며 배심원의 평결 자체를 뒤엎었을 가능성이 너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섯

또 다른 흠집은 모의배심재판이 그 자체 의도된 결론을 향해 배심원들을 암묵적으로 유도하는 구조로 구성되었다는 억측의 가능성을 남겨 두었다는 점이다. 이는 두 가지의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검찰측은 주위적 청구와 예비적 청구로 구분하여 공소를 제기하였다. 실제 이런 청구의 방식은 법관재판(bench trial)에서는 흔히 사용하며 또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배심재판의 경우 배심원들로 하여금 속 편하게 빠져나갈 피난처를 강구하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번의 모의배심재판에서 검찰은 주위적 청구로 살인죄를, 예비적 청구로 폭행치사죄를 주장하였다. 여기서 일반인들에게 “좋다, 보통이다, 나쁘다”라는 3단계의 리커트척도를 제시하면서 질문을 하면 통상적인 경우 중도적인 답변인 “보통이다”를 선택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배심원들은 살인죄, 폭행치사죄, 무죄 라는 세 가지의 연속된 척도 중 가장 중간에 있는 답변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모의배심재판처럼 사안과 입증이 단순한 경우에는 또 다른 진술이 가능하겠지만-하지만 평결은 예상대로 폭행치상이라는 중간적 대안이 선택되었다-, 복잡한 증거와 진술이 얽혀 있는 실제 사건의 경우 이런 중간집중성, 혹은 책임회피성의 평결은 쉽사리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의 요인 또한 배심원들이 극단적 대안을 선택하는 것을 회피하는 경향을 예정하고 있는 것으로, 유·무죄의 판단과 더불어 양형의 판단을 하게 만든 점이다. 실제 이번의 모의배심재판에서는 배심인단으로 하여금 양형판단까지 하도록 해놓고서도 실제의 변론과정에서는 양형에 관한 심리는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무죄 판단과 양형판단을 같이 하게 함으로써 「유죄인정+경미한 형벌의 선택」이라는 일종의 보상적 결정을 할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무죄의 판단에 이르기에는 합리적 의심의 능력이 모자라는 반면, 유죄를 인정하되 형벌을 경미하게 함으로써 피고인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 보려고 하는 위험회피적 태도가 얼마든지 도출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이 점들은 이번 모의배심재판이 “모의”의 성격을 너무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더욱 가중된다. 변론에서 대부분의 진술들이 증인의 입을 통하여, 그것도 아주 잘 정리된 형태로 제시됨으로써 사실관계가 배심원들의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정리되고 그 유무죄의 혐의 역시 마찬가지로 재판의 초입에서 미리 결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것은 분명해 보이며 동시에 그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일상적 폭력에 시달리는 불쌍한 아내였으며, 살인의 고의와 정당방위에 대한 검찰측 및 변호인측의 입증은 그리 명확하지 않으며 나아가 수사조차도 모든 디테일들을 다 담아낼 만큼 세밀히 이루어지지 못한 채 공판이 열리는 바람에 굳이 고민하여 다툴 그 어떤 것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의당히 결론은 가장 안정한 것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여섯

요컨대, 이번의 모의배심재판은 배심원들로 상징되는 일반시민의 눈높이에 맞는 “모의재판”을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우리나라에서의 배심재판의 미래에 대하여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집단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에는 자못 미흡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적인 책임은 배심원 혹은 일반시민의 법지식의 부족에 있다기보다는 그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자기동력을 채 떨치지 못하는 법조집단의 고권의식에 있다.

현행의 배심제도의 원형이라 할 배심제는 영국의 헨리 2세(1154-1189)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이때 12명의 배심원들은 누가 진정한 토지소유자이며 누가 그 상속자인지를 스스로 아는 자로 간주되었다. 국왕은 혹은 재판관은 이들의 지식을 빌리는 판정관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환언하자면 배심제도는 국가가 일반국민에게 무엇이 법인지를 묻는 제도이다. 법조인은 그 중간에서 이들간의 소통을 매개하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 미국에서 배심재판을 운영하는 기본적 테크닉이 “가르치려 들지마라”라는 언술에서 출발한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번 모의배심재판은 처음부터 가르치겠다는 의식이 선행되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환언하자면 모의재판의 구성에서부터 그것이 진행되는 재판과정에 이르기까지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설계되고 조직된 것이 아니라, 법조인의 눈높이에서 전제되고 가공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판의 진행 또한 조서공판식으로 사실관계에 대한 진술이나 입증에 구멍이 적지 않게 뚫려 있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궁금하고 의심스러울 수 있는 것이 법조인의 눈에는 이미 전제되어 있거나 혹은 당연한 것으로 더 이상의 논급이 불요한 것으로 뛰어 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서 이번의 모의배심재판은 “우리들이 법을 만든다”가 아니라 “그들의 법”을 “그들이 적용하는” 형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들”인 배심원들의 능동적 참여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배심원 혹은 배심인단과 부단한 의사소통의 통로를 마련하지 못한 검찰측, 변호인측 혹은 재판부의 자폐의식은 “모의”의 재판에서마저도 “우리들”이 표피에서만 맴돌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또 한 번의 모의재판을 제안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번처럼 거창하게 연예인을 동원하고 관객을 모으고 할 것이 아니라, 조용히 몇 팀의 배심인단을 상대로 법조인들이 그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모의”하고 학습하며 훈련하는 모의재판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눈높이를 맞추는 훈련 – 법률용어를 모르고 조서를 읽을 줄 모르며 법리를 설명할 줄 모르는, 하지만 “우리들의 법”을 만들겠다는 의지에 충만한 배심인단과 하등의 왜곡없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훈련,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배심제가 성공하기 위한 최대의 현안과제일 것이다.

한상희(건국대 법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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