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넘길 가능성 높아..촉박한 시일, ‘졸속’ 개정 우려
SK비자금 정국으로 조성된 국민적 지탄 속에서 정치권은 올해말까지 각종 선거·정치관계법 개정을 마무리짓겠다고 시민사회에 약속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파업’으로 인해 정치관계법은 올해를 넘겨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에 따라 임박한 내년 총선 일정을 감안하면, 선거에 임박해 각종 졸속·개악 법안을 통과시켰던 2000년 총선의 구태를 정치권이 이번에도 반복할 위험이 현저하게 커졌다는 지적이다.
선거일 90일 전에 여야담합
2000년 총선을 앞두고 1998년 구성된 정치개혁입법특위는 1999년말까지 7차례씩이나 활동시한을 연장했으나 특위에 상정된 44건의 안건 가운데 단 두 건만 통과시켰을 뿐 38건은 처리되지 않았다. 처리된 6건 가운데 4건은 폐기되었다. 그나마 통과된 안건은 중앙당 및 지구당 후원회의 기부 한도액을 2배로 늘린 것으로서 의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2000년 들어서 여야는 총선일정에 쫓겨 선거법에 한해서 정치개혁 입법 협상을 벌였는데 선거를 90여일 앞둔 1월 15일 여야가 합의한 선거법개정안이라는 것도 가관이었다. 여야 정당은 당리당략과 현역의원의 기득권 유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여야는 당시 IMF 환란으로 인한 고통분담 차원에서 국회의원 정수를 10% 줄이기로 한 약속을 버리고, 오히려 지역구 5석을 추가했다. 또, 국고보조금 사용내역을 투명하게 하라는 요구는 물리치고 도리어 선거보조금만 50% 인상했다.
또한, 정당명부-비례대표제(1인 2투표 제도) 도입, 국민들의 자발적인 선거운동을 가로막는 선거법 87조 폐지, 여성 30% 할당, 선거구획정위원회의 중립적 구성, 선거사범 공소시효 연장 등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이렇게 여야 담합에 의한 선거법 개정안은 당시 낙천낙선운동을 선언한 시민사회단체의 강력한 반대와 빗발치는 여론의 반발로 후퇴했다. 그 후 2월 7일 새로운 선거법안이 통과되었다. 여야는 국회의원 정수를 당시 299석에서 현 273석으로 줄이고, 비례대표 여성 30% 할당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제기되었던 수십여 개의 정치개혁 과제 중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선거법 87조-시민단체 선거개입 금지조항의 경우에도, 낙선운동을 원칙적으로 가능하도록 개정하였으나, 낙선운동의 실제 수단인 가두 캠페인, 유인물 제작 등은 일체 불허함으로써 사실상 낙선운동을 불허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에서 활동했던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2년간을 끌어온 선거법 협상을 선거 직전에 극적으로 합의한 것은 시민사회의 대응능력을 최소화하려는 정치권 일반의 기득권 지키기 전략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물론 당시 정치권은 부패·무능 정치인에 대한 낙천·낙선운동으로 시민사회와 일전을 치르기는 했지만, 그 당시 여야가 합의하여 얼치기로 처리한 정치관계법이 여전히 우리 정치를 낡은 틀 안에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총선 ‘게임의 룰’, 또 다시 정략과 졸속 합작품 우려
당시 2년을 끌어 온 지리한 선거법 협상이 여야의 당리당략으로 막판에 극적 타결을 본 것은, 헌법재판소가 현행 선거법 2개 규정에 대해 위헌과 불합치 판결을 내린 지 2년이 넘도록 관련 법안의 개정이 미뤄지고 있는 현 상황과도 견줄만하다.
헌법재판소는 2001년 10월에 현 선거구 인구편차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당시 헌재는 현 선거구 획정 규정의 유효기간에 대해 “선거구 구역표는 2003. 12. 31.을 시한으로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계속 적용된다”고 판결했다. 이와 관련 임지봉 건국대 법학 교수는 “헌재 판결주문에 개정시한을 넘긴 법률안의 효력상실을 문구로 분명히 하고 있지 않더라도 통상 개정시한을 넘긴 위헌법률안은 그 다음날부터 효력을 상실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밝혔다. 만약 올해까지 정치권이 현 선거구 획정관련 규정의 위헌요소를 제거한 개정안을 만들지 못한다면 현 규정은 당연 효력을 상실한다는 얘기다.
헌재는 또한 2001년 7월 현행 ‘1인1표제’에 대해서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당시 헌재는 이 규정의 개정시한을 못박지 않았기 때문에 판결 이후 당연히 그 규정은 효력을 상실했다. 이 효력을 상실한 1인1표 선거법 규정의 개정이 지금까지 미뤄지고 있다가 국회 정개특위에서 이제 막 논의가 시작되는 시점에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으로 특위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국회 정치개혁특위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선거구 획정의 기준과 원칙,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의 비율 등을 논의하다가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으로 논의가 전면 중단된 상태”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28일에 정개특위 재개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계획”이라면서 “올해 말까지는 정개특위 합의안을 만든다는 것에 각 당이 동의했지만 지금 국면에서는 이 시한을 지킬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덧붙였다.
결국 2000년 총선 때처럼 올해를 넘겨 내년 임시국회에서 막판 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하승수 변호사는 “헌재의 판결은 유권자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내려졌고, 입법부가 진작 고쳤어야 했다”면서 “국회 밖으로 뛰쳐나간 한나라당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선거법 관련 협상을 막판에 졸속으로 처리하겠다는 심보”라고 질타했다.
실제로 정치자금 투명성 강화, 정당기능 활성화 등의 정치개혁안은 정치권이 수용하느냐 마느냐 선택의 문제일 뿐이지만, 선거구 획정, 국회의원 정수 확정, 선거제도 협상 등은 서로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상당한 연구와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지금 열심히 논의한다고 해도 빠듯한 일정인데, 내년으로 넘겨질 경우 2000년 총선 때의 선거법 타협처럼 개혁이 누더기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것이다.
비자금 정국에서 하나의 국가적 의제로 설정된 정치자금 투명성 강화 열망 역시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으로 더욱 국회 진입이 어려워졌다. 내년 총선 게임의 룰을 정하는 선거·정치관계법 개정이 2000년 총선 당시의 ‘졸속’ 악몽을 되풀이할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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