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 이후 한반도에서도 본격적으로 통일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사회복지정책이 제시할 수 있는 비전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형태로든지 통일은 사회복지정책이 직면해야 할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의 통일 논의와는 별개로 독일은 이미 통일을 이룬지 10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1990년 10월 3일 정치적 통일을 이룩한 후 지난 10년간 독일사회는 통일이라는 변수가 야기한 사회변동의 과정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이같은 맥락에서 사회(복지)정책 역시 많은 변화와 도전에 직면해왔다.
독일에서의 이같은 움직임은 통일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염두에 둔 한국사회복지정책 발달 방향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다. 사회과학의 특성상 실험실 상황을 구성할 수 없는 한계를 감안한다면, 독일 사회 내지 독일사회(복지)정책은 한국사회복지정책을 위한 좋은 실험실 상황을 제시한다.
따라서 정치적 통일 이후 소위 사회적 통일 내지 사회내부적 통일 (innere Einheit)을 지향하는 과정 중 특히 사회(복지)정책관련 이슈를 중심으로 독일적 현실에 대한 분석을 해보도록 하겠다. 이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소위 "통일 대비 한국사회복지정책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정리를 해본다.
서-동-이전 과정 (West-Ost-Transfers)
독일 통일의 기본적 성격은 구동독 체제가 붕괴되고 구동독 주민이 독일연방공화국 (Bundesrepublik Deutschland)의 일원이 되는 "흡수통일"이다. 따라서 구동독 지역은 독일연방공화국 입장에서 볼 때 "편입지역 (Beitrittsgebiet)"이다. 이는 독일 통일 후에도 사회(복지)정책의 기본 원칙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흡수통일의 맥락에서 임금, 장학금, 월세, 임대료, 6천 동독 마르크까지의 개인 예금 등은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를 1:1로 교환해주었고, 기타 채권 및 채무, 그리고 6천 동독마르크를 넘는 개인 예금 등은 2:1의 비율로 교환해 주었다. 사회보험 재정 이전 등 "서-동- 이전" 규모 확대가 확대되면서 통일기금 220억 마르크 중 45%에 해당하는 금액을 1990년 하반기에 이미 동독에 이전하였다.
동독 지역 재산 관계에 대해서는 – 사회화된 재산과 적은 보상으로 몰수된 재산, 무상 국유화, 사기, 부패, 협박 등 비합법적 행위에 의한 몰수에 대한 소유자의 청구권 인정을 인정한 반면, 1945년에서 1949년 사이 소련에 의해 몰수된 재산에 대해서는 청구권 인정하지 않았으며, 보상보다는 재소유 우선 원칙을 적용하였다. 이같은 "서-동-이전" 양상은 동독 국민의 구매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반면, 동독 화폐가치가 지나치게 상승하여 동독 지역 산업경쟁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오정수, 정연택 1999:153 이하).
게다가 통일 전 평가한 구동독 지역 경제력이 과장되었음이 드러나면서, 동화의 차원에서, 전체적으로 조세부담을 늘리지 않으면서, 예측보다 많은 제반 통일 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통일 후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다. "서-동-이전"의 증가와 조세 부담율 감소라는 모순된 현상을 설명하는 요소로서 국가부채 증가와 더불어 사회보험재정 이전을 들 수 있다. 흡수통일은 사회보험체계에 대한 기여금 (Beitr ge)없이 구동독인을 하루 아침에 서독 사회보험 체계에 편입시켜, 사회보험 재정 부담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87년 현재 약 499억 마르크에 달한 국가 부채가 통일 비용 조달로 인하여 1990년에 이르러서는 1천240억 마르크로 급격히 팽창하였다. 1990년 7월 "독일 통일 (Deutsche Einheit)"이라는 기금 (Fond)을 설립하면서만 482억 마르크를 국가 부채를 통해 조달해야만 했다. 1998년 말 현재 국가 부채는 통일 당시의 거의 두배에 해당하는 2천256억 마르크에 달한다. 1998년에 새로 발생한 부채만 679억 마르크가 된다 (StBA, 1999:240 이하).
국가 부채의 증가가 구동독 지역에 대한 국가적 이전 (staatliche Transferleistung)의 형태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대표적 예가 국내총생산에 대한 사회적 서비스 규모 비율 (이하 약칭: 사회적 서비스 비율 Sozialleistungsquote)이다. 사회적 서비스 비율이 구서독지역에서는 1990년대에 30% 정도에 정체되어 있는 반면, 같은 기간 구동독 지역에서 그 비율은 50% 이상에 머물러왔다.
표 1) 정책 분야별 서-동-이전 지출 규모 (1991년-1996년) (단위: 10억 DM)
* 경제지원, 철도, 신탁관리청, 농업에 대한 지원 포함
** 노동시장정책과 소득대체급여 포함
출처: 오정수, 정연택 (1999:154)
사회(복지)정책적 개입의 결과 – 삶의 조건에 대한 인식: 구동서독 비교
흡수통일 과정에서 늘어난 사회(복지)정책 영역에서의 재정 부담 때문에 독일 통일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재정적 부담의 이면에는 구동독인이 구서독 국가체제를 받아들이는 정치적, 사회적 통합의 효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옛 동구 공산권 진영 국가 중 구동독은 높은 사회적 안정도 – 낮은 범죄율, 상대적으로 낮은 주거이동율, 체제에 대한 긍정적 인식 등 – 를 보인다.
또한, 구동독인은 구서독인보다 삶의 조건이 개선된 현상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 (표 2) 여전히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낮은 만족도를 보인다 (표 3). 소득, 주거 조건 등 객관적 삶의 질이 향상된 반면 여전히 높은 실업률과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 대한 적응 등에서 오는 불안감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삶의 조건에 대한 만족도 차이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인식 차이로 나타난다. "독일 복지국가, 즉 사회국가 (Sozialstaat)가 질병, 실업, 노령 및 기타 긴급 상황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구서독인보다 구동독인이 더욱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회적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에 대해 구서독인 역시 1991년 90%, 1994년 87% 정도 지지율을 보이고 있으나, 구동독인의 경우 같은 기간에 99%, 97%로 거의 100%에 가까운 지지율을 보인다 (StBA 1998:609).
표 2) 삶의 조건에 대한 평가 (%)
출처: StBA (1998:597)
표 3) 삶의 조건에 대한 만족도 (중간값)
출처: StBA (1998:597)
통일과 한국사회복지정책 발달 방향
독일 통일 과정은 흡수통일방식 및 동독산업 경쟁력에 대한 잘못된 측정으로 인한 재정 수요 증가, 무리한 화폐 교환으로 인한 동독 산업 경쟁력 약화 등의 문제를 노정시켰으며, 결국 국가부채증가와 사회보험재정 악화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이같은 경험이 우리나라 통일에 대한 비관적 태도로 이어질 수 있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독일통일이라는 사회적 실험실 상황을 통해 우리는 흡수통일 혹은 선통일 . 후사회통합방식을 지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독일식 흡수통일을 전제로 했을 때 한국 사회보험 재정은 심각한 재정 적자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사회보험이 보험 가입자의 최저 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하거나 질병 발생시 소득 보장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 주민을 통합하는 사회보험제도를 상상하기 매우 어렵다.
흡수통일이 아닌 다른 방식, 예를 들어 1국가 2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통일 방식을 통해 독일에서와 같은 규모의 비용 유발 요인 없이 한반도에서 통일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통일에 대비한다는 취지로 남북한을 통합하는 사회(복지)정책 도입보다는, 한국 내 사회보험제도와 공공부조 제도 등 사회(복지)정책 영역에서의 독자적 발전을 꾀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 (본문에서 논의하지 못했지만) 대인복지서비스 부문의 경우에도 인권 존중과 민주주의, 한국적 상황에 입각한 서비스 수준 향상을 도모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통일 후 구동독 지역에서 관찰할 수 있는 여타 구동구권 공산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안정은 그나마 발달한 구서독 복지국가체제가 가능케 한 것이다. 통일의 열기에 한반도가 휩싸이면 휩싸일수록 우리 사회(복지)정책의 양적 . 질적 수준 향상에 눈을 돌릴 때이다.
월간 <복지동향> 2000년 08월호(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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