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 노동자의 이름으로 계약은 쪼개져 있지만, 노동조건을 좌우하는 실질적 권력은 늘 원청에 있었습니다. 이번 현대제철 판결을 두고 신하나 변호사는 ‘실질적 지배력’을 가진 원청을 교섭 주체로 인정하며 노동3권의 공백에 제동을 걸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행정부가 법에 없는 ‘구조적 통제’ 기준으로 그 문을 다시 좁히고 있는데요. 신하나 변호사는 판결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짚는 동시에, 최근 교섭 중 숨진 화물연대 서광석 열사의 비극을 통해 법이 현실의 방패가 되지 못할 때 노동자가 마주하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광장에 나온 판결 : 312번째 이야기
원청의 하청 노동자에 대한 단체교섭 의무를 인정한 판결
서울행정법원 최수진(재판장), 강상우, 이슬아
서울행정법원 2025. 7. 25. 선고 2022구합69230 [판결문 보기]

신하나 / 변호사(법무법인 덕수), 민변 노동위원회 위원장
산업의 풍경, 그리고 법의 풍경
현대제철 당진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약 3,700명은 매일 원청의 작업지시 시스템(MES)을 통해, 무전기와 단말기와 TBM(Tool Box Meeting) ¹절차를 통해 일해 왔다. 임금 봉투에 적힌 회사명은 40여 개의 하청업체였지만, 일의 강도와 방식, 안전 수칙과 작업표준, 근로조건을 결정하는 권한은 모두 원청에 있었다. 법원은 이 현실을 직시했다.
판결문이 풀어낸 논리는 직관적이다. 헌법 제33조의 단체교섭권은 구체적인 권리이며, 실제 지배력을 가진 자를 교섭 상대에서 빼버린다면 하청 노동자의 노동 3권은 형해화된다는 것이다. 중층적이고 다면적 노무제공관계가 일반화된 오늘날, 형식적 계약관계만을 기준으로 사용자를 가리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법원은 ILO 제87호·제98호 협약과 결사의 자유 위원회의 권고까지 인용하며, ‘실질적 지배력을 가진 사용자와 단체교섭을 하도록 해야한다’라고 판시한다.
노조법 2·3조 개정과 또 다른 통제

이 판결은 곧 노조법 제2조의 ‘사용자’ 개념 개정의 기준이 되었다. 권한과 책임의 일치, 진짜 사장과 마주 앉을 권리.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외쳐온 명제가 마침내 법전에 새겨진 것이다.
그러나 법은 글자가 아니라 집행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집행의 자리에서, 우리는 또 한 번 후퇴를 목격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시행을 앞두고 이른바 「개정 노조법 제2조 해석지침」과 「원·하청 상생 교섭절차 매뉴얼」을 내놓았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판결과 입법이 열어놓은 문을 다시 좁히는 장치들이 줄지어 있다.
해석지침은 사용자성 인정 요건으로 ‘구조적 통제’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근로시간·작업방식 등 근로조건의 핵심적 부분을 통제하여 하청 사용자의 결정을 본질적으로 제한하는 경우로 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법(母法) 어디에도 ‘구조적 통제’라는 표현은 없다. 법률이 정한 ‘실질적·구체적 지배·결정’을 행정이 임의로 좁힌 것이다. 더욱이 매뉴얼은 교섭창구단일화 제도를 원·하청 교섭에까지 끌어들였다. 본래 기업별 교섭의 혼란을 막기 위해 설계된 절차적 장치를 초기업적 원·하청 교섭에 들이대는 것은, 그 자체로 하청 노조의 교섭권을 절차의 미로에 가두는 일이다. 교섭의제 또한 ‘노동위원회 등을 통해 판별하겠다’라는 정부 방침이 발표되자, 현장에서는 곧바로 “교섭 전 허가제”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누가 사용자인지, 무엇을 교섭할지를 행정이 사전에 거르겠다는 것은 노사자치의 본령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요컨대 사법부는 헌법의 언어로 사용자 개념을 넓혔고, 입법부는 이를 법률에 새겼다. 그런데 행정부는 그 통로의 폭을 다시 좁히고 있다. 노란봉투법은 ‘대화 촉진법’으로 명명되었지만, 가이드라인과 절차 규율이 거듭될수록 대화의 문턱은 오히려 높아진다. 지원해야 할 행정이 통제하려 들 때, 헌법상 노동3권은 다시 문자에 갇힌다.
대화를 외치던 노동자의 죽음

며칠 전 우리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했다. 4월 20일, CU 진주물류센터 앞에서 화물연대 서광석 열사가 대체수송 차량에 깔려 세상을 떠났다. 요구는 단 하나였다. ‘대화하자’는 것. 연쇄하청의 맨 끝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원청 BGF리테일에 일곱 차례 교섭을 요구했지만 모두 거부당했다. 일을 시킬 때는 노동자처럼 부리고, 책임질 때는 자영업자처럼 떼어내는 이 오래된 이중잣대가 또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리고 사고 당일, 고용노동부는 보도설명자료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번 사안은 실질적·구체적 지배력에 따른 사용자성 판단 및 원·하청 교섭 문제를 넘어선 상황”이며, 화물기사들은 “소상공인, 자영업자”라고. 한 조합원이 교섭을 요구하다 죽었는데, 정부의 답은 그가 노동자가 아니라 자영업자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금 행정의 풍경이다.
판결이 남긴 자리
현대제철 판결이 말한 ‘실질적 지배력’은 서광석 동지가 죽음으로 증언한 그 현실과 정확히 같은 자리에 있다. 연쇄하청의 맨 끝에 선 화물기사, 플랫폼 알고리즘의 지시에 따라 도로 위를 달리는 라이더, 본사 매뉴얼대로 가정을 도는 학습지 교사, 자회사 채용에 밀려나는 사내하청 노동자의 자리 말이다. 이들의 근로조건을 실제로 결정하는 자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법은 너무 자주 그 손을 보지 못한 척해 왔고, 행정은 그 손을 가리는 가림막을 새로 짜고 있다.
이 판결은 노동자를 노동자로, 사용자를 사용자로 부르자는 소박한 요구에 사법부가 응답한 것이다.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입법으로 새겨진 약속이 행정의 가이드라인 안에서 다시 해체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 있는 노동자가 살아서 대화할 수 있도록 법의 글자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일. 그것이 서광석 동지의 빈자리에 우리가 남겨진 이유일 것이다. 진짜 사장은 분명히 거기 있었고, 그는 끝내 노동자였다. 온 마음을 다해 그의 명복을 빈다.
¹ 작업을 개시하기 전에 원고 회사 담당자로부터 작업 의뢰서를 확인받고, 일일안전작업점검표에 서명을 받은 뒤, 구체적인 작업 내용과 주의 사항을 전달받는 절차이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최근 판결 중 사회 변화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거나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된 판결, 기본권과 인권보호에 기여하지 못한 판결, 또는 그 와 반대로 인권수호기관으로서 위상을 정립하는데 기여한 판결을 소재로 [판결비평-광장에 나온 판결]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로 법률가 층에만 국한되는 판결비평을 시민사회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다양한 의견을 나눔으로써 법원의 판결이 더욱더 발전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